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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쿠농/장편 2015. 2. 2. 10:05[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5 (수정)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드디어 청흑온이 끝나고 새로운 달이 시작된 월요일입니다. 청흑온을 위해 그동안 달렸는데 지나고나니 후련하면서도 아쉬운 맘이 있습니다. 특히 5화를 올리기 위해 다시 읽어보는데 치명적인 오타도 있었곸ㅋ큐ㅠㅠㅠㅠㅠㅠㅠ 왜 퇴고는 계속해도 모자람이 없는 걸까요ㅠㅠ
아무튼 청흑온에서 만낫던 분들 정말 반가웠고요, 마지막으로 청흑온을 무사히 열어준 주최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주최분들 덕분에 청흑온이 무사히 열었고 저또한 재밌게 즐기고 왔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을 이기신 그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아무튼 후기는 이정도로 하고 5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부분에는 19금적 부분이 있어서 자체 검열한 글과 안한 비밀글 2개로 나누어 올립니다.
그럼 재밌게 읽어주세요! ><
쿠로코는 스스로도 자신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를 그렇게 짝사랑했으면서 여기에 있는 아오미네가 잘해주었다고 홀라당 반해버리다니. 자신이 이렇게 마음이 가벼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한 번 좋아해지자 마음이 변해지는 것을 막기 힘들었다. 그럴수록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에게 괜히 미안해자 그것도 웃겼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 와는 전혀 상관없는데.
평안재에서 두 아오미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쿠로코에게 이번에는 아오미네가 바다에 같이 갈 것이니 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바다라는 말에 궁 밖에 있는 해안가가 떠올라 왕이 성 밖에 자주 나가도 되나 싶었다. 괜히 갔다가 사람들이 쿠로코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보고 작살 들고 죽이려 드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참에 자신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였다. 바다에 들어가도 인어로 변하지 않는 쿠로코를 보게 된다면 아오미네도 더 이상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쿠로코는 비장한 눈빛을 한 채 전갈을 전하러 온 궁녀에게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눈빛을 읽은 그녀는 인어가 바다에 가서 왕을 어떻게 하려고 각오한 눈빛으로 오해했는지 몸을 파르르 떨 정도로 무서워했다.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쿠로코는 바다에 가서 아무 것도 안 할 거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궁녀는 서둘러 쿠로코의 전갈을 전하러 뛰쳐나갔다.
창문에서 뛰어가는 궁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니 씁쓸했지만 이젠 그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자신이 인어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그 소문은 순식간에 궁 안에 퍼져갈 것이다.
그렇다면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더 이상 관심을 안가지고 손수 내보낼지도 모른다. 어째 버림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만 쿠로코에게 중요한 것은 이쪽의 아오미네가 아니라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벗기 쉬운 상의로 갈아입고 자신을 데리러 온 금군 병사들과 같이 사직단이 있는 언덕 밑으로 가자 절벽 끝에 세워진 작은 문 앞에 아오미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금군 병사들 손에는 긴 작살을 들고 있었다. 어째서 가지고 왔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단지 바다에서 물고기나 잡을 생각으로 가져 온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작살의 날카로운 끝을 보자 쿠로코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쿠로코 앞에 있던 금군 병사가 그가 왔음을 알리자 아오미네는 고개를 돌려 웃으면서 반겼다. 평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움직임이 살짝 경직되어 있었고 긴장한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그게 많이 티가 날 정도는 아닌데 아오미네가 항상 쿠로코의 앞에서 여유로운 모습만 보여줘서 어색했다. 하긴 사람을 잡아먹는 인어를 바다에 데려가는데 왕인 그도 긴장할 수밖에 없을지도.
이윽고 문지기가 문을 열자 밖에는 바로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돌계단이 있었다. 계단 바로 끝엔 양 옆이 절벽과 큰 바위에 둘러싸인 작은 모래사장이 있었고 바위 위에 누워서 쉴 수 있을만한 작은 정자도 있었다. 마치 고급주택의 마당에 있는 수영장 같았다.
작살을 든 금군 병사가 먼저 내려갔고 그 다음에는 쿠로코, 뒤이어 아오미네가 금군 병사들에게 앞뒤로 보호 받으며 따라왔다.
모래사장에 도착하자 금군 병사들은 쿠로코에게 먼저 바다에 들어가라고 했다. 명령하는 모양새가 불쾌했다. 하지만 자신의 오해를 풀기 위해 스스로 왔으니까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 덧옷과 신발을 벗었다. 수영복이 없으니 바지도 벗어야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남들 앞에서 알몸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하얀 모래를 밟으며 쿠로코가 바다를 향해 걸어가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등 뒤에서 날카롭게 느껴졌다. 밀려온 파도가 쿠로코의 발을 간지럽히고 지나가니 시선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차가운 물에 새삼 기분이 야릇하고 더 긴장되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만에 하나 다리가 꼬리로 변하면 그땐 어쩌지.
쿠로코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허벅지까지 걸어서 들어가 보았으나 쿠로코의 다리는 역시 꼬리로 변하지 않았다.
안도하며 한숨을 쉰 쿠로코는 아오미네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쿠로코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는 꼬리로 변하지 않는 다리를 보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의심하고 있었다.
결국 허리까지 들어가서 바다 속을 여러 번 걸어가도 끝까지 다리가 꼬리로 변하지 않는 쿠로코를 본 사람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이제야 모든 오해가 풀렸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는지 아오미네가 파도가 닿는 곳까지 다가와 다시 해안가로 오는 쿠로코에게 물어보았다. 눈에 뜨게 당황하는 표정이 좀 바보 같았다.
“꼬리로 안 변해?”
“당연하죠. 인어도 아닌데 왜 변하겠어요.”
계속 아니라고 말했다고 덧붙이자 아오미네가 허탈하게 웃었다. 긴장한 것도 풀렸는지 다시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쿠로코가 인어가 아님을 알게 되었어도 예상과 다르게 그에서 실망한 내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금군 병사들에게 작살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고, 몇 명의 병사들이 다시 궁으로 올라 간 대신 대기하고 있던 궁녀들이 간식과 음료를 가지고 내려왔다. 내려오던 궁녀들도 인어로 변하지 않는 쿠로코를 보고 놀랐다.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벗어둔 옷을 정리하던 궁녀에게 자신의 덧옷도 넘기고 쿠로코가 있는 바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가려는 쿠로코의 팔을 잡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왕 들어왔으니 같이 수영이나 하지.”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수영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바다에서 노는 것도 그닥입니다.”
“인어랑 달라도 너무 다르군.”
쿠로코는 그의 말에 긴 한숨을 쉬었다.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그러던지 말던지 자기 상관 아니라는 식으로 그를 끌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쿠로코의 허리쯤까지 들어가자 아오미네는 손을 놓고 혼자서 헤엄쳤다.
그는 수영에 대해 잘 모르는 쿠로코가 봐도 정말 잘하는 편이었다.
멀뚱멀뚱 서있는 쿠로코 주위를 돌면서 수영하는 그의 모습은 자연스러워 그가 쿠로코보다 더 인어 같았다.
그렇게 몇 번을 물속에서 돌아다니던 아오미네가 배영 형태로 쿠로코에게 다가왔다. 아주 쉽게 물에 떠있는 그를 내려 보자 그가 물속에서 쿠로코의 손을 잡았다.
“제가 인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으신가봅니다.”
“이제 그런 건 상관없네. 어차피 백성들은 네 인어가 아닌 걸 모를 테니 여기 입단속만 제대로 하면 되고.”
“선전용으로는 이용가치가 있다는 말이네요.”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는 기분이 나빠져서 까칠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런 곳에서 그런 식으로 남들에게 보여 주기용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알자 같이 농구하는 동료들과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 옆엔 인어님, 아니 쿠로코 너로서 있으면 되네. 가끔 말투가 무례하지만 이젠 그런 것도 좋아. 그리고 항상 무표정이면서 전에 한 번 날 보고 멋있게 웃어주지 않는가. 그렇게만 해줘.”
듣기에 부끄러운 말에 쿠로코는 서둘러 시선을 그에게서 돌렸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닐 텐데 마치 사랑의 고백 받는 것 같아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심란한 쿠로코와 달리 혼자서 계속 신이 난 아오미네는 자리에 일어나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단숨에 수위가 어깨까지 올라오자 쿠로코는 당황해서 아오미네의 어깨를 꽉 잡았다. 해안가를 바라보니 그곳으로부터 제법 멀어졌다.
아오미네는 무서워하는 쿠로코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위로 올려주어 자신과 눈을 마주보게 했다. 그의 얼굴이 바짝 다가오자 쿠로코는 입을 맞출 것 같아서 머리가 달아오르고 몸이 굳어졌다.
“왜 이렇게 수영을 못 하는가. 시간만 나면 바다로 데려가겠네.”
“이건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그건 사양합니다. 저는 밖으로 나가고 싶으니 놔주세요.”
그의 말에 심술이 난 아오미네가 그만 겨드랑이를 잡고 있던 손을 확 놓았다. 순식간에 턱밑까지 빠진 쿠로코는 덩달아 발도 헛디뎌서 그만 완전히 빠져버렸다. 당황한 아오미네가 재빨리 쿠로코를 건져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죽다 산 쿠로코는 무의식적으로 아오미네의 어깨를 꽉 끌어안아서 최대한 위로 올라갔다. 다리마저 그의 허리에 감싸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오미네는 힘겹게 기침하는 쿠로코의 등을 쓸어 만져주며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 가득이었다.
결국 바다에서 노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아오미네는 해안가로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안긴 쿠로코를 달래주었다. 겨우 기침이 멈춘 쿠로코는 고개를 돌려 아오미네를 노려보았다. 언제 울었는지 눈가도 약간 빨갰다.
“정말 못됐습니다. 거기서 갑자기 놓아주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거기 엄청 깊었단 말입니다.”
“미안하네. 내가 다 잘못했다.”
말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아오미네가 얄미웠다. 그런데 그가 워낙 예쁘게 웃고 있어서 한 번은 봐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안겨있는 게 기분 좋기도 했고,
쿠로코와 아오미네가 나오자 궁녀들은 면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여기저기 만져대는 그녀들의 손길에 부담스러웠으나 그래도 다행인 건 젖은 옷을 갈아입자고 나서지 않았다.
그 상태로 정자에 가기는 갔는데 젖은 옷을 입고 나무 바닥에 앉아도 되는 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아오미네따라 쿠로코도 마지못해 들어갔다.
바다가 보이는 정자에서 바람을 맞으니 이건 이거대로 기분이 좋았다. 동료들이랑 같이 바다에서 합숙하다가 놀았던 것이 기억났다.
말없이 바다를 보던 쿠로코는 문득 처음 이 세계에 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아오미네는 배를 타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배도 여기서 띄우는 건지 궁금했다. 쿠로코는 시원한 차를 마시고 있던 아오미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오미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뱃놀이 하는 데 백성들이 사용하는 항구까지 일일이 행차하는 건 귀찮네. 차려입을 것도 많고 데려 가야하는 사람도 많아서 복잡하지.”
"은근히 귀찮은 것을 싫어하시네요."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더 가까이 와 그 때 자신이 배를 띄웠던 장소까지 가리켰다. 그가 알려 준 곳은 높은 절벽 앞에 있는 곳이었다. 쿠로코는 무의식적으로 절벽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위에 내궁의 기와집들 지붕이 조금 보였다.
“그 날, 그대가 날 구해주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 없었겠지. 나의 목숨을 구해 준 것 정말 감사히 여기고 있다네.”
“누구라도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했으면 구해 주었을 겁니다. 그래도 무사하시니 제가 있길 잘했네요. 덕분에 인어로 오해받았지만요.”
쿠로코의 말에 아오미네는 크게 웃었다. 그는 쿠로코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확실히 짙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는 여기 사람들 사이에서 쿠로코와 같은 옅은 머리색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 것보다 왜 인어들이 쿠로코와 같은 하늘색이라고 전해지는지 궁금했다.
“왜 이 색이죠?”
쿠로코가 묻자 아오미네는 차 한 모금 마셨다.
“태조가 그 인어에게 들은 이야기들 중 하나네. 그 인어의 말로는 인어들은 원래 하늘에서 사는 사람들인데 하늘에서 큰 죄를 짓고 바다에 떨어졌고, 결국 물고기처럼 꼬리가 생긴 그 사람들은 더 이상 돌아 갈 수 없는 고향인 하늘을 그리워하다가 눈에 하늘을 담고 그 색으로 머리를 물들었다고 하더군.”
“향수병이네요. 그 마음 이해갑니다.”
전설 속 인어의 이야기가 어쩐지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쿠로코의 처지와 닮았다.
궁에서 호의호식하고 이쪽의 아오미네가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주나 그렇다고 동료들과 가족이 있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이쪽의 아오미네보다 어리숙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항상 좋아했던 그 아오미네도 그리운 건 마찬가지다.
쿠로코는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를 떠오르면서 자신이 나타난 절벽 앞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때, 그 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빛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유심하게 보고 있던 중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에게 고개를 돌리니 그의 표정은 어느 순간 굳어있었다.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아오미네는 아무 말하지 않고 쿠로코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잡힌 팔이 저릴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면서 차마 놓아달라고 하지 못했다.
항상 화창했던 날씨가 오늘은 새벽부터 흐려지고 아침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먹구름이 끼더니 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폭우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더 이상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이 곳에서 쿠로코는 하염없이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궁안을 바라보았는데 폭우 속에서도 하급신하들은 짚으로 만든 비옷을 쓰고 바삐 움직였다. 특히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건 물통이란 물통을 다 가져와 빗물을 받는 일이었다.
홍휘궁은 물길이 없는 절벽 위에 지어진터라 물을 끌어오기 매번 힘들었다. 그래서 비가 오는 참에 필요한 물을 최대한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궁녀들이 차려준 식사를 마치자 지금도 내리는 빗속을 뚫고 아오미네가 보낸 가마가 평안재에 도착했다.
1층에 내려가 짚으로 만든 비옷을 입고 있는 가마꾼들이 들고 온 가마를 본 쿠로코는 같이 온 금군 병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오미네가 쿠로코와 함께 술자리를 갖고 싶어서 가마를 보낸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 마디로 이거타고 자신에게 오라는 뜻.
심심하던 차에 아오미네가 초대해준 건 고마웠지만 술자리는 꺼려졌다. 적어도 키가 자랄 가능성이 있는 24세까지는 성장에 안좋은 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쿠로코와 다르게 궁녀들은 즉시 준비하겠다며 그를 2층으로 끌고 갔다. 그녀들의 빠른 움직임에 당황한 쿠로코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히는 그녀들에게 자신은 갈 마음이 없다고 다급하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초대를 절대 거부하면 안 된다고 그를 혼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오미네에게 가기 위해 준비했다.
궁녀들이 입혀준 옷은 처음 본 것으로 다른 외출복과 다르게 입는 것도 별로 없었고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져서 가벼웠다. 새하얀 비단에 새하얀 실로 모란무늬자수를 새긴 옷은 드라마에서 중년부부들이 커플로 입고 나오는 잠옷와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모자라 궁녀들은 쿠로코에게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모를 장신구를 꺼내와 팔과 머리에 장식했다. 어디서 반지라도 껴본 적이 없었던 그는 화려한 장신구들을 보고 기가 질려 미간이 찌푸려졌다. 팔찌야 그렇다고 해도 짧은 머리에 머리 장신구가 고정되기 힘들 텐데 궁녀들은 얇은 끈을 이용해 기어코 장신구를 머리에 달아두었다.
마지막으로 가는 도중에 추위에 감기 걸리지 말라고 연보라색으로 염색한 덧옷을 입고 나서야 쿠로코는 금군 병사의 안내에 따라 가마에 올라탔다.
두꺼운 장막이 내려지자마자 가마꾼들이 기합 소리내며 가마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지붕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가마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여기저기 울려서 그 소리가 금세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발걸음을 조심히 해도 복잡한 길을 가는 버스보다 더 흔들렸다.
아오미네가 초대한 술자리로 가는 동안 가마 밖에서 있는 병사나 가마꾼들은 아무 말 없었다. 가득이나 가마 안은 무척 어두워서 가는 길이 지루해 쿠로코는 불편한 머리 장식을 매만졌다. 도착하면 장신구들은 모조리 벗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가서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고 이내 가마 지붕을 세차게 때리던 빗소리가 잦아졌다. 가마꾼들이 조심스럽게 가마를 내려주는 것을 보니 도착한 모양이었다.
안에 있던 쿠로코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가마 문을 열고 나오자 열어주려고 했던 병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건물 앞에 설치한 차양이었다. 아마 가마를 타고 오는 쿠로코가 내릴 때 비를 맞지 않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 같았다.
쿠로코는 말없이 앞에 있는 건물을 응시했다. 열어둔 문 너머에 있는 복도에는 군데군데 등불을 설치해서 아주 어둡지 않았다. 그런 복도 끝에는 유난히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방이 있었다.
가만히 서있는 쿠로코에게 못 보던 궁녀가 다가와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낮은 등불만 있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가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장지문 앞에 도착하자 거기에 있던 궁녀가 쿠로코의 얼굴을 확인하고 방 안을 향해 그가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얼마가지 않아 안에서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들렸고 기다렸다는듯 장지문을 열렸다.
등불을 여러 개 설치해서 밝은 방에는 침대가 있었고 쿠로코를 이곳으로 초대한 아오미네는 그 앞에 있는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테이블에는 일인용 의자는 없었고 아오미네가 앉아 있는 벤치와 같은 긴 의자밖에 없었다. 이미 마시고 있었는지 테이블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늦은 시간에 수고가 많았군. 이리와 앉으시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쿠로코는 형식적으로 인사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궁녀들은 따라오지 않았고 그가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장지문너머로 멀어지는 궁녀들의 발걸음소리가 의아했다.
테이블에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서 쿠로코는 어쩔 수 없이 아오미네 옆에 앉았다. 아무도 없이 단둘만 있는 방안에 옆에 있으려니 새삼 부끄러웠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그런 쿠로코의 속내도 모르고 그에게 좀 더 다가와 앞에 놓인 흰색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예쁘게 차려입었군.”
“아, 깜박하고 있었네요.”
말이 끝나지 무섭게 쿠로코는 궁녀들이 머리에 달아 준 머리 장식을 뺐다. 걸리적거리는 팔찌들도 모조리 빼서 테이블에 차곡차곡 올려두었다. 아오미네는 그런 쿠로코를 심술 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읽은 쿠로코는 그에게 장신구를 뺀 이유를 말했다.
“불편해서 빼는 겁니다. 여기에는 남자 분들도 이런 장신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대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술이나 한 잔 하시게.”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건배도 없이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그에 반해 쿠로코는 술잔을 들지도 않았다. 그러자 또 다시 아오미네의 표정이 미간을 찌푸려졌다.
“술이 마음에 안 드는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먹을 수 없습니다.”
“흐음, 나이가 어떻게 되길래?”
나이를 물어본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무 가까이 온 바람에 쿠로코가 놀라 몸을 뒤로 물렸으나 그럴수록 더 가까이 갔다. 그는 단순히 쿠로코의 얼굴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런 것일지라도 쿠로코에겐 좋아하는 사람이 가까이 온 것이라서 부담스러웠다. 그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생일이 지나서 이제 18세입니다?”
“근데 왜 미성년이라고 속였는가?”
아오미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되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오미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쿠로코를 보았다.
“하긴 그대가 있던 곳은 우리와 많이 달랐지. 여기서는 지습(知習)이 지나면 성년이네. 내가 성년이 되자마자 왕위에 올랐으니 아직 얼마 안 되었군.”
“설마, 당신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물음에 아오미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열일곱.”
열일곱이면 쿠로코보다 한 살이 어린 셈이었다. 쿠로코는 하도 아오미네가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보다 어른스럽게 봐서 적어도 20대는 훌쩍 넘겼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말투도 늙은이 말투였고.
아오미네의 나이를 듣고 놀라자 아오미네는 고개를 쿠로코에게 살짝 내밀었다. 장난스러운 미소는 그대로인 채.
“그대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존대했던 것이 억울했는가?”
“아니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만, 그렇게 나이 어리시면 말투 좀 어떻게 해보세요. 늙은이 말투 때문에 더 나이가 많은 줄 알았습니다.”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보다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늙은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 그의 심기를 건든 모양이었다.
그런 표정을 본 쿠로코는 능글맞은 아오미네에게 드디어 한방 먹어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오미네는 다시 몸을 뒤로 빼 바로 앉아 스스로 술잔에 술을 채웠다. 술잔을 들었지만 입에 대지 않고 쿠로코에게 다시 술을 권했다.
그러나 아무리 여기 기준으로 성년이라고 해도 쿠로코 본인은 자신 만의 기준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거절했다.
계속되는 거절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아오미네는 술을 마시면서 그윽한 눈으로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처음 하는 것일 테니 마시는 것이 좋을걸.”
“뭘, 처음해요?”
귀찮아서 미간을 찡그리며 던진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아오미네가 긴 팔을 뻗어 그의 뒷덜미를 덥썩 잡았다. 막을 새도 없이 그는 쿠로코를 끌어 당겨 순식간에 그와 입맞춤을 했다.
아랫입술을 뜯어 먹을 기세로 밀어붙이는 아오미네는 놀라서 벌어진 쿠로코의 입속으로 자신의 혀를 넣었다. 단단하고 축축한 혀는 뒤로 숨어버린 쿠로코를 집요하게 찾아서 건들었다. 맛을 느낄 때나 사용해왔던 혀는 아오미네가 스칠 때마다 짜릿한 자극을 느끼고 있었다.
아찔했다. 온 몸이 아찔해서 아오미네와 닿아있는 피부는 뜨거워졌고 손발이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오므라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랫배 한 가운데도 힘이 들어갔다. 몸이 제멋대로 반응한 것에 당황한 쿠로코는 자유로운 두 손으로 아오미네를 밀어내고 자리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굴하지 않고 자신도 자리에 일어나 쿠로코에게 다가갔다.
“잠깐만요. 우리, 말로 해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쿠로코는 정신없는 머리로 아오미네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다가와 쿠로코의 옆구리를 세게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에게 소용없었다.
그는 잡은 쿠로코를 그대로 침대에 던져버렸다. 갑자기 몸이 붕 떠서 침대에 떨어진 쿠로코가 몸이 놀란 나머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아오미네는 그 위에 누워 한껏 달아오른 몸을 그에게 밀어붙였다. 다시 거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만지는 느낌에 쿠로코는 점점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몸이 너무 천근만근이라서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귀찮아진 그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머리카락을 만지던 사람은 쿠로코의 고개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짜증나서 미간을 찌푸리자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으면 어서 눈 뜨지 그래?”
목소리를 듣자 쿠로코는 번쩍 눈이 떠졌다. 눈앞에서 옆으로 누워있는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쿠로코는 끝나자마자 여기에 잠들었다. 그렇다면 여긴 아오미네의 침실인가.
“안녕히 주무셨어요? 저는 다시 잘게요.”
“자지 말라니까. 곧 조찬 시간이야.”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지만 아오미네가 아예 쿠로코를 일으켜 세운 바람에 다시 자기 글렸다. 부족한 잠은 평안재에서 자야겠다 싶은 쿠로코는 한 숨을 쉬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왕의 침실치고는 조금 작은 규모였다. 침대는 어른 사이즈가 맞으나 다른 가구들은 전체적으로 화려하지 않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있었다.
그에 비해 바다를 향해 난 창문은 평안재 창문보다 훨씬 컸다. 거기에 창밖의 하늘은 절경이라서 마치 잘 그린 유화를 달아 놓은 것 같았다.
“하늘이 참 예쁘네요.”
쿠로코가 창문을 보고 한 말인 줄 알아챈 아오미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곳에 대해 설명했다.
“이 은의궁(恩義宮)은 왕의 침전이 아니야. 내가 세자일 때부터 있던 곳인데 저 풍경에 반해서 지금도 쓰고 있지.”
“참 특이하시네요. 왕의 침전이면 여기보다 클 텐데.”
“작아도 상관없어. 여기서는 바다가 잘 보이니까.”
참 유별난 바다 사랑이었다. 그래도 바다를 농구로 대입하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쿠로코도 그가 좋아하는 풍경을 보고 싶어서 자리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엎드러진 상태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할 때야 당연히 아팠지만 하고난 뒤에서 이렇게 아플 줄 몰랐던 쿠로코는 당황했다.
그러자 옆에 누워있던 아오미네가 한 숨을 쉬더니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는 옷의 허리띠를 둘러서 옷매무새를 다듬은 그는 엎드러져 있는 쿠로코를 끌어당겨 대신 상의 옷고름을 묶어주었다. 바지는 다른 곳에 널브러져 있어서 그것까진 입히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팔을 잡고 천천히 침대에 나올 수 있게 했다. 그가 부축해주니 아팠던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침대에 나와 일어섰을 땐 다리에 힘이 없어서 넘어질 뻔 했는데 다행히 아오미네가 그를 잡아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천천히 창문으로 가자, 아오미네의 말대로 절경이었다. 절벽 끝에 있는 정원 너머에서 보이는 푸른 바다는 마침 햇살에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하늘까지. 설화 속 인어들이 왜 하늘을 그토록 그리워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아름답네요. 매일 일어나면 이런 것을 볼 수 있어서 부럽습니다.”
“그렇다면 가끔 보러와.”
단순히 놀러오라는 말이 아님을 아는 쿠로코가 부끄러워하자 아오미네는 그의 머리에 얼굴을 기댔다. 좋아하는 그를 보니 쿠로코도 같이 기분이 좋았다. 서로 고백을 하지 않았지만 사귀는 사이가 된 것이 맞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가 떠올랐다. 심장은 달콤하게 뛰는데 입맛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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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1. 26. 11:15[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4
* 이 글은 1월 31일 청흑성인온에 낼 책의 맛보기 용 글입니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공개될 예정입니다. (성적인 부분은 비밀글)
안녕하세요. 아오입니다.
이제 청흑온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직 에필로그랑 그 침대...ㅆ..ㅣ..ㄴ.... 남았는데 마감은 이틀앞까지 왔네요. 그래도 청흑온이 무사히 열리길 바랍니다!!! 제가 이틀 안자면 되죠!
아무튼 우리 무사히 테츠오빠 생일에 만납시다ㅠㅠㅠ
참고로 우선 내일까지 이 책의 수량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여기로 [ http://me2.do/FIFzAzpv ] 조사에 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럼 청흑온 끝나는 다음주 ㄷ...대망의 5편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쿠로코를 보좌하는 궁녀들이나 혹시나 인어가 날뛸까봐 감시하고 있는 금군 병사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평안재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왔다. 쿠로코는 얼굴하나 들이매밀지 않았던 그들이 왜 자신을 만나려 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오미네와 산책을 갔다온 이후로 사람들이 찾아 온 것을 보아 왠지 아오미네가 그들에게 쿠로코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언급했음을 짐작했다.
아무튼 시작이 어찌되었든 쿠로코는 방문자들 덕분에 갑자기 없던 일정이 생겨나 바빠졌다. 쿠로코를 만나러 온 사람들은 딱 보아도 이 나라의 귀족같은 사람들이었다. 아오미네의 신하인 이마요시와 똑같이 생긴 관복을 입은 사람에서 시작해 고급스럽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한껏 치장해서 온 귀부인들까지 찾아왔는데 올 때마다 인어에게 드리는 선물이라며 화려하게 장식한 공예품, 딷 봐도 귀해보이는 과일이나 약초들, 아름다운 옷감, 심지어 남자인 쿠로코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장신구까지 있어서 받을때마다 부담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인어도 아닌데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에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했고 엄청난 관심을 견디기 힘들어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하도 기운이 없어 여기를 나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마저 들지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일주일이 지나자 쿠로코가 몸져 붑기 전에 동물원에 있는 동물을 구경하는 괜객들처럼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끽해야 하루에 두 명 정도 짧게 만나려 와서 어느정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가져오는 선물들은 부담스러워 공예품은 제외하고 모두 궁녀들과 금군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방문하는 사람들이 줄지 않았던 어느 날, 궁에서 상주하는 화공들이 찾아왔다. 인어가 궁에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하는 그들에게 쿠로코는 어색하고 귀찮아서 사양했지만 그의 의견은 가볍게 관찰되었다. 결국 언제나 적극적인 궁녀들에 의해 쿠로코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화려한 옷으로 챙겨입고 화공들 앞에서 앉게 되었다. 그래도 선물 받은 장신구도 채우려고 하는 궁녀들의 의지는 꺾을 수 있었다.
그들 중에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사람이 붓을 들고 쿠로코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메모할 책과 세필붓을 들고 쿠로코의 옆에서 바닷속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마치 연예인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것과 같았다. 모델인 키세라면 이런 상황이 익숙하겠지만 단순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 쿠로코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래도 그들은 기록을 위해 어쩔수 없이 하는 입장이니 성심껏 바다가 아닌 도쿄와 일본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쿠로코가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설명하는 탓에 물어본 사람은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쿠로코의 말을 받아적었다.
몇 시간 뒤 어느 정도 밑그림을 다 그린 화공들이 나중에 완성된 그름을 들고 찾아 오겠다며 평안재를 떠났다. 그들이 배웅하고나니 어느새 푸른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저 앉아있는 것뿐이었는데도 더운 날씨에 한껏 차려입은채로 긴장하고 있어서 강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무거운 비단 덧옷을 벗은 쿠로코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지 않고 바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늘은 화공들 덕분에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제 몹지 않게 피곤했다. 오늘 저녁도 먹기 싫은 쿠로코는 천천히 눈을 감으면서 내일은 부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찾아올 거면 차라리 아오미네를 데리고 오든가.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든 여기의 아오미네든 이젠 상관없이 둘 중에 누구든 보고 싶었다. 분명 그 얼굴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힘이 될 것이다.
평안재를 찾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며칠 전에 궁녀에게 들은 말로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쿠로코를 만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게 된 걸까.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어째든 쿠로코에겐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던 중 아오미네가 저녁을 먹고 나갈 채비를 하라고 전갈을 보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갈을 전하러 온 궁녀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성 안에서 5일에 한번 야시장이 열리는 데 아오미네가 그 곳으로 잠행을 갈 예정이고 거기에 쿠로코도 동행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잠행에 자신을 데려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야시장에 간다는 사실에 기대되었다. 원래 세계에 있는 야시장과 여기 야시장이 뭐가 다를지 상상하고 있던 쿠로코는 신나서 저도 모르게 계속 웃고 있었다.
저녁을 죽으로 간단하게 먹자, 궁녀들이 다른 옷으로 갈아 입혀주었다. 잠행을 가는 거라 전에 입혀준 옷들 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옅은 아이보리색의 바지를 입히고 위에는 황토색 모시 상의를 입혔다. 이번에는 허리띠도 매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한 건 얼굴도 가릴 정도로 큰 삿갓을 쓰여주었다. 챙이 넓고 깊어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삿갓이 불편해 벗으려고 했다가 쓰여준 궁녀에게 절대 벗지 말라고 혼났다.
“저희는 이제 괜찮습니다만 백성들은 인어님을 보고 심히 놀랐겁니다. 밖에선 절대 벗지 마세요.”
낭랑한 목소리를 낮게 깔고 그렇게 말하니 쿠로코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별 의식하지 않았던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 주리야.
초롱을 들고 길을 안내하는 금군 병사를 따라 다른 대문들보다 훨씬 작은 문에 도착했다. 그 곳에 있던 문지기는 삿갓을 쓴 쿠로코를 보고 소문의 인어임을 알아채고 잔뜩 긴장해 창을 바로 잡았다. 잠시 후 쿠로코가 온 길로 아오미네가 온다는 안내가 들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삿갓을 들어 아오미네를 보니 그도 쿠로코와 마찬가지로 수수한 옷을 입었다. 그러나 아무리 수수해보여도 남색 비단 덧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딱 봐도 귀족 나으리이었다. 삿갓을 쓴 쿠로코와 달리 남색 두건으로 된 모자를 쓴 것 말고는 당당히 얼굴을 드러낸 그를 보니 답답해 보이지 않아 부러웠다.
가까이 온 아오미네에게 인사했지만 궁녀가 절대 벗지 마라는 말을 잊지 않고 예의에 어긋날지라도 삿갓은 벗지 않았다. 그러자 아오미네는 오히려 만족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나인들이 잘 가르쳤군. 그런식으로 절대 삿갓을 벗지말게.”
“하지만 이거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불편합니다.”
그래도 하늘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 참으라는 아오미네가 얄미워 보였다. 그렇게 따지면 왕의 얼굴도 가려야 하는 거 아닌가. 쿠로코는 그에게 요목조목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다 그의 심기를 불편해져 자신을 야시장에 데려가지 않을까봐 입을 꾹 다물었다.
아오미네의 명령에 문지기가 문을 열자 마찬가지로 관복이 아닌 평범하게 입고 초롱을 든 금군 병사들과 함께 아오미네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나가는 쿠로코는 삿갓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발밑을 보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때 아오미네가 쿠로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을 잡아. 그러면 앞이 보이지 않아도 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거다.”
삿갓을 들어 환하게 웃는 아오미네를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뛰는 심장에 놀랐다. 아마 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에 들떠서 덩달아 그런거다. 쿠로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오미네의 호의는 무시할 수 없었서 쿠로코는 머뭇거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처음 잡은 그의 손은 굳은 살 위치가 원래 세계에 있는 아오미네와 달랐다. 아니 크기도 달랐다.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의 손을 잡아 본 건 그가 아직 작았던 중학교때였다.
아무도 없는 샛길따라 계속 내려가보니 저만치에서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삿갓을 살짝 들어 앞을 보자 유독 밝은 불빛이 나는 곳이 있었다. 전등보다 어두운 초롱을 달아서 화려하게 밝지 않아도 한 눈에 저기가 야시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동료들과 야시장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보았던 형형색색에 빛나던 아오미네가 문득 그리웠다.
드디어 도착한 야시장은 초입부터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에 와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쿠로코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그들은 원래 세계의 사람들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아오미네를 따라 야시장에 진입했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전혀 치이지 않았다. 아마 남들보다 훨씬 덩치가 큰 아오미네 뒤에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주위 사람들이 아오미네를 피하는데 급급했다.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한 쿠로코는 삿갓을 살짝 들고 그들을 관찰해보았다. 자기들끼리 아오미네를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나, 당황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오미네를 보고 반해 두 손을 꼭 모은 소녀들까지. 그들의 반응이 너무 신기해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손을 놓친 것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그러나 아오미네가 잠시 멀어지자마자 존재감이 옅는 쿠로코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파묻혔다. 앞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오미네를 찾았다. 키가 큰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쿠로코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자꾸 앞을 막고 있어서 가까이 가기 힘들었다.
계속 그렇게 사람에 치이다가 어떤 사람이 저도 모르게 손으로 쿠로코의 삿갓을 쳐버렸다. 하도 답답해서 처음부터 갓끈을 풀어놓았는데 그 때문에 쉽게 들리고 말았다. 뒤로 넘어가는 삿갓을 잡지 못해 그만 하늘색 머리카락 보여질 찰나 누군가가 삿갓을 잡고 다시 쿠로코에게 쓰였다.
“이 녀석! 어딜 혼자 돌아다닌 거야!”
버럭 소리 친 사람은 아오미네였다. 잔뜩 화가 난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거칠게 끌어 당겨 자신이 바짝 오게 만들었다. 갑자기 그의 품에 들어온 쿠로코가 당황해서 밀치자 그는 양 손으로 갓끈을 잡고 잡아 당겼다. 두 번 다시 갓끈이 풀어지지 않도록 그가 대신 묶어주었는데 어찌나 힘주어 묶던지 매듭 짓는 순간 숨이 막혀 기침이 나왔다.
“갑자기 없어지면 어떡해! 삿갓도 벗겨질 뻔 했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러면 내 손을 꽉 잡고 있어야지. 자네는 손 잡는 걸로는 안되겠다.”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아예 자신의 앞에 두고 갔다. 왼쪽으로 가면 쿠로코를 왼쪽으로 틀고, 오른쪽으로 가면 그를 오른쪽으로 트는 모양이 마치 자신이 자전거가 되어 운전당하는 느낌이었다. 잠깐 미아가 되었다지만 애들도 아니고 이런 자세는 굴욕적이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으나 그래도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오미네의 앞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뒤로 뒷걸음쳤고, 다른 사람들은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은 아오미네와 눈을 마주쳤는지 눈동자를 돌리고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고, 어떤 여인은 같이 온 아이가 손가락으로 아오미네를 가르키며 뭐라고 말하는 순간에 아이의 입을 막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단순히 덩치 큰 사람을 피한다고 하기엔 뭔가가 달랐다.
이거 잠행이라고 들었는데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니 이미 야시장에 왕이 왔음을 알아챈 것 같다. 하긴 따지고 보면 남들보다 덩치도 크고, 피부도 남들보다 새까매서 존재감이 엄청난 이 사람을 못 알아 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아오미네에게 달려들지 않고 최대한 모르는 척하는 그들이 참 상냥하다고 느껴졌다. 이 곳의 아오미네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받고 있었다.
그렇게 시장 중간까지 오자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어느 노점 앞으로 갔다. 노점에선 팔뚝이 굵은 아저씨가 힘차게 야끼소바 같은 것을 만들고 있었다. 근데 큰 중화팬에 면을 볶고 있는 건 맞지만 냄새는 야끼소바랑 달랐다.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계속 앞에 세운 상태로 노점에 있는 아저씨에게 국수 한 접시 달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새로 들어온 주문에 신나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아오미네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러나 바로 표정을 바꾸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 나으리, 얼마나 드릴까 굽쇼?”
“거 적당히 많이 주쇼.”
귀족같이 입고서는 부랑배를 따라하는 말투가 이상해서 쿠로코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놀란 사람들과 달리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싱글벙글하게 웃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완벽하게 변장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건가. 사람들이 어색한 변장을 속아주는 것도 모르고 있는 아오미네가 참 바보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와중에 그런 그가 아오미네가 예뻐보였다.
아저씨는 남들 주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얹은 야키소바 같은 국수를 떨리는 두 손으로 아오미네에게 주었다. 아오미네 앞에 있는 쿠로코가 받자 아저씨는 유령이 나타난 것 마냥 더 화들짝 놀랐다. 놀란 가슴을 쓸어만지는 노점 아저씨에게 미안했지만 어쨌든 국수를 받는 두 사람은 노점 옆에서 먹을 수 있는 자리에 갔다. 이미 사람들이 가득한 그 곳에 아오미네가 나타나자 제일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술 마시다 말고 화들짝 놀라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저씨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준 국수는 맛있었다. 확실히 간장소스 맛이 강한 야키소바보다 덜 짭조름했는데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 향이 강했다. 그래도 입맛이 맞아 잘 먹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아오미네는 먹지도 않고 쿠로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쿠로코가 삿갓을 들어 눈을 마주보자 예쁜 미소로 물어보았다.
“어떤가?”
“야키소바요? 맛있습니다.”
“아니, 국수 말고 이 거.”
라고 말하면서 아오미네는 자신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입고 온 옷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쿠로코가 의아하게 보면서 옷 잘어울린다고 말하니 아오미네가 답답했는지 주위를 살펴보다가 쿠로코에게 속삭이며 ‘변장’이라고 말했다.
“이정도면 완벽하지? 가끔 야시장이 열릴 때마다 오는 데 아무도 눈치 못 챈다고.”
아오미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로코는 먹던 국수를 뿜었다. 아까부터 안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본인이 결정타를 날려준 바람에 쿠로코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전부터 여기 사람들이 이 바보같은 왕을 위해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고 생각하니 그 정성이 기특하고 웃겼다. 과연 그들은 아오미네가 올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쿠로코가 웃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테이블에 엎드려져 있자 아오미네는 그가 어디 아픈지 알고 당황했다. 어깨를 흔들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쿠로코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웃음끼가 가시지 않았던 터라 미간을 찌푸린 그의 얼굴이 귀여워서 다시 웃음 터졌다. 쿠로코는 아오미네에게 속아 준 사람들을 생각해서 필사적 변명했다.
“당신이 멋져서 그랬습니다.”
“자네도 멋지네.”
뜬금없는 말에 놀라서 웃는 것도 멈추어졌다. 그러자 아오미네는 손을 뻗어 쿠로코의 뺨을 만졌다.
“항상 무표정이었다가 웃으니 이제야 인물이 훤하군. 앞으로도 계속 웃고 다니게."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바라보며 예쁘고 환하게 웃었다. 어루만져주는 손길과 그 미소에 쿠로코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아까 손을 잡아줄 때보다 더 심하게 뛰고 있어서 이대로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터지고 심장이 너덜너덜 해질 것 같았다. 쿠로코는 아픈 심장을 부여잡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아오미네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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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1. 19. 12:17[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3
* 이 글은 1월 31일 청흑성인온에 낼 책의 맛보기 용 글입니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공개될 예정입니다. (성적인 부분은 비밀글)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잘 맞춰서 왔습니다 데헷-
3편은 거의 이 세계의 아오미네가 사는 곳에 대해 설명하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래서 별로 재미없을지도... 그래도 재밌게 봐주신다면...
다음주면 청흑온도 얼마 안남았네요!! 아직 쓸것도 많고 수정할 것도 많은데 힝ㅠ
이 책에 대한 인포는 이번주 수요일까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계세요 ><!
꿈이라고, 며칠 전에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쿠로코는 아무리 잠을 깊게 자고, 하루 종일이 침대에 누워 잠만 자려고 노력해도 절대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간절하게 이번에는 꿈에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빌고 하룻밤을 보내고 또다시 이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노라면 그렇게 허망하고 당황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기 위해 살을 꼬집고 뺨을 때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마지막에는 화분을 깨서 자해까지 해 볼 생각도 했다.
결국 쿠로코는 여기도 꿈이나 환상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이라고 인정했다. 문득 책에서 보았던 평행이론이 생각났다. 그 가설대로라면 이 곳은 쿠로코가 있던 원래 세계의 평행세계이며 아오미네를 닮은 그 사람도 환상이 아니라 또 다른 아오미네인 것이다. 그렇다면 쿠로코는 애니메이션 또는 장르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차원이동을 직접 겪었다는 것인데, 원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그 욕탕이 무슨 X먹는 우물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차원이동을 해야 하냐고 물어봐야 할 텐데 과연 이 사람들이 차원이동에 대해 이해는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평행이론은 그저 가설일 뿐, 차원이동을 겪은 쿠로코도 본인이 어떻게 왔는지 정확하게 모르니 다른 사람에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X먹는 우물 같은 차원 이동할 수 있는 장소를 찾거나, 디X이드의 벨트와 카드를 어디서 주워와 가면X이더라도 되던가, 하다못해 철 주전자를 구해와 돈네X만이랍시고 뭐든 만들어 봐야 할 텐데 그럴러면 여기를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곳은 얼굴은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뿐이라서 여기를 나가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왕이 나서서 귀빈 취급해주지만 외지인이 함부로 궁을 나돌아다니면 궁 안에 있는 무사들에게 침입자라고 쫓아올 것이다. 운이 좋아 궁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쿠로코는 여기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인어로 오해 받고 있으니 그들에게 잡히게 되면 곱게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설처럼 사람들에게 작살로 찔릴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으로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여기를 떠나기 전 아오미네를 닮은 그 사람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이 곳에서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가자, 정오부터 그 사람이 찾아왔다. 통 입맛이 없어 아침밥을 무르고 침대에 누워만 있던 쿠로코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야 했다. 저번처럼 깔끔하게 덧옷까지 입은 그 사람의 모습에 씻지도 않은 남루한 자신이 부끄러워 괜히 뻗친 머리를 매만졌다. 허나 그 사람은 그런 걸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인어님이 도통 밖에 안 나오신다고 들어 걱정되어 찾아왔소.”
“나가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쿠로코가 의아해서 묻자,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의아하면서 대답했다.
“산책 정도는. 물론 금군 병사와 동행하는 건 당연하오.”
그 대답에 역시라고 생각했다. 계속 사람을 잡아 먹는 인어로 오해를 받으니 이젠 변명할 기운이 없었다. 이 머리카락이 뭐라고. 시선을 피하고 한숨을 쉬는 쿠로코에게 그 사람은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나의 궁은 아름답다고 소문이 낫소. 지금부터 내가 산책 동료가 되어 주리라.”
쿠로코는 그 제안이 솔깃했다. 처음에 와서 본 그 커다랗고 오묘한 청자 기와가 인상적인 근 건물도 보고 싶었고 자신이 묻고 있는 궁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오미네를 닮은 사람과 돌아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련 없이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황제로 만들 인어를 순순히 보내 줄 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존재감이 옅다는 특기를 살려 몰래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번 산책을 통해 천천히 탈출루트를 짜기로 했다.
제안에 응하자 궁녀들은 그 사람을 1층으로 내려 보내고 서둘러 쿠로코에게 옷을 입혔다. 다시 궁녀들이 입던 잠옷을 손수 벗겨 다른 옷으로 입혀주고 있었지만 속옷을 입을 상태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상하게 적응력이 좋은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바다와 같은 청록색 옷을 입고 내려가자 그 사람은 환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항상 꿍해있는 원래세계의 아오미네보다 표정이 밝아서 중학교때의 아오미네를 보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가 그때 큰 상처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인어라서 그런지 역시 바다색깔이 잘 어울리오.”
쿠로코는 그 칭찬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쿠로코가 그 사람에게서 아오미네를 보고 있듯이 그도 쿠로코를 인어로만 보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그는 앞서 밖으로 나가는 그 사람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에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아마 그쪽보다 제가 어릴 겁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리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쿠로코가 자신의 옆에 서길 기다리면서 이름을 물어보았다. 쿠로코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전에는 꿈이라서 말해주지 않았지만 현실인 걸 알았으니 이름을 알려줘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쿠로코(黑子)라……. 이름마저 예전 인물이군. 아무튼 어서 갑세.”
이번에는 이름에 어떤 전설이 내려오길래. 의문점만 남기고 아오미네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쿠로코도 딱히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들어도 왠지 좋을만한 사연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도 쿠로코에겐 아오미네의 말투가 어색했다. 그에겐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하대가 익숙하겠지만 쿠로코는 늙은이 말투로 다가왔다. 저 얼굴에 그런 말투를 쓰니 위화감이 들었다.
쿠로코와 동행하는 행차는 검푸른 기와 궁벽과 옥색의 청자 기와 궁벽 사이에 있는 길에서부터 시작했다. 지내고 있는 평안재에서 보았던 그 길이었다. 그 사잇길은 꽤 넓어서 양 궁벽에는 키가 작은 나무를 심어놓아도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적인 이유로 구불구불하게 포장 된 길은 하얗거나 짙은 회색 석판을 땅에 모자이크처럼 깔아서 귀여웠다.
궁녀들과 금군 병사들을 이끌고 길 가운데로 행차하는 아오미네는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쿠로코에게 홍휘궁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오부의 속아문 관청들을 비롯해 대언사도 있지. 혹시 요전에 본 지신사를 기억하는 가? 그가 있는 곳이 대언사일세. 나와 가장 가까운 자이지.”
대언사라면 이마요시와 얼굴과 이름이 같은 사람을 말했다. 그가 왕의 측근이고 외견상 젊은 나이에 높은 관직에 있다는 사실이 쿠로코는 사람 기분 나쁠 정도로 심리전을 펼쳤던 그 이마요시가 떠올라 납득했다. 원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아오미네의 말을 가만히 듣던 쿠로코는 궁금한 것이 있어 습관대로 손을 들고 물어보았다.
“저기에 도서관도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책을 보관하는 장소 같은데요.”
“아, 장서관(藏書館)을 말하는가? 그런 곳이라면 당연히 있다만 쿠로코 자네는 글도 읽을 줄 아는군. 바닷속에 책이 있다니. 신기하군.”
“그것 실례되는 말씀이십니다. 학생이나 당연히 한자 정도는 읽을 수 있고요. 국어는 가장 자신있는 과목입니다. 그리고 저는 인어가 아니라 바닷속에 책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책 정도는 있습니다.”
이렇게 인어가 아니라고 열심히 피력하자 효과가 있었는지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사는 곳이 궁금해하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래서 쿠로코는 그에게 도쿄의 건물은 어떻고, 자신은 부모님, 할머니와 같이 살며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마지막에는 가장 좋아하는 농구에 대해 제일 열심히 설명했는데 아오미네는 잘 이해 못하는 듯 했다.
농구야 당연히 모를 수 있다만 전혀 관심이 없는 그를 보니 조금 서운해졌다. 얼굴과 이름이 아오미네와 닮았으니 이왕이면 농구도 좋아해주면 좋을텐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무가 있던 사잇길은 끝났고 아오미네와 함께 왼쪽으로 돌자 이번에는 강둑 같은 곳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평안재에서는 궁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제 보니 이 궁은 계단식 구조이었다.
그 길은 걸어온 사잇길보다 넓었으나 나무는 없었고 가운데에 망루 같은 정자가 있었다. 그저 단순한 넓은 길처럼 보여도 아래층에는 꽃밭과 수생식물이 자라는 연못이 있어서 정원처럼 보였다. 사잇길이 공원의 산책로 같다면 이 곳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오기 좋은 쉼터 같았다.
사잇길처럼 왼쪽에는 청자기와 궁벽이 그대로 이어졌고 오른쪽 언덕 위에는 검푸른 기와를 얹은 기와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만 화려하게 빛나는 청자 기와를 얹은 건물이 또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언덕 위로 올라가는 석재계단이 있었다. 쿠로코의 시선이 계단과 청자 기와집에 향해 있다는 것을 안 아오미네가 그 곳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위는 내궁이라고 가운데에는 왕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네. 그 양 옆에는 왕자, 공주 혹은 후궁의 처소가 있는데 나에게는 아직 후궁도 없어 지금 텅 비어있다네.”
그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에 놀랐다. 생긴 것으로는 이미 결혼하고 남았을텐데, 아마 늦게 결혼 할 생각인가보다. 쿠로코는 그가 미혼이라는 사실에 속으로 안심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지라도 부인이 있다고 하면 진심으로 좋아하는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와 겹쳐 보여 괜히 질투 났을 것이다.
계속 산책을 하던 중 석재계단 옆에 있는 망루 같은 정자에 다다르자 아오미네가 멋진 곳을 보여준다며 정자에 함께 올라가자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먼저 올라가는 그를 따라 나무계단으로 정자로 올라갔을 때 현판에 관조정(觀朝亭)라고 적힌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있기 엔 조금 좁은 정자에 올라가니 계단식 구조 덕분에 처음 보고 압도했던 그 큰 건물 말고도 쿠로코가 보지 못했던 이 궁의 건물을 다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궁 밑에는 여러가지 크기의 기와집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소박한 나무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길거나 짧은, 넓거나 좁은 거리에는 개미만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바다에는 조업중인 배들도 보였다.
이 궁 자체가 언덕 위에 있어서 평안재의 가장 큰 창문에서도 파도 치는 해안가와 그 곳에 가까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성 안의 전경을 한꺼번에 보는 건 처음이었고 탁트인 엄청난 경관에 놀라 가슴이 벅차 올랐다. 현판에 쓰여진 그 이름대로 바다에 아침해가 떠오를 때 보면 더더욱 멋질 것 같았다.
절경에 소름이 돋아 아무 말이 없는 쿠로코에게 아오미네는 정자에 올라 온 감상을 물어보았다. 단순히 물어보는 말인데 어투에 이 곳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름다워요 ……. 이 궁도, 마을들도, 바다도.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런 절경은 처음이에요.”
“나도 이 곳에 올라오면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네. 새벽에 일어나 정무를 볼 준비를 하고 외궁으로 내려가면 아침 해가 떠오를 때인데 가끔 여기에 올라와 이렇게 성 안을 내려다보면 이 곳과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이 곳을 지으신 현종께선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라는 마음에서 이 정자를 지었을 걸세.”
아오미네 말에 쿠로코도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자를 만드신 분은 정말 현명하신 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쿠로코도 절경에 홀딱 반해 이 곳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아직 보여줄 것이 많다고 서둘러 정자에 내려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쿠로코는 이미 내려간 그를 따라 내려가려는 참에 자신 뒤에 있었던 내궁도 볼 수 있었다. 내궁 가운데에 있는 청자 기와집은 3채로 삼각형 꼭지점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정원이 있었고 바로 수평선이 보였다. 왕의 처소가 있는 내궁에 있으니 외지인인 쿠로코는 가 볼 수 없지만 저기에서는 또 다른 절경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관조정에서 내려온 뒤 다시 청자 기와 궁벽을 따라 정원 끝까지 걸어갔고, 또 한번 왼쪽으로 틀자 이번에는 다른 곳보다 궁벽이 낮아 그 안이 보이는 장소였다. 가깝게 붙어 있는 기와집에는 같은 옷을 입은 궁녀들과 푸른색 관복을 입은 신하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가사일을 하거나 공방처럼 전통 공예품 같은 것을 만들고 있었는데, 한쪽 구석에는 글자가 인쇄된 종이를 널려있어서 흥미가 갔다.
아오미네는 이 곳을 궁녀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그 많은 궁녀들이 생활하는 곳치고는 장소가 협소해 보였는데 아니다 다를까 여기서 보이지 않는 언덕 밑에 궁녀들의 생활동이 있단다.
절경을 감상할 수 있던 관조정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곳 중에서 이 곳이 가장 볼 재미가 있었다. 왕이 행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에 바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문득 고개를 뒤로 돌리니 지나간 곳에서 어린 아이들이 낮은 궁벽 위에 얼굴만 빼꼼 내밀어 행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머리를 묶은 모양새가 궁녀와 같은 것을 보아하니 견습중인 어린 궁녀들 같았다.
쿠로코는 어린 궁녀들이 발간 볼을 한 채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구경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계속 뒤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어린 궁녀들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살짝 웃어주었고 어린 궁녀들은 하늘색 눈동자에 놀랐다. 그러나 무서운 것보다 신기했는지 도망치지 않고 자기들끼리 재잘대며 웃고 있었다.
그랬던 귀여운 궁녀들은 이번에는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따라 자기들을 보자 새파랗게 질려 황급히 궁벽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 때문에 어린 궁녀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자 쿠로코는 아쉬워하며 옆에 있는 아오미네에게 투덜거렸다.
“왕이시면서 어린 아이들에 겁을 주면 어떡합니까?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었는데.”
그러자 아오미네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헛웃음치면서 대답했다.
“어린 나인들이 숨은 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그렇죠. 험악……. 그게 아니라, 아무튼 다정하게 웃어주면 아이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겁니다.”
차마 왕에게 얼굴이 험악하다고 할 수 없어서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말에 여전히 어이없어 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아오미네가 사직단에 볼일잉 있다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이 동행 중이었던 쿠로코도 당연히 그를 따라갔다. 언덕 아래에 있다는 사직단은 안이 보이는 낮은 궁벽 안에 건물 두대가 마주보고 있는 곳이었다. 그 안에 염색한 거처럼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익숙한 남자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멀리 사직단 밖에서 본 낯이 익은 사람의 이름은 듣지 못했으나 아마 와카마츠가 아닐가 짐작했다.
대문이 없는 그 곳에 들어간 아오미네는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불렸다.
“와카마츠,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이름말고 직함으로 불러달라고요. 전하. 제가 아직도 말단입니까.”
목청도 좋은 와카마츠는 원래 세계의 와카마츠답게 왕인 아오미네 앞에서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보면 무례할 수 있는 그의 행동에도 아오미네는 원래 그랬다는 듯이 흘려듣는 것을 보니 원래 세계의 두 사람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오미네를 따라 사직단 앞까지 왔건만 안에 있는 두 사람은 쿠로코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게다가 그와 함께 있는 와카마츠는 쿠로코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않은 모양이었고. 그래서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두 사람사이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쿠로코는 뒤돌아 사직단이 아닌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정원에 갔지만 졸졸 따라 붙었던 금군 병사나 궁녀들도 그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혼자가 된 쿠로코는 맘이 편안해져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연못하나 없는 작은 정원에서 좀 더 바다가 보이는 끝까지 가자 그 근처에 신기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흔한 나무가 아니라서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나무가 특이했던 건 나무기둥 가운데에 사당같은 작은 목조 건물이 붙어있었다. 정확히는 그 나무가 목조 건물의 지붕을 뚫고 있었다.
왜 이렇게 지었는지 궁금한 쿠로코는 허락도 없이 그 사당에 다가갔다. 한 사람만 겨우 들어 갈 수 있을 만한 문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으나 잠겨있지 않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혹시나 몰라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가니 좁은 내부에는 불상하나 없이 덩쿨에 둘러싸인 나무기둥만 있었다. 그러나 쿠로코는 그 나무 기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게 자란 기둥에는 마치 여인의 상체와 같은 조각이 있었는데 그 여인의 얼굴을이 중학교 동창이자,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의 소꿉친구엿던 모모이를 쏙 빼어 닮았던 것이다.
“어째서 모모이 씨는 이런 모습인가요.”
다른 토오 사람들과 같은 얼굴과 이름을 한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서 혼자 사람이 아닌 모모이를 보니 안쓰러워 쿠로코는 그녀가 있는 나무 기둥으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어루 만져주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아오미네가 사당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그만, 더 이상 다가가지마.”
위압적인 목소리에 놀란 쿠로코는 서둘러 나무에서 떨어져 아무 일도 안했다는 식으로 양 손바닥을 들어 보여주었다, 이방인이 동행도 없이 멋대로 돌아다녔다고 혼날까봐 긴장하고 있었으나 아오미네는 등장과 달리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괜히 마음이 불편한 쿠로코가 말이 많아졌다.
“아무 것도 만지지 않았습니다. 훔친 것도 없고요.”
“그건 자네 손에 아무 상처가 없다는 것으로 알 수 있네. 그나저마 그 나무는 위험하니 이리오게나.”
그에게 책 잡히지 않게 쿠로코는 바로 그의 옆에서 약간 뒤로 갔다. 그의 등 뒤에서 가까이 붙으면서 저 나무가 뭐냐고 물어보니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내려다 보며 사람을 잡아먹는 복숭아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여럿 사람이 이 나무 앞에서 목숨을 끊었는데 그 피를 먹고 자란 것인지 싹이 난지 한 해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 만큼이나 자랐다네.”
“인어에 나무라니, 여기는 다 사람 잡아먹는 것 밖에 없습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위험한 나무라면 왜 없애지 않은 건가요?”
“나무에 있는 여인이 내 누이를 닮았거든. 그래서 차마 벨 수 가 없었네.”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의 표정은 비록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리움과 아련함이 드러났다. 이 곳의 모모이가 아오미네의 누이라는 건 그렇게 놀라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미 고인이라는 사실에 조금 착찹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원래 세계의 모모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들어온 자신때문에 아오미네가 죽은 누이를 생각하면서 우울해하는 것 같아 쿠로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살아있을 때 정말 미인이셨겠네요. 마음씨도 착했을테니 분명에 좋은 곳에 있겠지요.”
“지금도 아름답다네.”
지금도라니?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에 쿠로코가 벙쪄서 입을 다물지 못하자 아오미네는 놀란 눈을 마주보고 소리내 웃었다. 그리고 큰 손으로 호탕하게 쿠로코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덧붙였다.
“내 누이는 나와 달리 일찍 혼인을 올려서 여기에 없네. 조금 먼 곳으로 가서 자주 못 보는게 아쉬울 뿐이지.”
쿠로코는 아오미네에게 맞은 어깨를 쓰다드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그녀도 여기에 있으면 더 반가웠겠지만 그래도 살아있는게 어딘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불길한 나무가 모모이를 닮았다는 사실은 찜찜했다.
“오히려 불길한 나무가 당신의 누이를 닮았다면 베어버리는 것이 그녀에게도 좋은 거 아닌가요?”
“무조건 없앤다고 능사는 아닐세. 그리고 이제 더이상 죽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위험한 나무라고 말한것과 다르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치렁치렁한 소매를 걷어 맨살인 왼쪽 팔을 나무를 향해 내밀었다. 첫낳 그가 알몸인 쿠로코에게 자신의 덧옷을 벗어주었을 때 보았던 상처가 많았던 그 팔이었다. 기둥에 붙어 있는 덩쿨은 마치 먹이감 냄새를 맡은 뱀마냥 움직여 아오미네의 팔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후 덩쿨이 감싼 곳에 피가 새어나왔다.
“자신의 피로…….”
상상 속에만 있을 식인식물이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을 처음 본 쿠로코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오미네가 놀라웠다. 왕이라면 튼튼한 부하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나무에게 피를 줄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그의 우직한 책임감 때문일 터.
얼굴도 좋아하는 사람과 닮았는데 성격마저 남자가 반할 정도로 멋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이대로 반할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쿠로코는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모이를 닮은 불길한 나무는 다행히도 아오미네의 피를 얼마 먹지 않고 자신의 덩쿨을 갈무리했다. 상처와 피가 남은 팔을 사당에 걸려있던 면수건으로 닦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그냥 헌혈 한 것처럼 보였다.
헌혈(?)을 끝난 아오미네를 따라 사당을 나와 다시 사직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니 그 안에 있던 와카마츠를 닮은 사람이 미간을 찌푸린 채 쿠로코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인사라도 할까했지만 아오미네가 그런 그에게 스치듯이 인사하고 훌쩍 가버린 바람에 아무 말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도 딱히 인사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무렇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산책은 경광문(耿光門)을 통해 쿠로코를 압도하게 만들었던 경광전(耿光殿)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자 끝났다. 이후에 아오미네는 공무를 보기 위해 편전으로 간다고 했기에 쿠로코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 하루 재미있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말 재미있었나?”
고개를 가까이하고 다시 감상을 물어보는 그의 말에 쿠로코는 의아해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말로 재미었었다고 다시 말해주었다. 무표정한 얼굴때문에 산책이 지루했다고 받아드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다음에 봅세.”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어찌나 멋지게 웃던지 주위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궁녀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쿠로코도 같이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 얼굴에 열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그와 헤어지고 머물고 있는 평안재로 돌아가는 길에도 쿠로코 눈 앞에는 자신에게 지어주었던 아오미네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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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쿠농/장편 2015. 1. 14. 12:09[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2
* 이 글은 1월 31일 청흑성인온에 낼 책의 맛보기 용 글입니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공개될 예정입니다. (성적인 부분은 비밀글)
안녕하세요. 아오입니다.
사실 이번주 월요일에 올렸야 했는데 그때 저는 일본에 있었던지라 지금이라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늦어진 점 정말 죄송합니다.ㅠㅠㅠ
그래도 2편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그럼 다음주에 3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오미네와 이름과 얼굴도 완전 똑같은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 같은 걸 하자 무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쿠로코를 이끌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갇혀있던 감옥에서 나가자 이마요시를 닮은 사람까지 있었다. 놀란 쿠로코와 눈이 마주친 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마요시와 같은 포커페이스로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어님. 지산사 이마요시 쇼이치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그 사람에게 쿠로코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분명 표준어로 말하는데 억양이 간사이지방 사투리이라서 조금 웃기면서도 반가웠다. 인사 후 별 말이 없던 그 사람은 먼저 간 아오미네를 닮은 사람을 따라갔다. 그들은 보니 왠지 와카마츠랑 사쿠라이도 어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쿠로코는 말없이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가며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마치 TV에서 방영해주는 사극에서 보았던 전통 건물처럼 보았다. 허나 기와를 올린 건물들이 수학여행에서 먼발치에서 보았던 일본의 성과 비슷해 보여도 풍기는 분위기는 오히려 중국의 자금성에 가까웠다.
나무에 하얀 칠을 하고 그 위에 너무 검어서 퍼렇게 보이는 기와를 올린 건물들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쿠로코를 데리고 가는 사람들의 걸음이 무척 빨라 쫓아가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어가 웬만한 건물보다 훨씬 큰 대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가자 엄청 넓은 광장이 있었고 그 끝에 엄청나게 큰 건물을 떡 하니 서있었다. 하얀 돌로 만든 기단 위에 있는 이층 건물은 지나쳤던 대문보다 더 컸다. 하지만 규모보다 놀라운 건 지붕에 얹은 청자 기와이었다. 햇빛을 받은 옥색의 청자 기와는 각도에 따라 푸른색, 흰색, 금색으로 보였다. 건물에 화려한 그림이 없어도 기와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하고 빛났다.
청자 기와의 오묘한 빛깔에 홀려 멍하니 있는 쿠로코에게 옆에 있던 무사가 이쪽이라며 끌고 갔다. 그들을 따라 오른쪽 문으로 가는 중에도 그 건물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넓은 광장을 지나 오른쪽 문을 지나자 바로 어떤 2층 건물에 도착했다. 아까 그 광장에서 보았던 큰 건물에 비하면 작아도 구색은 갖춘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묘했던 청자 기와가 아니라 보통 검푸른 기와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위에 있는 현판에는 평안재(平安齋)라고 쓰여있었다. 건물 안에는 품이 넒은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들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올라간 2층은 방문 없이 바로 커다란 방 하나였다.
하얀색이 돋보이는 차분한 겉모습과 다르게 건물의 인테리어는 화려했다. 벽을 붙어 있는 금색벽지는 번쩍거리고 이파리 무늬가 기품이 있었다. 가구는 테이블, 둥근 의자, 천 덮개가 있는 큰 침대로 구성이 간결해도 각자 화려한 연꽃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인테리어에 화려함을 더 했다. 그리고 방 곳곳에 있는 붉은 꽃 장식은 남자인 쿠로코에겐 부담이었다.
같이 들어 온 여자들 두 명과 무사 한 명은 계단 앞에 서있기만 했다. 덩달아 쿠로코도 그들을 따라 얼떨결에 같이 옆에 서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 말도 없이 요지부동이어서 서 있기 민망했던 그는 혼자 방안으로 들어갔다. 대충을 주위를 살펴보고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도 그들은 쿠로코를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이 큰 방안에 혼자 있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젊은 여자들 앞에서 알몸에 가운만 입고 있자니 부끄러웠다. 쿠로코는 그들에 등을 돌리고 속살이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옷 매무새를 수시로 고쳤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로코가 있는 방으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서 자리에 일어났더니 올라 온 사람들은 옷가지를 들고 온 여자들이었다. 새로 온 그녀들은 눈도 안 마주치고 테이블 위에 가져 온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여자 두 명이 쿠로코가 입고 있던 가운을 벗기려고 했다.
"잠, 잠깐만요! 지금 알몸입니다. 제가 알아서 입을 테니……."
그러나 다급하게 말한 쿠로코의 말을 간단하게 무시되었다. 벗기려는 가운을 꽉 붙잡아 보았지만 그녀들은 의외로 힘이 강했다, 자신의 의지에 다르게 너무나도 간단하게 가운을 벗겨지자 쿠로코는 최후의 수단으로 서둘러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려보았지만 그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쿠로코의 두 손을 붙잡아 떨어트려 완전히 드러난 맨 다리에 부드러운 면으로 만든 바지 같은 속옷과 짙은 푸른색 바지를 입혔다.
많은 여자들 앞에서 자신의 남성과 엉덩이를 보여졌다는 사실에 쿠로코는 당황하지 못해 허망했다. 순결을 빼앗긴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지도.
그 이후부턴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화려한 무늬의 비단으로 만든 옥색 긴 상의를 입힌 다음 짙은 푸른색 허리띠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아오미네를 닮은 사람이 입혀준 가운과 비슷하지만 사이즈만 다른 하얀 가운도 입혀주었다. 입혀주는 손길은 재빠르고 깔끔했는데 왠지 그녀들의 손 끝이 떨렸다.
그들이 준 옷을 다 입고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앉으니 또 다른 여자들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도 음식 가짓수가 단순히 한 두 개가 아니라 많았다. 제법 큰 테이블인데 그 위에 빈틈이 보이지 않도록 많은 음식이 올라 온 것을 보니 먹지 않아도 질릴 것 같았다. 대식가인 카가미가 와서 같이 먹어주지 않은 이상 쿠로코는 일주일 내내 먹어도 다 먹을 수 없을 것처럼 그 양이 너무 많았다.
음식을 다 차리자 쿠로코 옆에 두 명만 남아있고 나머지 분들은 일제히 아래로 내려갔다. 혼자 내버려주지 않은 그들이 부담스러워 배가 무척 고팠어도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이들이 절대 멀어지지 않을 거 같아 쿠로코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었다.
겨우 밥을 다 먹고난 뒤 옆에 있는 그녀들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했다. 머뭇거리며 자리에 일어나니 식사를 차려졌던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음식이 그대로 남은 접시들이 순식간에 치워졌다. 쿠로코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보다 작은 여자분들이 열심히 일하는데 남자로서 가만히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막상 도와준다고 나서다가 무시 당할 것 같았다.
다시 어디에 앉을 데가 없었던 쿠로코는 눈에 보이는 침대에 걸쳐 앉았다. 그러자 그의 눈 앞에 닫혀있는 창문이 보였다. 장지창을 달은 창문은 꽤 컸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탈력해버려 다시 일어나는 게 귀찮았다.
쿠로코가 계단 앞에 있는 여자와 무사에게 이제 그만 가봐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자리를 지켜야 한다며 비켜주지 않았다. 끝까지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그들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써봤자 어차피 스트레스만 더 받을 뿐이었다.
여기에 있다 보니 마치 오리엔탈리즘을 이상하게 표현한 게임 속 아바타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모든 감각이 이상없이 잘 느껴지고 있는데도 그 정도로 이 상황이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건 꿈이 아닐까. 이렇게 생생한 꿈은 처음이지만 인X션을 보면 사실적으로 생생한 꿈도 있으니 그 쪽이 여기에 있는 이유로서 더 현실적이다.
꿈이라면 잠만 자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어서 이 정신 없는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쿠로코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허리에 꽉 조인 허리띠가 불편했지만 잠이 먼저였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눈을 감으면 다시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몇 번이고 눈을 다시 떠봐도 이상한 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아서 꿈에서 깨지 않는 거라고 넘겼다.
그렇게 멍하니 누워 있었을까. 한 여자가 침대 쪽으로 걸어와 멀찌감치 서서 '전하'가 곧 오실 거라고 일렀다. 솔직히 너무 귀찮아서 아오미네를 닮은 사람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방을 안내해주고 성대한 만찬도 보내 준 정성을 생각해서 침대에 일어나 그를 맞이 하기 위해 테이블 앞에 앉아 기다렸다.
곧 온다는 말과 다르게 체감상 10분이 지나서야 건물 밖에서 행차했다는 목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아오미네를 닮은 그 사람이 2층으로 올라왔다. 그를 따라 무사 다섯 명도 같이 올라왔는데 어찌나 다들 덩치가 크신지 넓은 방이 갑자기 좁게 느껴졌다.
“인어님, 우리들의 정성은 마음에 들으셨소?”
아오미네를 닮은 사람은 상냥한 얼굴로 말했으나 그 말에는 자부심과 오만함이 있었다. 천하제일유아독존 같은 모습은 쿠로코가 알고 있는 아오미네와 조금 달랐다. 쿠로코는 빈말이라도 자신을 챙겨주는 그녀들을 위해 그에게 허리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다.
“덕분에 편히 지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어가 아닙니다.”
“왜, 그대가 인어가 아니오?”
그렇게 말한 그 사람은 쿠로코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침에 보았던 그 무사가 다가가지 말라고 막았지만 개의치 않고 바짝 가까이 왔다. 그는 손을 내밀어 쿠로코의 머리카락을 가득히 쓸어 만졌다. 마치 신기하고 귀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이렇게나 아름다운 하늘색인데.”
희끄무레한 자신의 머리카락이 왜 이 사람에게 특별한지 몰랐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신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오미네를 닮은 그의 손길과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그 아오미네가 아닌 것을 가슴만 몰랐다. 쿠로코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평범한 머리카락입니다.”
“인어들에겐 평범할지 몰라도 우리들에겐 평범하지 않지.”
“도대체 그 인어라는 게 뭡니까.”
오해 당할 거면 차라리 뭔지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쿠로코도 같이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 사람이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잠시 후 그가 쿠로코에게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하자고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어님에게 해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아서 해주겠소.”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자 그 여자들이 바로 차와 다과를 내왔다. 도대체 이런 것을 언제 준비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녀들은 차를 내어주고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바로 옆에 서서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부담스러워하는 쿠로코와 다르게 그 사람은 이렇게 여자를 옆에 세워두고 차를 마시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자세도 다도를 지켜 차를 마셨다. 그 모습에 친구이자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얼굴이라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향긋한 차향도 와 닿지 않았다. 아무튼 그의 행동을 따라 차를 마시자 그 사람이 드디어 궁금했던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나라에는 당신에 관한 전설이 있소. 여기 앞에 있는 바다가 인어들이 사는 곳인데 그 인어들이 외모는 아름다워도 성격이 포악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자들이라고 전해지지.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인어를 무서워하는 것이오.”
그 말에 쿠로코는 아까 자신에게 옷을 입어 준 여자들 중 한 사람이 손을 떨었던 것을 떠올랐다. 자신은 절대 인어도 아니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지만 왠지 그녀들을 무섭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예전에 태조께서 이 지역을 지나다가 성 앞에 있는 해안가에서 큰 상처를 입고 떠밀려 온 인어를 발견하셨지. 아마 그 인어는 어부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것이오. 태조도 인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파하는 인어를 가엾게 여겨 손수 치료하셨고, 다 나은 인어는 그 은혜를 감복하여 바다 속에 있는 금은보화를 주었다오. 그 덕분에 이 나라를 건국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하오.”
“당신께선 저한테 금은보화를 원하시는 겁니까?”
쿠로코의 말에 그 사람은 웃으면서 그런 건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하기야 한 나라의 왕이라면 국가가 몰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금은보화에 욕심이 없을 게 뻔했다. 그 사람은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것뿐이라면 인어님을 여기에 데려오지 않았겠지. 그 인어는 바다로 돌아가면서 태조와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축복을 내렸는데, 그 내용인 즉 인어가 다시 이 바다에 다시 돌아오면 이 나라에 황제가 나올 것이라는 말이오.”
그 말에 쿠로코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인어라고 해도 자신에게 그를 황제로 만들 능력이 있을리가 없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설이 이루어질까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양인데 쿠로코가 정말 인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까. 저 얼굴로 다시 실망하는 표정을 보는 건 이쪽이 더 싫었다. 하지만 괜히 속여서 나중에 들키는 것보단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낫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정말 인어가 아닙니다. 그저 머리카락이 닮은 사람일 뿐입니다. 외모도 아름답지 않고 지긋이 평범합니다.”
쿠로코의 말에 그 사람은 쿠로코를 위 아래로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살짝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내내 불편했던 자신이 해준 것처럼 빈말이라도 잘생겼다고 해주면 좋은 게 사람의 심리 아니던가.
“허나 그대가 나를 바다에서 구출 해주신 걸 들었소. 우연이라도 인어님이 아니라면 난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오. 내가 인어님에게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있어주시오.”
말로는 그렇게 해도 얼굴에서 보이는 야망에 쿠로코는 씁쓸했다. 원래의 아오미네와 다른 사람인 걸 알면서도 계속 그와 비교하며 실망했다.
대화가 끝나고 쿠로코가 별 말이 없자 그 사람은 그만 가보겠다며 자리에 일어났다.
“이제 가보겠으니 편히 쉬시오. 인어님.”
쿠로코는 계속 인어라고 말하는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알려줄 뻔 했지만 입을 다물고 그저 허리 숙여 잘 가라고 인사했다. 어차피 꿈이 깨지면 금세 사라질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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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1. 5. 11:49[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1
안녕하세요. 아오입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으세요 ></
사실 해가 바뀌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안납니다. 그렇기에 저는 아직 한살먹지 않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는 청흑으로 찾아 뵙습니다. 이 글은 이번달 31일에 열릴 청흑성인온에 낼 예정인 글입니다. 네.. 성인온이니 구금이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씬은 많이 않을거고..... 조금 부끄럽고...ㅋㅋㅋ
간단하게 인어를 위한 소야곡에 대해 설명하자면 쿠로코가 온천에 있다가 갑자기 차원이동을 해서 다른 세계에 있는 아오미네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게 청흑인지 아오미네 얼굴을한 모브흑인지 구분이 안가서 아마 취향을 타실겁니다. 게다가 차원이동이라는 뻔한 소재이지만 제가 차원이동물을 좋아...해..ㅇ 응.. 많이.. 좋아해...ㅋ.ㅋ.ㅋ
여기에는 맛보기 용으로 올리는 것이라서 구금씬은 비밀글로 올라가고 에필로그는 올리지 않을 겁니다. 근데 에필과 구금 분량이 많지 않아서 읽는데 불편하지 않으실거에요 헤헿.
이번주부터 일주일에 한편씩 총 7에서 8회를 걸쳐서 공개됩니다. 과연 시간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어쨌든 연재하는 동안 이 글도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뜨거운 온천물에 비해 노천온천의 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겨울에 이렇게 노천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지만 쿠로코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치고 쌀쌀한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몸에 살도 없고 근육도 적어 추위를 잘 느끼는 것이니라. 두 번째 윈터컵을 끝내고 농구부 동료들과 뒤풀이 여행으로 온천을 찾아왔다. 졸업을 앞둔 선배들을 위한 송별회 기념 여행이기도 해서 즐거움 이면에는 겨울바람과 같은 쓸쓸함도 있었다.
그런 그렇다고 치고 우연의 일치이었는지 이번 온천여행에서도 토오고교를 만나고 말았다. 휴가 선배는 폭군 기운을 대놓고 드러내며 욕탕을 돌아다니는 토오애들을 보면서 이번 윈터컵에서 졌던 것이 떠올라 심기불편함을 감추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언제 그랬듯이 그들과 친하게 투닥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작년에 비하면 세이린과 토오사이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 긴장감은 없었다.
쿠로코는 말없이 욕탕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의 앞에 마주보며 앉아있는 아오미네는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올라오고부터 소년티가 많이 벗겨진 편이었지만 거기서 1년이 지나 3학년을 앞둔 아오미네를 보니 작년보다 많이 남자다워졌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봐도 멋진 남자이다. 자유롭게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더 반하지만 외모만 봐도 충분히 반할만하다. 중학교때도 그에게 반한 농구부원들이 많았고 그중에 한 명이 쿠로코이었다.
쿠로코가 아오미네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건 농구를 잘하는 모습보다 실력이 딸린 쿠로코를 위해 주었던 그 상냥한 마음 때문이었다. 비록 한 순간이었지만 그런 아오미네와 친하게 지냈던 그 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남자임에도 아오미네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행복을 먹고 자란 시커먼 애정은 그대로 남아 그와 어색해진 지금까지 쿠로코의 가슴에 숨쉬고 있었다.
언제는 그 마음이 점점 커져버려 꽉찬 바람에 가슴이 아팠던 적도 있었다. 차라리 그에게 한 대 맞을 지라도 키스을 해버릴까 며칠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괴로울때면 그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참았다. 어차피 이런 짝사랑은 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은 아오미네에게 서운했다.
온천 열기에 멍하니 옆에 앉은 카가미와 수다를 떨고 있는 아오미네를 보고 있던 사이 어느새 욕탕 안에 안개 같은 수증기들이 자욱이 끼기 시작했다. 그가 하얀 수증기에 가려지자 아깝다고 느꼈다.
수증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뜨거운 온천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보니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 정신이 몽롱해졌다. 주위에서 동료들을 찾는 소리가 들렸으나 쿠로코는 대답하지 않고 흐려지는 앞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몸이 점점 뜨거운 물 속으로 빨려들어가 이내 머리끝까지 잠겼다.
그러다 숨이 막혀서 물속에 눈을 뜨는 순간, 쿠로코는 뜨거운 온천이 아닌 무척 차갑고 어두운 물속에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만해도 욕탕에 있었는데 지금은 발밑이 닿지 않자 쿠로코는 숨이 턱하니 막히고 심장이 덜컹거렸다. 살기 위해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수면 밖으로 가까스 나왔다. 허나 눈앞에 보이는 건, 별이 수많은 어두운 밤하늘과 달빛이 일렁거리는 짠 물 뿐이었다. 동료들과 있었던 온천이 전혀 아니었다.
어째서,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왜 자신이 바다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건 분명 꿈이었다. 온천에서 그만 열사병에서 쓰러져 꾸는 꿈이 아니라면 전혀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꿈에서 깨기 전에 우선 살아남고 봐야했다. 쿠로코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면서 달빛에 의지해 주위를 살펴보았다. 가까운 곳에는 해안 절벽이 있었다. 다행히 쿠로코가 있는 곳이 먼 바다는 아니었다. 그리고 뒤돌아보니 가까운 곳에 등불을 켠 작은 배가 떠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쿠로코는 그 곳에 어떤 사람이 서있는 것을 보았고 서둘러 그 곳으로 헤엄쳤다.
온 힘을 다해 헤엄쳐 배에 다다를때 배 위에 있던 펑퍼짐한 옷을 입은 사람이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배 밖으로 쓰러졌다. 눈 앞에 사람이 물에 빠지자 쿠로코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빠지는 사람이 아오미네로 보였다.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힘없이 바다에 빠진 사람은 정신을 잃었는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쿠로코는 두려운 것도 잊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잠수했다. 물 속에 팔을 몇 번 휘저으니 손에 옷 같은 것이 잡혀서 얼마 안 남은 힘을 다 짜내어 끌어당길 수 있었다.
쿠로코는 물에 빠진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도록 그의 얼굴을 뒤에서 안아 수면 밖으로 들어 올렸다. 거친 숨을 내쉬며 가까이 살펴보니 어두운 곳에서 눈에 띄이지 않는 검은 피부와, 짧게 자른 머리, 험악하지만 제법 잘생긴 이목구비가 확실히 아오미네가 맞았다. 그러나 정신을 잃었는지 아오미네는 수면 밖으로 나와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오미네 군, 아오미네 군 정신 차려보세요!"
파도 소리도 가릴 정도로 큰 소리로 아오미네를 불려보아도 그가 눈을 뜨지 않자 쿠로코는 가슴이 철렁했다. 인공호흡이 시급했다. 그에게 인공호흡을 할 수 있을 만한 곳은 그가 타고 있던 배 밖에 없었다. 과연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배 위로 태울 수 있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곳은 보이지 않았다.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머리가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배로 헤엄쳤다. 파도에 밀려 배가 그들에게 점점 멀어져서 아무리 헤엄쳐도 다다르지 못했다. 그래도 쿠로코는 아오미네를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해지는 것이 더 걱정되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 들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게 맞다. 쿠로코는 소리가 들렸던 절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그 근처에 작은 배 두 척이 보였다. 횃불이 보이는 그 배를 향해 쿠로코는 목을 쥐어짜듯이 소리쳤다.
"여기! 여기에 사람이 있었어요!"
배에 있는 사람들은 쿠로코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고 빠르게 다가왔다. 다가오는 배를 보면서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나왔다. 쿠로코에게 다다른 두 척의 배는 그의 양 옆에 섰다. 쿠로코는 눈이 마주친 사람에 자신보다 먼저 아오미네부터 건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밀었다. 쿠로코와 아오미네를 보고 놀란 그들은 아오미네를 조심스럽게 바다에서 건졌다. 그리고 배 위에 눕혀서 상태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우선 그가 물 밖에 나갈 수 있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한 쿠로코는 이제 배에 손을 대고 그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근데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배를 잡고 있는 쿠로코의 손을 밀쳤다.
그들이 왜 그런지 알지 못하는 쿠로코는 불쾌했다. 그래도 살기위해 다시 한 번 배에 다가가자 이번엔 머리 위로 그물이 떨어졌다. 꽤 무거운 그물 무게에 못 이긴 쿠로코는 머리가 바다에 잠기고 말았다.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팔다리 허우적댔지만 그물 때문에 막혀버렸다. 당황하니 숨이 더 가파올랐다. 입과 코로 들어오는 바닷물에 정신을 잃어갈 때쯤 그는 그물에 끌어올려졌다.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그물 끌어올려진 느낌은 해먹보다 더 불편했다.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물로 끌어올린 쿠로코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아직도 숨쉬기도 어려운데 내쳐진 데가 아파서 쿠로코는 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왜 이런 곳에 와서 험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쿠로코는 자신보다 다른 배로 구조된 아오미네가 더 걱정되었다. 아오미네의 상태를 물어보기 위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그물을 떼어내고 상체를 들었다. 그러자 배 위에 있던 어떤 사람이 쿠로코의 뒷 목을 강하게 내리쳤다. 안 그래도 아오미네까지 들고 헤엄치고 있던터라 힘이 없었던 쿠로코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아오미네는 일어나마자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띵하게 울리는 것보다 두피가 더 따가워서 아팠다. 관자놀이보다 위쪽이 아파 손을 대보니 머리에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기억이 나는 건 자신이 바다 위에 떠오른 달에 취해 홀로 조각배를 타고 있었던 것뿐이라서 어떻게 은의전(恩義殿)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오미네는 몸을 일으키고 방 밖에서 서있을 궁녀를 불렸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 온 궁녀는 아오미네의 상태를 확인하고 곧 내금군장(內禁軍將)을 데리고 오겠다며 다시 나갔다. 어째서 그를 부르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아오미네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침대에 일어났다. 궁녀들을 부르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에 그 궁녀가 내금군장인 스사를 데리고 왔다. 자주색 정복을 차려입은 그는 아오미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무슨 일로 아침부터 왔어."
"머리는 괜찮으십니까. 어젯밤에 배에 타고 있을때 갑자기 바다에 빠지셨습니다. 전하의 머리에 난 찰과상을 보아 누군가가 전하를 노린 것 같습니다."
"범인은?"
옷을 다 입은 아오미네가 스사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그는 고개를 더욱 숙이고 아직 못 찾았다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최선을 다해 조사하겠습니다."
"아니다. 지금까지 못 찾았다고 하면 이미 몸을 감춘 지 오래다. 하지만 나를 해치고자 한 자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은 내릴 것이니 명령을 기다려."
아오미네의 말이 끝나자 스사는 빠르게 대답했다. 궁녀가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밖을 보니 이미 해는 중천에 가까웠다. 오늘 할 정무가 그만큼이나 밀린 것이다.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오미네는 침방에서 나왔다. 바로 자리에 일어나 아오미네의 뒤를 따라오는 스사가 다시 말했다.
"정무를 하러 가시기 전에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뭐."
"인어를 붙잡았습니다."
인어라는 말에 아오미네는 가던 길도 멈추고 스사를 돌아보았다. 아오미네와 눈이 마주친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중요한 걸 먼저 말했어야지!"
아오미네는 그때 융통성 없는 자신의 내금군장을 진심으로 내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사를 앞에 두고 서둘러 인어가 잡혀있다는 금군청(禁軍廳)으로 가자, 이미 대언사(代言司)의 지신사(知申事)인 이마요시가 그 앞에서 아오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오미네를 발견한 그는 허리를 숙이고 마중했다.
"전하, 몸은 안녕하십니까? 어제 인어에게 구출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인어가 나를 구출 했다고?"
처음 듣는 말에 아오미네는 놀라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스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또 다시 무릎을 굽히더니 미처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아오미네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 자가 이렇게 융통성이 없다니까."
하지만 이마요시는 왕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능구렁이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전하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좀 더 아껴주시죠."
이마요시의 말에 괜히 자기만 속 좁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입안이 씁쓸해졌다. 이렇게 사람 속을 잘 긁어놓는 사람이지만 왕인 자신이 훌륭한 인재로 인정하여 손구 입궁시켰으니 이제와서 성격이 이상하다고 내치기도, 무시하기도 힘들다.
아무튼 그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금군 벙사들이 장창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언제나 당당한 그들이지만 오늘만큼은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자는 두려워하고, 어떤 자는 기뻐서 흥분한 것 같았다.
감옥을 지키고 있는 상군장(上軍官)이 앞으로 나와 아오미네에게 인사했다. 뒤이어 인사를 올리는 금군들에게 대충 인사한 아오미네는 단도직입적으로 인어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대장이 안내한 곳은 금군청에서도 가장 깊숙히 있는 감옥이었다. 단단한 유창목으로 창을 만든 감옥 너머에 피부가 허연 남자가 알몸으로 붙잡혀 있었고 두 팔은 벽에 연결한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정신을 잃고 있어서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으나 머리카락은 분명 인어의 하늘색이 맞았다.
아오미네는 감옥을 지키고 있는 금군에게 왜 옷을 입고 있지 않나고 물어보니 이 남자는 바다에서 잡혀왔을 때부터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 소리에 감옥 안에 있는 인어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아오미네를 올려다 보았다. 그 크고 동그란 눈동자마저 전설로 내려져 온대로 하늘색이었다. 전설의 인어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보니 흥분되었다.
반면 생각보다 그리 아름답지 않는 외모를 가진 인어는 아오미네를 보고 기쁜 내색을 띠었다. 어째서 인어가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오미네 군! 너도 여기에 있었군요. 어제 바다에 빠지는 거보고 정말 놀랐는데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아무튼 여기가 어디에 있는 곳인지 모르겠지만 저 분들에게 나도 풀어달라고 해주세요."
오늘 처음 본 인어가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침에 내금군장이 자객에 습격당한 것 같다는 말이 떠올라 어쩌면 인어로 변장해 자신을 해치려고 온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아오미네의 표정은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인어에게 다가갔다. 주위에 있는 금군 병사이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요."
그렇게 묻자 오히려 인어쪽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아오미네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참나 내가 왜 너를 몰라요? 지금 이 상황에 너만 감옥에 안 갇혀있다고 장난치는 겁니까."
"장난이라니, 장난은 인어님이 하고 계시는거고. 나는 분명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물었소."
아오미네는 또박또박 목소리에 힘주어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같이 노려보았다. 아무리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 데 도와준 인어라고 해도 왕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눈을 마주보는 그 눈빛이 매우 불쾌했다.
인어는 아오미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신 누구십니까."
갑자기 자신을 모르는 척하는 인어가 우스워 그가 보는 앞에서 헛웃음쳤다.
"이젠 모른다고 하네. 나는 동호국(東䨼國)의 15대 국왕 아오미네 다이키이오."
그의 말에 인어의 낯빛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마치 눈 앞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절망에 빠졌다. 계속 이상한 말을 하고 사연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인어가 왠지 슬퍼 보였다. 말없이 아오미네를 보던 인어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까와 다르게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알몸이라고 해도 수상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 그만 풀어주세요."
"미안하지만 인어를 그냥 풀어줄 수는 없소."
"아까부터 인어라고 하는데 저는 인어 같은 게 아니라 보통 사람입니다. 자 봐요. 꼬리도 없지 않습니까."
"꼬리야 얼마든지 감출 수 있겠지."
아오미네가 끝까지 반박하자 인어는 고개를 들어 다시 아오미네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적의를 잔뜩 드러냈다. 맹한 보이는 표정에서 이런 모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차라리 불쾌하게 만든 그 눈빛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호의라도 있었다.
"그렇게 수상하면 절 물에 빠트려 보던가요."
"사람을 해치고 도망가게 할 수 없지."
그의 말에 인어는 황당해하며 소리치듯이 말했다.
"제가 언제 사람을 해쳤는데요. 그걸 보기라도 했어요? 그럼 애먼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감금하는 건 잘하는 일입니까."
버럭 화내는 인어의 행동에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창을 들어 창 끝을 인어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인어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아오미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한편 아오미네는 죽어도 지지 않으려는 그 기세에 다시 놀랐다. 인간 세상을 전혀 모르는 인어라 그런지 몰라도 감히 한 나라의 왕 앞에서 기 싸움을 하겠다는 그 성깔이 오히려 자신을 이상하게 봤던 눈빛보다 마음에 들었다. 왜 마음에 드는지 자신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전설의 인어를 오해하고 대우하지 못한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결국 아오미네는 인어에게 미소를 지으며 감옥 문 앞에 있는 병사에게 그를 풀어달라고 명령했다. 허나 그의 명령에도 그 병사는 두려운 마음에 감옥 안에 있는 인어의 눈치를 보고 바로 풀어주지 않았다.
그 무시무시한 인어 앞이었으니 아오미네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열쇠를 받아 자신이 직접 열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스사가 대신 감옥 안에 들어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열쇠로 인어를 결박한 수갑을 풀었다. 인어가 자신을 풀어 그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아오미네는 인어가 어떤 자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까와 다르게 예의 바른 모습은 뭐란 말인가.
호위무사가 자신의 팔을 세게 잡고 억지로 일으키자 인어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졌다. 그래도 전설과 다르게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급소를 노릴 수 있을 만한 빈틈이 많이 보인데도 말이다. 감옥에 나온 인어는 스사에게 잡힌 채 아오미네 앞에 섰다. 자신보다 훨씬 체구가 작아 그가 두렵지 않았다. 또한 그 맹한 표정 때문에 사람을 잡아 먹는 게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인어는 한 손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며 아오미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입을 옷 좀 주세요. 어제부터 계속 알몸이어서 부끄럽습니다."
바다에만 사는 인어가 옷을 찾는 상황이 아오미네에겐 우스웠다. 의외로 인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서 어느새 불쾌했던 인상이 점점 호의로 바뀌었다. 그는 인어에게 미안하며 스사에게 그만 인어를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비단으로 만든 길고 하얀 덧옷을 벗어서 인어에게 입혀주었다. 얼떨결에 왕의 옷을 입은 인어는 그 의미를 모르는 지는 아무렇지 않게 허리 숙여 고마워했다. 자신 몸에 맞지 않는 옷 때문에 어색해하는 그 모습이 초야를 앞둔 여인 같기도 했다.
아오미네는 인어 앞에서 허리를 세우고 당당하게 말했다.
"인어님에게 대접하지 못한 점 대신 사과 드리지. 나의 홍휘궁(鴻輝宮)에 오신 걸 환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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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12. 8. 11:56[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8
안녕하세요. 아오입니다.
이번에는 빨리 찾아왔습니다 헿헤 약속한 내일모레보단 길었지만여...
웹연재를 끝까지 마친 건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원고말고는 거의 단편만 썼는데 장편하나를 마치니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한편으로는 후련합니다.
지금까지 읽으면서 아카시는 너무 굴려지고 쿠로코는 맨날 우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그건 착각입니다.(어딜
이것으로 파수꾼 아카시와 안내자 쿠로코의 이야기는 끝입니다.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죽을 뻔도 하고, 감옥도 갔지만 그래도 엔딩은 언제나 해피입니다. 이 앞으로도 여러분 생각 속에서 행복하게 지낼겁니다.
나중에 2월달 넘어 시간이 되면 이 설정으로 근미래 배경으로 써보고 싶네요 헤헤헤
아, 읽기전에 중요한 것을 전해드리자면 8화를 쓰면서 조사를 해보다가 몇 단어들은 바꾸게 되었습니다. 아카시가 그리도 싫어했던 도쿄의 경찰 부대는 경시청(도쿄경찰)으로 바꾸었고 최종적으로 경무조는 경보국(미국의 FBI 같은거라고 생각하면 될겁니다?) 소속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경으로 삼은 메이지 시대부터 이미 경시청이 있었더라구요. 그래서 경찰부대라고 하는 것보단 경시청으로 하는게 좋을 거 같았습니다. 이후 다른 편에 있는 명칭들도 하나씩 변경할 겁니다.
그동안 재밌게 봐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 덕분에 끝까지 힘낼 수 있었구요.
이제는 저는 청흑온과 흑좌온 준비를 하겠습니다>< 다음에도 만나요.
그럼 안녕히
쿠로코는 급습한 경시청 경찰에게 경무조의 파수꾼을 노리고 봉기를 일으킨 주범들의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나체인 체로 기절한 아카시를 이불로 감싸 꼭 끌어안고 있었다고 했다. 검은색 제복을 입은 경찰부대원들이 무자비하게 들어오자 처음에는 아카시를 꼭 붙들고 경계했다. 이내 아카시의 직속부하와 얼굴을 아는 비서도 같이 들어오자 그는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도 유카타만 걸쳤을 뿐 거의 나체나 다름이 없었으나 경찰들이 강하게 끌고 가는 바람에 차마 옷을 추스리지는 못했다고.
그로부터 이틀만에 깨어나서야 그 곳에 있었던 부하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아카시는 착찹한 마음에 할 말이 없었다.
면담이 끝나고 병실을 나가는 부하에게 인사도 못한 아카시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전에도 병실에서 깨어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여름 햇살은 따사로운데 자신은 소름돋을 정도로 외로웠다.
범인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현장에서 사살되었지만 한편 사관학교 학생 2명과 경찰 8명도 크게 다치거나 순직되었다. 또한 체포과정에서 쿠로코 포함해 그들의 공범이 된 안내자들이 3명이 있었단 사실이 밝혀지자 정부는 당혹스러웠다. 자세한 건 더 조사 해봐야 겠지만 경무조 안에선 그 안내자들이 협박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짐작했다. 같은 처지인 파수꾼들 입장에선 그 안내자들이 왜 공범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건이 끝나자마자 탐색자가 자신의 안내자와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사실 그는 예비자를 찾아 이곳 저곳에 돌아다는 바람에 바로 소재를 파악할 수 없기에 사건이 일어나기 몇 주 전부터 소식이 없었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했다. 근데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부터도 안내자와 함께 연락이 없자 점점 의심하게 되었다. 나중에 아카시에게 가면을 쓴 어떤 자가 장기를 정확히 찾아서 장침을 꽂았다는 증언에 탐색자가 배신자이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결국 배신자도 생긴 이 사건으로 경무조의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았고, 경무조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경부국도 심기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파수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며, 경무조에는 화족출신 파수꾼들도 있으니 해체되거나 좌천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전보다 입지가 좁아 진 건 사실이다.
사건 이 후 아카시는 병실에서 퇴원되자마자 3개월 정직과 함께 2소대 대장에서 일반 대원으로 좌천되는 징계를 받았다. 징계 사유는 유곽살인사건의 증거를 몰래 외부로 빼돌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안내자가 의심되어 스스로 자수하게끔 유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이를 혼자서 판단하지 말고 경무조에게 알렸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되지 않을 거라는 이유로 아카시에게만 그런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표면적 이유는 이렇고 그 안에 숨은 뜻은 유명한 화족의 출신인 아카시의 힘을 약하게 만들면서 사건 후속 작업에 그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번 사건의 범인들 철저하게 처벌해서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경시청의 의지는 안내자라고 자비가 없었다. 특히 공범이 된 안내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담을 많이 한 쿠로코가 그 대상이었다.
그래서 경시청은 두 사람이 접촉할 수 없도록 아카시에게 쿠로코의 면회도 불허했다. 어처구니 없는 명령에 그가 경시청에 찾아가 파수꾼에게 안내자를 못 만나게 하면 어쩌냐고 항의하니 자신들이 대신 안내자의 체액을 받아서 보내주겠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걸로 부족하면 다시 장기에 침을 맞거나.
경시청에서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앞으로도 쿠로코를 만나는 건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쿠로코가 재판에 나가야 한다면 그를 위해 뒤에서 힘을 실어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다면 징계받은 것도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차피 대장자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언제든지 되 찾을 수 있는 자리고, 정직 상태인 3개월 동안은 시간도 넉넉했다. 어떤 상황이든 아카시의 능력으로 그가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치요는 아카시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체포된 쿠로코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치요 혼자 그 집에 둘 수 없는 노릇이었고 계속 이웃 할머니에게 맡길 수 만은 없었다. 사실 치요 손에 있던 편지에는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딸을 친척에게 양녀로 보내달라고 쿠로코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받아든 아카시는 치요를 쿠로코의 친척에게 보내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소중한 치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쿠로코처럼 빼앗길 수 없었다.
집사가 대신 데리고 온 치요는 처음 보는 서양식 집에 놀라 잔뜩 얼었다. 문 앞에서 마중나온 아카시가 아이에게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긴장되었는지 아카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치요에게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을 인사시켜주고 앞으로 아이가 쓸 방도 알려주었다. 낯선 나무 옷장과 침대가 있는 방을 보던 치요는 선듯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스스로 들어가도록 말없이 기다려주자, 아이가 마른침을 삼키고 아카시에게 물어보았다.
“아빠도 여기에 와요? 언제 오신대요?”
쿠로코와 닮은 푸른 색 눈동자와 마주친 아카시는 입안 바싹 말랐다. 치요에게 쿠로코가 어떤 상황인지 말하는 걸 이미 각오했는데 막상 아이 앞에 서니 심장이 떨렸다.
“천천히 말해줄게. 우선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
여기서 하기엔 길어질 대화라서 아카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치요가 그 대답을 듣자마자 울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아빠를 못 만난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치요는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워 아카시는 무릎을 꿇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자신을 믿지 못한 쿠로코에 대한 원망에 자신도 울고 싶어졌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조만간 마른 가지에 꽃눈이 나올때가 되었건만 쿠로코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없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반란을 일으켰던 범인들은 재판을 치루고 형을 받았다. 그 중에 쿠로코를 꾀어 공범으로 만든 그의 처형이란 사람은 6년전 중현시장인질극사건을 일으킨 죄도 밝혀져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조만간 봄이 오기 전에 치룰 예정이랬다. 그러나 경무조를 배반하고 저자들 편에 붙은 탐색자와 그의 안내자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경무조에게 탐색자의 인적사항을 전달받은 경시청 경찰과 경보국 지방 경찰이 합동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색했지만 그들은 거짓말같이 증발했다. 이것은 경찰의 잘못이 있는게 그들은 다른 파수꾼보다 훨씬 감이 좋은 탐색자를 상대로 너무 단순한 방법을 사용했다. 탐색자가 추적자의 기척을 미리 느끼고 도망가고 있는 건 싱식적으로 뻔한 일이다. 그런 그들을 잡기 위해선 적어도 그나마 감이 좋은 파수꾼 한명이라도 동행해야 했다. 이를 경무조에서 먼저 제안했지만 경찰은 배신자가 나온 경무조를 믿을 수 없다는 명분으로 이상한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행태다. 예비자를 수색을 때와 달리 경찰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무조는 인원이 부족하여 단독으로 수색 할 수 없으니 그저 속만 쓰렸다.
가을에 정직이 끝났던 아카시는 1년 휴직계를 냈다. 안내자를 만나지 못한 채 능력을 써가며 경무조 일을 하는 건 위험했다. 지금도 능력을 최대한 안쓰면서 일주일마다 경무조에서 보내주는 쿠로코의 체액을 마시는 것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거나 자다가 머리가 아파 잠을 깰 때면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그 것보다 10년동안 무조건적으로 잡아주는 손이 없다는 것이 외로웠다.
쿠로코는 이미 1심에서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다. 협박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건 피고인 쿠로코가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카시가 그에 붙여준 변호사는 그 사실을 열심히 피력했지만 피고가 자신의 혐의를 스스로 인정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어이없는 이유로 기각한 것을 보아 아카시 가를 정적으로 두고 있는 외부세력이 개입한 모양인데 압박하기 위해 아카시의 안내자를 이용한 건 웃기지도 않는 처사였다.
변호사를 통해 항소를 제기한 아카시는 2차 공판이 시작하기 전에 직접 항소심재판장과 검사를 만났다. 원심재판장과 달리 항소심재판장은 이미 예전부터 아카시 가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아카시의 요청으로 집에 찾아 온 그에게 아오모리현의 사과 한 상자를 안겨 주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사는 본가에 있는 집사를 대리인으로 보내서 접촉했다. 그에게는 2심에서 패소되더라도 항소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봉투를 쥐어주면서, 그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했다. 이미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는 검사에겐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줄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재판장과 검사를 매수한 아카시는 다음으로 잘 아는 경보국 간부에게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내 쿠로코와 만날 수 있게 요청했다. 보낸지 얼마 안돼서 바로 왔던 간부의 답장에는 만나서 반갑다는 안부인사와 함께 스가모에 있는 감옥에서 쿠로코를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문이 있었다.
아무리 뒤에서 공작을 펼쳐도 2심에서 이기기 위해선 쿠로코가 직접 간절하게 항변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했다. 1심에서의 쿠로코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아카시가 직접 찾아가 적극적으로 무죄임을 호소하라고 설득해야한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아카시가 할 일이었다.
쿠로코의 2차 공판 날짜가 잡혔다. 그리고 2차 공판 열흘 전에 아카시는 홀로 쿠로코의 집에 찾아갔다. 그의 집에 가는 것도, 혼자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그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안내자를 만나 능력 제어를 할 수 없는 아카시에겐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대리인을 보내지 않고 진통제를 먹으면서까지 직접 가는 건 내일이 쿠로코를 면회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내일 하루 밖에 만나지 못하는 쿠로코를 제대로 설득하기 위해 아카시는 그의 집에 찾아가 설득에 필요한 재료를 찾을 생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의 일기이었다.
조금 풍경이 달라진 시장을 지나 도착한 쿠로코의 집은 6개월전과 다르지 않았다. 주인이 돌아오지 못한 집이나 아카시가 사람을 시켜 꾸준히 관리를 했기에 마당에는 추위에 말라 비틀어진 잡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깔끔한 마당을 걸어가 현관문에 도착한 아카시는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바깥보다 추웠다. 전에는 이 집에 들어올때마다 항상 따뜻하다고 느꼈기에 이 한기가 낯설었다. 그는 코트 자락을 여미며 거실로 들어갔다. 조금 쌓여있는 먼지가 아카시의 걸음에 조금 흩날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다시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카시 혼자 있는 집안은 너무 조용했고 어느 인기척도 없어서 이 세상에 혼자만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거실 한 구석에 있는 불당 앞까지 온 아카시는 무릎을 꿇고 불당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아직 향초가 남아있었다. 향초 하나를 꺼낸 아카시는 향로에 꽂아 불을 붙였다. 자자작거리며 붉은 불빛을 내던 향은 이내 연기가 되어 자단향을 퍼트렸다.
그 다음 쿠로코의 아내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패 앞에서 종을 흔들었다. 낭랑한 종소리가 끝나고 합장을 하면서 아카시는 그녀에게 그동안 혼자 두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속으로 기도했다.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는 자단향이 흘려 나오는 불당앞에서 한참동안 앉아있었다.
마루와 연결된 창문으로 나와 뒷마당으로 간 아카시는 깔끔하게 고친 장지문에 걸린 좌물쇠를 열고 쿠로코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집안보다 추운 작업실 안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보다 깔끔해서 이곳에 자신이 감금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자신이 묶여있었던 곳을 잠깐 스쳐보기만하고 곧장 서재로 갔다.
그리고 쿠로코가 항상 일기를 놔두는 곳에 가보니 일기는 원래있던 자리가 아닌 책장 아랫칸에 있었다. 무릎을 굽혀 책을 들려고 했는데 책장밑이 조금 들떠보였다. 손으로 밑을 눌러보니 확실히 이질감이 있었다. 수상한 것을 보면 꼭 확인해야 성미가 풀리는 아카시는 결국 바닥인 나무판을 들어보기로 했다. 차가운 나무판을 잡고 몇 번 위로 당기자 나무판은 먼지를 풀풀 날리며 책장과 분리 되었고 그 밑에는 구멍에 맞게 끼여있는 나무 상자 안에 흰 종이에 싸여있는 책들이 있었다.
표지에 제목없이 한자로 숫자만 적혀있는 책들은 본문을 살펴보지 않아도 쿠로코의 일기가 맞았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쿠로코는 치요가 태어날때부터 약 9년동안 일기를 썼으니 일기가 여러권일게 뻔했다. 그동안 아카시는 매번 한권의 일기밖에 못봤는데 나머지 책들을 이렇게 숨겨놓았을지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숨겨놓은 것을 보니 의외로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쿠로코가 떠올랐다. 그라면 분명 일기를 숨기면서 어린애같이 즐거워 했을 것이다.
아카시는 책장 위에 있던 책까지 포함해서 총 열두권이 되는 책들을 서너권씩 조심스럽게 여러번 쿠로코의 책상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른 책보다 빛바랜 첫번째 일기부터 읽어보았다.
명치○○년 4월 21일
긴 산고 끝에 새벽이 되서야 우리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가 아이를 낳는 동안 나는 밖에서 서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없었다.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고 나서야 비로서 방안에 들어갔고 우리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겨우 피만 닦아낸 우리 아이는 손, 발 다 있었고 건강한 여자아이였다. 산파 할머니는 나에게 안아보라고 아이를 안겨주었다. 아직 눈도 못뜬 아이는 너무 작아서 과연 내가 안아도 되는지 겁이 났다. 그런데 아이를 안아보니 이 아기가 정말 내 아이라고 실감이 났다. 아내의 냄새가 나는 아이는 어쩜 예쁜 내 아내를 그리도 닮았는지 모르겠다.
산파 할머니는 내가 아이를 하도 어색하게 안고 있는걸 보지 못하겠는지 도로 빼앗아 누워있는 아내에게 안겨주었다.
얼굴이 창백했던 아내는 아이를 받고 정말 기쁜 듯이 웃었다. 아이야, 엄마야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목이 막혀서 수고 많았다는 말 밖에 못해주었다. 그래도 아내는 나를 보면서 내가 반했던 그 미소로 웃어주었다.
안정을 찾아야한다며 나는 다시 쫒겨났다. 작업실로 개축중인 창고로 가면서 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아이가 딸이니 이름은 쇼타로가 아닌 치요로 지어야겠다.
명치○○년 5월 23일
어제는 오랜만에 아카시 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왔다. 그동안은 몸조리를 해야하는 아내와 치요때문에 능력제어 하러 가지 못했다. 고맙게도 세이주로 군은 내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아직 17세 밖에 안됬는데 세이주로 군은 어른스럽고 사려가 깊다.
아무튼 어제 나는 세이주로 군의 손을 잡으면서 하루종일 치요 얘기만 했다. 세이주로 군이 치요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잠깐만 말해줄 생각이었는데 하다보니 계속 치요 얘기만 나왔다.
오늘 아침이 되서야 그게 민망해져서 세이주로 군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세이주로 군은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오히려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고 하는 세이주로 군에게 나는 갑자기 치요를 보여주고 싶었다.
마침, 오늘 사관학교로 복귀한다는 말에 나는 세이주로 군에게 치요를 보고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내 말에 세이주로 군은 놀랐지만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세이주로 군을 데리고 우리집에 데려갔다. 아카시 가에서 불려준 인력거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치요를 안고 있던 아내가 세이주로 군을 보고 놀랬다.
그런 아내에게 세이주로 군은 치요만 보고 갈거라고 말해주었지만, 아내는 나에게 세이주로 군이 온다고 왜 말하지 않았냐며 타박했다. 그래도 내 옆에서 어색해하는 세이주로 군에겐 나와 달리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결국 우리집에 들어 온 세이주로 군은 거실에 눕혀놓은 치요를 보고 잔뜩 얼었다. 갓난 아기앞에서 정좌로 앉아 숨도 못쉬는 세이주로 군을 보니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겨우 웃음을 참고 세이주로 군에게 아예 치요를 안겨주었다. 치요를 보고 또다시 놀랐지만 쭈뼛쭈뼛하다 조심스럽게 안았다.
처음보는 사람인데도 치요는 다행이 울지 않았다. 그저 말뚱말뚱하게 세이주로 군을 보고 있었다. 낯가림이 심한 치요가 세이주로 군에게 안겨 울지 않는 것을 보고 나와 아내는 신기해 했다. 왠지 세이주로 군이 잘생겨서 그런것 아닐까 싶다.
세이주로 군과 치요를 보면서 나는 흐뭇했다.
아무리 가족보다 가깝다는 안내자와 파수꾼 사이라도 출신때문에 조금 멀게 느껴지는 그가 오늘은 좀 더 가족으로 한 발자국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말은 못했지만 나의 파수꾼인 세이주로 군이 치요의 대부같은 존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쿠로코의 냄새가 나는 일기에서 자신이 나오자 아카시는 괜히 부끄러웠다. 쿠로코가 자신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했던 건 상상도 못했다. 일기를 읽다보니 그때 일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면서도 그때가 무척 그리웠다. 쿠로코를 만나고 그의 가족을 알게된 지 엇그제 같은데 벌써 11년이 지났고 지금은 떨어져 있다.
계속 읽어내린 일기에는 아내를 사랑하는 이야기, 자라나는 치요이야기, 본가에서 아카시랑 있던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읽어가는 중에 세번째 일기에서 6월 이후로 오랫동안 일기를 안 쓴 기간이 있었다.
명치○○년 10월 14일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그 일이 있고나서 작업도 필사도 거의 못했기에 지금도 붓을 잡는 게 어색하다.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힘들어 하는 나에게 필사할 일거리를 주는 책방 주인분께서 심란한 마음을 일기로 정리하는 게 어떠냐고 일러주었다. 그 분 말대로 일기를 쓰면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것 같다.
엄마를 잃은 치요를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일어서야했다. 아내를 대신해서 얼마나 치요를 잘 키워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거기서 기척처럼 살아 돌아온 치요를 위해서라도 먼저 간 아내가 미련을 가지지 않고 맘편히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내 일거리를 줄여 집안일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사정을 아시는 이웃할머니가 도움을 주셔서 정말 다행이다.
명치○○년 10월 15일
치요가 아직도 아내를 찾는다. 애석하게도 어린 치요는 아직 죽음이 뭔지 실감되지 못하는 것 같다. 평소한 얌전한 치요가 계속 엄마를 찾으면서 우는 것을 볼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고 자꾸 보채는 치요에게 속상했다. 그러면 너무 힘들어 치요를 재우고 나혼자 거실에서 울기도 했다.
그래도 나에겐 세이주로 군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치요때문에 이제는 우리집에서 능력제어 하러 오는데 세이주로 군은 불평없이 내 옆에 있어주었다. 분명 내가 만들어 준 밥이 집에서 먹는 밥보다 맛이 없고, 잠자리가 불편해도 나를 위해 내색하지도 않는다.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세이주로 군의 따뜻한 마음에 나는 아내가 그리워도 외롭지 않았다.
세이주로 군은 치요와 많이 놀아주기도 했다. 나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어서 거실에 앉아 책을 읽어주고 치요가 마당에서 따온 꽃을 가지고 노는 것 뿐이라도 그 덕분에 치요도 많이 안정감을 되찾았다.
파수꾼이라서 힘들어 하는 세이주로 군에게 내가 버팀목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이었다. 나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세이주로 군이 너무 고맙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
이 날 이후의 일기에는 쿠로코가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면서 그가 자신에게 많이 의지 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쿠로코가 자신을 위해 불편함을 아무말없이 참아주는 것 같아 항상 미안했는데, 그에게 힘이 되었다고 하니 안심되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그 자리에 조금 읽다가 집으로 가져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그럴 생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일기에만 집중하고 말았다. 어느새 해도 서쪽으로 지고 있을 정도로 오래있었는데 불구하고 아카시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 일기 마지막 권이 들어왔다.
명치○○년 6월 2일
어제 아카시 군이 집에 찾아왔는데 그동안 힘들었는지 도착하자마자 내 품에 쓰러졌다. 놀란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보니 역시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척 뜨거웠다. 옆에 있던 치요도 놀랐는지 벌써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치요를 안심시키고 이웃할머니에게 갈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정도 상태면 아카시 군도 치요도 제대로 챙겨줄 수 없었다. 치요가 준비하는 사이 나는 아카시 군을 부축여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집에있는 아카시 군의 유카타를 주면서 갈아입을 수 있냐고 물었다. 다행이 아카시 군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치요를 이웃할머니에게 맡겼다.
갔다오니 아카시 군은 유카타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여기저기 벗어둔 아카시 군의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바로 이부자리를 폈다. 열에 들떠 정신없는 아카시 군을 요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도 그의 손을 잡고 그 옆에 누웠다.
처음에는 손만 잡다가 열이 내려가지 않는 거 같아 나는 아카시 군을 끌어 안았다. 서로 맨살을 닿게 하는게 빠르겠지만 그러면 아카시 군이 어색해 할까봐 그러지는 못했다.
한시간이 지나서야 아카시 군의 열이 내려갔다. 호흡도 차분해졌다. 겨우 편안하게 잠드는 아카시 군을 토닥여주었다. 아무리 경무조의 대장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잠든 모습을 보면 여리게 보였던 십년 전의 그 소년이다. 그래서 그가 아플때마다 너무 안쓰러웠다. 내가 좀 더 힘이 되어주면 좋을텐데
명치○○년 6월 31일
처형이 집에 찾아왔다. 그를 노려보는 내 앞에서 이집에서 계속 사는거냐고 묻는 그 사람의 얼굴을 한대 치고 싶었지만 치요가 있어서 애써 참았다.
지난 달 초에 길가에서 우연히 만났을 땐,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고 말했는데도 처형은 내 말은 싸그리 무시한 모양이다.
결국 집에 들어 온 처형은 거실에 있는 아내의 불당에 앉아 향을 올렸다. 아무렇지 않게 향을 올리는 그가 심히 불쾌했으나 아내의 오빠이자 유일한 혈연이라서 하지말라고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아내는 시장에서 인질극을 일으킨 무리들 속에서 자신의 형제를 보고 측은심에 숨겨주다가 대신 변을 당했으니 형제를 위한 아내의 마음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불당 앞에서 기도하는 그를 보니 5년전에 이곳에 와 불당앞에서 엎드려 미안하다고 울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도 이 사람에게 측은심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내에게 인사를 마친 처형에게 나는 그만 나가라고 했다. 처형은 밥이나 같이 먹으면서 그간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회포를 풀자고 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밥이 넘어가지 않을 거 같아 거절했다.
결국 처형은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한 수 물러났다. 그의 말에 나는 대꾸도 안하고 문을 걸어 잠겼다.
아내에겐 하나뿐인 형제뿐이라도 나에겐 그 사람은 아내를 돌아가게 만든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끝으로 그 사람을 보지 않기를 바랐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이 이후에도 쿠로코는 처형을 만난 것 같았다. 그들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내용을 읽을 땐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때 쿠로코가 아카시에게 다 말해주었다면 모든 힘을 쏟아 쿠로코와 치요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대처해줄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게 너무 씁쓸했다.
이젠 마지막 일기까지 왔다. 그런데 어쩐지 날짜가 적혀있지 않았다.
[날짜불명]
이 상황에서 일기를 쓰는게 제정신일까. 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난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거 같다.
시노자키에서 쓰러진 아카시 군을 발견했을때, 그리고 그의 발치에서 피자국을 보았을때 나 또한 그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그가 죽은게 아닌 걸 느낌으로 알지만 그래도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아카시 군마저 잃어버리는 거 아닐까 싶었다.
전에 처형이 자신의 일행을 데리고 와 협박을 했을때 그 말을 들어야 했다. 그 때 그 말을 무시하지 않고 아카시 군에게 말했다면 그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부담을 지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다 내 잘못이다.
3일동안 깨어나지 않는 아카시 군을 보면서 지금이라도 처형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2일째 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아카시 군의 병실로 온 그들을 보고 이젠 늦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아카시 군에게 말하면 그들은 다음엔 반드시 아카시 군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아카시 군의 안전을 약속 받고 그들에게 협력하기로 결심했다. 이것만이 무슨 짓이든 하는 저들에게서 내가 아카시 군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럴 수 밖에 없는 무능한 내가 밉다. 어째서 나의 파수꾼이 아카시 군인걸까. 아니였다면 아카시 군이 그렇게 다치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텐데. 왜 하필 나 같은 게 그의 안내자가 되어서.
나의 가족인 아카시 군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웃을 일이 생기면 같이 웃고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내가 위로가 되어주고 아파하면 그 옆을 지켜주고 싶었다. 아카시 군이 나중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면 내가 주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얻겠지만 그 전까지만이라도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오만이었던 것일까. 아카시 군이라면 나 없이도 살아갈 능력이 있으니까 그가 부디 내가 없다라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
치요야 미안하다. 내가 이런 못난 아빠라서 너에게 잘해주지 못했다. 좋은 부모를 만나서 행복하렴.
그리고 아카시 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마지막 일기를 읽고나니 그저 멍하니 있었다. 아카시는 무의식적으로 책 밑부분에 묻어있는 물방울 자국에 손가락을 댔다. 손끝으로 아카시도 느끼기 힘들정도로 희미하게 시원한 평온함이 전해졌다.
일기에서 느낀 쿠로코의 생각과 감정은 상상 이상으로 절절했고, 그가 얼마나 아카시를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카시에게 행복은 단지 셋이서 마주보고 저녁을 먹는 것이었다.
텅빈 작업실에 홀로 앉아있는 이 순간, 사무치도록 외로웠지만 눈물 날 정도로 가슴 저미지 않았다. 이 감정을 담담히 받아드렸다.
어둡고 진한 노을에 잠길 때쯤 아카시는 자리에 일어났다. 일기장들은 다시 그대로 책장 밑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작업실을 나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그의 책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단향이 나는 빈 책상과 의자에는 쿠로코의 환영이 시선을 아래에 두고 허리를 굽힌 채 일기를 쓰고 있었다.
다음날, 아카시는 아침 일찍 도지마 구에 있는 스가모[각주:1]에 있는 감옥으로 갔다. 네모 반듯하게 지은 무미건조한 건물은 무척 싸늘했다. 굳게 닫혀있는 철장 대문 옆에서 경비를 서는 경시청 경찰에게 경보국 간부가 친필로 작성한 공문을 보여주자,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문을 열어주었다. 아카시는 인사도 없이 잔디하나 없는 마당을 지나 감옥 사무실이 있는 본관으로 들어갔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담배냄새가 가득한 본관 안에는 감옥의 부간수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아카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경무조 소대장이었던 아카시가 부간수장보다 계급이 높았으나, 지금은 일반 대원에 불과했기에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처음뵙겠습니다. 경무조 2소대 소속 파수꾼 아카시 세이주로입니다.”
“그래 반갑군. 자네가 온다는 건 미리 연락 받았네. 자, 안으로 들어오지.”
부간수장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의 미소는 의외로 다정했지만 은근히 아카시를 아랫사람 대하듯이 행동했다. 부간수장을 대신해서 간수가 아카시를 손님실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 손님실로 들어간 그는 면회 준비가 끝나기 전까지 그 안에서 기다려야했다. 나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개의 소파가 있는 손님실은 창문을 통해 햇살이 들어와 바깥에 비해 나름 따뜻했다. 하지만 여기 냄새는 익숙하지 않아 참기 힘들었다. 두통 때문에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들 것만 같았다.
감옥은 아카시에게 생소한 곳이었다. 애초에 이 감옥은 경시청 소속 건물이었고 범인를 찾아와 조사를 하는 것도 경찰들이 와서 할 일이지, 현장 수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경무조가 올 일은 없었다. 쿠로코만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지금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카시가 온 지 한 시간이 훨씬 넘게 지나고 나서야 간수가 찾아왔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간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드디어 아카시를 면회실로 안내했다. 간수 두 명을 따라가 본관의 다른 출구로 나와 감옥 안쪽에 재소자들이 머무는 사동 근처에 있는 접견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갔다. 접견실로 들어가기 전 철창문 앞에 있는 간수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간수들에게 아카시의 신원을 확인했다. 간수부장은 간수에게 받은 신청서와 아카시를 번갈아 보았는데 그 역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확인이 끝나고 간수부장이 열쇠로 철장문을 열어두고나서야 아카시는 겨우 접견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콘크리트로 지은 접견실은 3평정도 되는 작은 방이었다. 싸늘한 기운이 있는 방 가운데에는 방 너비에 딱 맞는 탁자가 있었고, 그 탁자를 가르는 철장벽이 있었다. 맞은편이 보이는 철장너머에 쿠로코가 앉을 빈 의자가 있었다.
같이 들어 온 간수부장이 아카시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의 말따라 의자 앉자 약속 한 듯이 철창 너머에 있는 문이 열렸고, 간수와 함께 수갑을 찬 쿠로코가 들어왔다. 진베처럼 생긴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이발한 쿠로코는 한눈에 봐도 눈에 띠게 창백했다. 그의 몸에 배었던 자단향도 이젠 나지 않아 더욱 더 낯설었다.
그는 의자에 앉으면서까지 시선을 아래에 두고 아카시와 마주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서운할 법도 하지만 아카시는 그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어느정도 예상하고 왔다. 아카시는 철창 틈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간수부장이 다가와 막았다.
“죄수와 접촉하는 건 금지사항입니다.”
“파수꾼과 안내자의 능력 제어 때문이니 선처를 부탁하지.”
고개를 돌려서 눈빛으로 제압한 것도 아닌데 또박또박 내뱉는 목소리만으로도 간수부장은 기가 질려 한 수 물러났다.
반면 두 사람이 자신 앞에서 기싸움을 하지말든 쿠로코는 자신 앞으로 내민 아카시의 손을 잡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푹 숙인 어깨가 처연하게 보이는 쿠로코에게 아카시가 먼저 말을 걸었다. 6개월만에 처음으로 하는 대화라서 긴장된 목소리가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손 잡아줘. 그동안 힘들었어.”
속삭이듯이 지금도 힘들다고 덧붙이자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시선이 드디어 아카시를 향했다. 표정없는 쿠로코의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흔들렸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내리고 수갑을 찬 두 손으로 아카시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시원함 평온함이 지금도 그리워질 정도로 너무 오랜만이었다.
“……안색이 많이 창백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었지.”
아카시의 말이 끝나자 쿠로코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화는 짧았는데 그 뒤에 이어진 침묵은 길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카시와 편지도 주고 받을 수 없어서 궁금한 게 많을텐데 물어 볼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상한데에 고집이 있는 쿠로코다워서 반갑긴 했다. 결국 이번에도 아카시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치요는 내 집에서 지내고 있어. 이제 학교를 다닐 나이이니 올 봄에 집 근처 학교로 입학 시킬 예정이야.”
치요에 대해 말하자 쿠로코의 두 손이 움찔거렸다.
“이젠 키도 많이 커서 조금씩 아이 티가 벗어나는 것 같아. 아마 당신이 보면 그 차이가 더 느껴지겠지. 요즘에는 원피스라는 양복을 선물해주니까 좋아하고 자주 입더라고. 옷 때문인지 몰라도 확실히 기모노를 입었을때랑 많이 달라보여.”
계속 치요 얘기를 하니 그의 손이 자주 움찔거렸다. 괜히 손톱으로 제 손가락을 긁거나, 엄지로 아카시의 손가락을 쓰다듬어주는 등 안달나 보였다. 표정을 살펴보니 어느 새 미간도 찌푸리고 있다.
“치요가 잘 지내는지 보고싶어?”
넌지시 건넨 아카시의 말에 쿠로코는 대답도 못하고 어깨를 더 움츠렸다. 딸에게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달짝이다가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치요를 볼 낯짝이 없습니다. 나같은 아빠 때문에 그간 맘고생이 심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좋은 곳에서 잘 지낸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쿠로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정말 미련이 없어보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카시가 더 괴로웠다. 이 바보같은 사람은 지금도 자신을 위해 손을 잡아주는 중에도 이토록 속마음을 몰라주었다.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쉰 그는 이번에 자신이 쿠로코의 손을 만졌다.
“예전에 능력 제어를 받으러 가다가 문뜩 이런 상상을 했었어. 나중에 시간이 흘려 나와 당신이 나이들면 이 풍경은 어떻게 변할지, 우리들의 사랑을 받은 치요가 얼마나 예쁘게 자랄지를. 다 자란 치요가 멋진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그 자리에 내가 쿠로코 씨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번에는 아카시가 아카시의 이야기를 하자 쿠로코의 숨이 멈추었다. 그와 함께 그의 손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시선을 아래에 둔 채 허리를 굽히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어제 작업실에서 보았던 쿠로코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럴 수 만 있다면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거야.”
아카시의 말을 듣던 쿠로코의 손이 파르르 떨었다. 아카시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고개를 점점 숙이다가 이젠 허리마저 굽혔다. 그래도 손을 놓치 않고 꼭 힘주어 잡았다.
“치요도 매일 아빠를 찾으면서 울고 있어.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말고 우리들에게 돌아와줘. 나와 치요에겐 당신이 필요해.”
툭,툭. 철창 너머에서 탁자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이겠지만 그 물방울 소리에서 어쩐지 자단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뒤이어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6년 전에 울다 잠든 치요를 안고 자장가를 불려준 그때의 목소리로 쿠로코가 아카시의 손을 부여잡고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그는 자신에겐 언제나 매일 기대고 싶을 정도록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무척 나약해 보여서 두팔 벌려 안아주고 싶었으나 두 사람 사이엔 철창이 가로막고 있었다.
두 시간이란 길면 길고 짧으면 많이 짧았던 면회 시간이 끝날 때쯤 아카시는 철장 너머에 있는 쿠로코에게 곱게 접은 편지를 주었다. 눈가가 벌게지도록 울다가 진정된 쿠로코는 자신의 앞으로 내민 편지를 말없이 보다가 이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 편지에는 곧 있을 2차공판에서 쿠로코가 재판장에서 자신을 변호할때 할 말에 대해 적혀 있었다. 가서 이대로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쿠로코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아카시는 쿠로코에게 편지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쿠로코라면 아카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테니까.
열흘 뒤에 찬 바람이 부는 재판장에서 2차 공판이 열렸다.
……그리고 벚꽃비가 내리던 날, 쿠로코가 다시 돌아왔다.
- 지금의 히가시이케부쿠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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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12. 1. 19:41[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7
안녕하세요. 아오입니다.
벌써 12월입니다. 네... 6화를 올릴때보다 많이 훨씬 추워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늦어져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 거의 2달이라니ㅠㅠ 저번에도 늦어서 죄송하다고 했는데 말이죠.. 왜 저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걸까여. 아하하하
아무튼 쿠로코와 아카시의 싸움?도 끝나는 7화입니다. 라고 써도 대단한 건 아닙니다..ㅋㅋㅋㅋㅋ
그래도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7화쓰면서 댓글보고 힘냈어요ㅠㅠㅠㅠ흑흑흑ㅎ긓 그런데 늦었다고 하면 욕을 달게 받겠습니다.
8화는 이미 반쯤 써놨으니 빠르면 내일모레쯤에 올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럼 마지막화까지 기다려주세요><
주의) 이 글은 실제 역사적 사실, 단체와 전혀 다른 픽션임을 밝힙니다.
괴한들에게 들리다시피 끌려가도 아카시는 저항할 수 없었다. 왼쪽 어깨에 장침을 맞은 이후로 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도 맘대로 할 수 없는 마당에 쿠로코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충격에 정신도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건 아카시답지 못했다.
이윽고, 쿠로코의 작업장이자 서재에 도착하자 괴한들은 문을 열고 그 안까지 끌고 갔다. 작업장 안에 있는 가구들은 어느새 한 구석에 옮겨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구가 없는 오른쪽 벽면에 아카시를 놔두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양손을 밧줄로 묶었다. 이로서 아카시는 완전히 그들에게 붙잡힌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자존심이 남아있는 2소대 대장은 치욕감에 없는 힘도 모아 괴한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느낀 괴한 중 한 명이 나가다 말고 아카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 경멸하는 눈빛에 열이 받았는지 험상꿎은 얼굴로 다가와 별안간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무딘 감각으로도 잡힌 머리가 아픈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 개 노릇이나 하면서 편하게 살아 아직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가본데, 그 괴물같은 능력도 다 무용지물이다. 백귀나 다름이 없는 네 녀석들을 지금이라도 처단하고 싶지만 그 능력 때문에 단칼에 안 죽은 줄 알아라. 죽은 놈의 것보다 살아있는 놈의 것이 더 효과가 좋겠지.”
아까부터 이들은 장기를 언급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카시는 파악할 수 없었다. 왜 그들이 그것을 위해 예비자를 죽여야만 했고, 자신의 장기에 장침을 꽂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더 사악하게 웃으면서 머리채를 더 세게 잡았다. 짧게 다듬은 머리가 뜯기는 게 느낄 정도라서 아카시는 얼굴을 찡그리고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때 이 자의 뒤에서 갑자기 쿠로코가 나타났다.
“그만두세요.”
기척도 없이 나타난 쿠로코 때문에 놀랐는지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서둘러 칼을 잡았다. 그 바람에 잡혀있던 아카시는 머리를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관자놀이 쪽으로 부딪힌 머리는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울렸다. 그런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괴한 너머에 있는 쿠로코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험악한 눈으로 아카시의 머리를 잡았던 이 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항상 무표정했던 얼굴에서 적의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로 화난 건 처음보았다.
괴한은 그 눈빛을 한동안 마주보고 있다가 이내 혀를 차고 자리에 일어났다. 나름 위협한다고 잡고 있던 칼을 만지작거리고 했으나 쿠로코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에게 어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마지못해 괴한이 나가자 쿠로코는 어서 작업실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서재로 가는 동안에도 그는 바닥에 누워있는 아카시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와 전혀 다른 행동에 충격을 받은 아카시의 시선은 저절로 쿠로코를 따라갔고, 비로소 작업장안에 자신들 말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작업실 안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감각이 무뎌졌다.
고개를 겨우 돌려서 본 그녀는 아카시처럼 양손이 묶여 있었으나 그와 다르게 안대로 눈이 가려져 있었다. 아카시가 작업실로 끌려와서 일어난 소동에 놀랐는지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쿠로코는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아카시가 누워있는 쪽으로 돌리면 바로 눈을 마주볼 수 있는 위치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마룻바닥을 향했다. 계속, 그는 아카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 쿠로코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몸에 힘이 없어 목소리하나 내기가 버거웠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건냈지만 쿠로코는 고집스럽게 입을 꽉 다물었다. 아카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번 그가 자신을 봐주길 바라며 여러 번 그의 이름을 불렸다.
“말해봐. 협박 당했다면 당했다고 말해. 치요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의지가 아니였다고.”
하지만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에도 쿠로코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말도 없이 오로지 마룻바닥만 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아카시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말이 없어! 쿠로코 당신이 감히 날 배신해!”
갈라진 목소리로 있는 힘껏 외치자, 그 곳에 같이 있는 여인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울기 시작했다. 스스로 몸을 벽에 갖다 박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에 당황한 쿠로코는 서둘러 그녀에게 갔다. 그는 바닥에 구겨져 있는 담요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주고 진정시켜주었다.
생전 처음보는 여인을 달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카시는 더욱 배신감을 느꼈다. 그가 여인의 어깨를 다정하게 쓸어 만져 줄 땐 질투마저 생겼다.
결국 더 이상 볼 수 없어 그는 쿠로코와 여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젠 쿠로코는 자신만의 소중한 안내자가 아닌, 자신을 기만하고 상처를 준 배신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 이상 앞을 보고 있는 것도 버거운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 눈 앞이 어두워지자 금세 정신을 잃어버렸다.
바닥을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작업실은 무척 어두웠고 어디선가 빛나고 있는 등불만이 이곳을 미약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아카시가 쓰러져 있을 동안 해가 떨어진 것 같은데 그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경무조에서 그의 행적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연락이 오지는 않았을까.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이 쪽으로 오고 있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리를 신고 있는 자들은 역시 아카시를 습격한 괴한들이었다. 그들이 마구 들어 온 바람에 먼지가 일어서 그는 기침하고 말았다. 괴한들은 그런 아카시에게 눈길 한 번만 주고 지나쳤다.
무슨 일인가 보기 위해 고개를 위로 들자 그들의 목적은 낯선 여인이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안대를 하고 있는 여인은 그들이 오는 발소리를 듣고 비명을 지르며 오지말라고 빌었다. 그러나 괴한들은 들은 체도 안하고 그녀의 입을 막고 번쩍 들어서 작업장을 나갔다. 입을 막고 있어도 놔달라고 비는 그녀의 목소리는 쉬어버린지 오래 된 듯 했다.
괴한들이 나가고 열린 문으로 쿠로코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접시가 들려있었다. 쿠로코는 문 앞에 있는 아카시 앞에 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아카시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자 그의 접시에 주먹밥 두개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쿠로코는 접시에 있는 주먹밥 하나를 들어 아카시에게 내밀었다.
“얼마 없지만 드세요.”
주먹밥을 입 근처까지 내밀었으나 아카시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쿠로코가 작은 한 숨을 쉬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했잖습니까.”
“거기에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가시를 잔뜩 세운 아카시의 말에 쿠로코는 반발하려고 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주위가 어두워서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쿠로코는 맘대로 하라며 접시를 바닥에 두고 서재가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아카시는 일부러 쿠로코를 보지 않았다. 파수꾼인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쿠로코가 아닌 저 자들이 저 여인을 감금한 이유이었다. 작업실 밖으로 끌고 간 것을 보니 그녀는 단순한 인질은 아닌게 분명했다. 목적이 있다면 아마 파수꾼에 관한 이유일 터였다.
그러자 살해당한 예비자에 대한 보고서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 몇달동안 봤던 여러 문서들 중 어디에도 예비자의 안내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보고서를 볼 때마다 아직 안내자를 발견하지 못한 거라 넘겼는데 지금와서 정황들을 살펴보니 어쩌면 저 여인이 예비자의 안내자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 괴한들에게 안내자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그들이 파수꾼의 특수 장기에서 나오는 독성, 능력을 발현해주는 물질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밖에 없다. 그 독성을 해독 해주는 건 안내자 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고급요정살인사건에서 흔적을 완벽하게 지운 일도, 시노자키에서 끈질기게 아카시를 추격한 일도, 쿠로코의 집에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척을 감춘 일도 설명이 가능했다.
자신들의 장기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도 이용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카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능력을 발현해주는 특수 장기가 되려 파수꾼을 위협하는 무기가 될 줄이야.
아카시가 쿠로코에게 배신 당하고 괴한들에게 붙잡혀 작업실에 끌려 왔을 때 그를 위협하던 사람이 '죽은 놈의 것보다 살아있는 놈의 것이 효과가 더 좋겠지.'라고 말했다. 그들의 사용하는 예비자의 장기에서 나오는 물질은 그렇게 효과 높은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자의 것이니 더운 날씨에 부패가 진행하고 있다면 그건 안내자로도 해독 할 수 없는 시체독만 만들테니.
그래서 괴한들이 파수꾼을 노리는 게 맞다면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 경무조 대원들을 노릴 게 분명했다. 아니면 지바현 인근에 있는 파수꾼사관학교의 학도생들을 노리는 경우의 수도 있다. 차라리 그쪽이 붙잡는데 수월하니 진짜 목적일 터.
비로소 괴한들이 예비자의 장기를 갈취한 이유와 현재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 지까지 깨달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을 알아낸 아카시는 여기에 붙잡혀 있었다. 장기에는 능력과 힘을 쓸 수 없게 장침이 박혀 있고, 손이 단단하게 묶여 있으니 경무조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탈출을 하거나 경무조에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 부디 경무조 파수꾼들이 자신을 잡힌 걸 알아채고 여기까지 수사하러 와주길.
여인의 울음소리가 멀어진 작업장은 무척 조용했다. 창문을 판자로 가려도 있는 미세한 틈 사이로 들어 온 달빛이 나뭇 바닥에 내려 앉은 소리가 들릴 것 같을, 그런 조용함이었다.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조용히 고개를 돌려 쿠로코를 보았다.
그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양손으로 귀를 가리고 무릎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길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그의 얼굴을 가려져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현재 쿠로코는 아카시 앞에서 나약한 감정을 숨기지 못할 만큼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아카시는 몇번이고 정신을 잃었다.
특수 장기에 꽂혀있는 장침 때문에 몸에 힘이 없는 것도 있겠지만, 붙잡혔을 때부터 어떤 음식물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눈 뜨고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것도 있었다.
쿠로코는 힘들어하는 아카시에게 무엇이라도 먹이고 싶어했으나, 아카시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입을 열지 않았다. 물도 안 마시려고 하는 바람에 그는 질린다는 식으로 화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음식이 담긴 그릇을 치우지 않았다.
그렇게 반 쯤 정신을 잃고 있는 아카시의 어깨를 누군가가 약하게 흔들었다. 눈썹을 찡그리면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니 시끄러운 소음들 사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싶어도 계속 부르는 탓에 힘겹게 눈을 뜨자 밤이 되서 어두운 작업실에서 쿠로코가 아카시 눈 앞에 있었다.
“일어나 보세요. 아카시 군.”
오랜만에 들어 본 자신 이름이었다. 겨우 이름 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쿠로코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 온 것 만 같았다. 쿠로코는 눈을 뜬 아카시의 머리를 양 손으로 잡고 엄지로 왼쪽 눈가를 어루만졌다. 서로 바로 보고 있지만 아카시를 본다는 것보다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쿠로코 뒤로 작업장 밖에서 범위가 좁혀졌다, 이동하겠다라는 말들이 들렸다.
“정말, 더이상 변하지 않는 군요.”
아카시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말이냐고 묻자, 그는 대답대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아카시의 머리를 천천히 내려주고 자리에 일어나니 그의 뒤에 치요가 있다는 걸 알았다. 두사람을 보고 놀란 아이는 아무 말 않고 곱게 접은 종이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얼굴로 어깨를 떠는 아이를 보자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자신의 탓 같아서 괜히 미안해졌다.
쿠로코는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작업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는 거야!”
밖으로 나간 쿠로코에게 아카시가 급하게 이름을 불렸지만 그는 그저 미소 지어주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장지문 너머로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들리는 괴한들의 대화, 그들과 함께 나간 쿠로코. 이는 무슨 일이 일어 나려는 조짐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건 예상한 대로 파수꾼들을 사냥하는 일. 분명 쿠로코도 그들과 같이 행동할 것이 뻔했다. 그가 아카시조차 변호해줄 수 없을 정도로 일을 저지르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카시는 움직일 수 없었고 혹이나 치요가 밖으로 나갈 것을 예상해 문도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무력함에 입술을 깨물고 있는 사이 치요가 누워있는 아카시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치요는 많이 놀랐는지 정좌로 앉아 있었으나 허리를 굽힌 채 아카시에게 기대고 있었다. 아카시도 당황스럽고 두려운데 어린 아이라고 어찌 무섭지 않을까.
그런 아이에게 아카시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저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물음에 치요는 모른다며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한 명은 본 적이있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아저씨가 집에 찾아 온 적이 있어요. 저보고 외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아빠가 엄청 화내셨어요. 엄마랑 제가 생명의 은인이었다고 고맙다고 도라야끼도 주셨는데 무서워서 못 받았어요. 엄마의 오빠가 아닌 거 같아요. 눈이 무서워요.”
겁에 질린 치요는 마음 속에 꼭꼭 삼킨 응어리들을 모두 쏟아 내듯이 말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이는 손에 쥐고 있는 종이를 소중하게 가슴에 품었다. 아카시는 그 종이를 보면서 치요에게 말했다.
“치요, 나 지금 여길 나가야 돼. 그러니 내 뒤에 있는 끈을 대신 풀어줘.”
“하지만, 아빠가…….”
“꼭 데려올게.”
덧붙여서 약속한다고하자 치요는 놀라면서 아카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빠의 말을 듣는 것과 아카시를 풀어주는 것사이에서 망설이는지 아이의 하늘빛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허나 이내 치요는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유카타 옷깃에 꽂아두고 아카시의 뒤로 양손을 뻗었다.
치요가 좀 끈을 푸는 데 수월할 수 있게 아카시는 등이 보이도록 상체를 돌렸다. 치요의 작은 손이 차가운 손에 닿은 동시에 묶은 끈을 잡아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치요는 포기하지 않았고 입술을 깨물며 더 힘주었다. 그렇게 여러 번 잡아 당기니 어느 새 매듭이 느슨해졌고, 아카시도 없는 힘이라도 끌어 모아 힘껏 손을 움직이자 결국 끈을 풀 수 있었다. 다행히 괴한들이 아카시가 힘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세게 묶지는 않았던 같았다.
다음은 왼쪽 어깨에 꽂혀 있는 장침을 빼는 일이었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이 장침이 꽂힌 순간부터 아카시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장침을 뽑는다면 다시 예리한 감각도 찾을 수 있을 터.
아카시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 벽에 기대어 앉았다. 힘이 없어 떨리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더듬어보니 뒷목에서 가까운 쪽에 튀어나온 침이 느껴졌다. 허나 손끝이 침에 스치기만해도 왼쪽 어깨가 너무 아파 괴로운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이 장침을 뽑는다면 침 끝이 장기를 해집어 분명 엄청난 고통에 또다시 정신을 잃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뽑고 난 뒤 갑자기 퍼지는 독성 물질을 과연 몸이 버틸 수 있을까. 고통을 느끼니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내쉬었다. 다시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어깨에 올리자 눈 앞에 쿠로코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고통은 지금 참으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사람을 놓친다면 평생 괴로움에 사무쳐 살아 갈 것이다. 그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아카시는 포기하지 않고 손으로 더듬어 꽂힌 침을 찾았다. 다시 손 끝이 침에 닿자 왼쪽 어깨가 찌릿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도 손을 떼지않고 침끝을 잡았다. 손의 떨림이 침을 통해 전해지자 마치 꽂힌 장기가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고통때문에 침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도 점점 힘이 빠져가는 것 같았던 그 때, 치요의 작은 손이 아카시의 손을 잡았다.
“제가 해드릴게요. 아프지 마세요. 아카시 님.”
치요가 울면서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고통에 몸부침치는 걸 보는 게 아이로선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벌써 눈가가 빨개지도록 울고 있는 치요가 작은 손으로 아카시의 어깨를 잡고 그의 손을 천천히 내려주었다.
아카시의 왼쪽 어깨에 꽂혀 있는 침을 발견한 아이는 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아카시를 대신해 침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침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은 놀랄 만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무서운지 침을 뽑지 못하는 아이에게 아카시는 어서 뽑아달라고 말했다.
“눈감고 하면 안 무서울거야.”
힙겹게 꺼낸 아카시의 말에 치요는 조심스럽게 대답하고는 눈을 꽉 감았다. 다시 손에 힘 꽉주고 단숨에 장침을 뽑았다.
침이 완전히 뽑히자 왼쪽 어깨로부터 몸이 타들어 갈 만한 뜨거움이 퍼져갔다. 화살이 허벅지를 스치고 지난 것보다 훨씬 심한 고통에 아카시는 비명을 질렸다. 특히 어깨와 가까운 왼쪽 눈이 터질 것 같이 아파서 두 손으로 감싸야 했다. 그와 동시에 예민한 감각들이 온 몸으로 퍼지는 뜨거움을 따라 차례로 돌아왔다.
귀에서 각자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말소리, 걸음소리, 작업실에 같이 있는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코를 통해 음식냄새와 괴한들의 땀냄새, 정액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피부에서 희미해진 자단향을 머금은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렇게 느껴지는 감각들이 오랜만이라 더욱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때, 송곳으로 찌르는 듯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아카시는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고개를 홱 돌려서 보니 그 인기척은 괴로워하는 아카시를 달래주기 위해 손을 뻗었던 치요였다. 아이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카시의 눈빛이 무서워 황급히 손을 거두고 고개를 떨구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하는 아이에게 되려 미안해진 아카시는 자신도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만, 잠시만 저쪽에 가 있어줘.”
아카시의 말에 치요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그로부터 5분 정도 지나서야 그는 자리에 일어 날 수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니 어두운 작업실 안은 보다 선명하게 보였고,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며 사라진 줄 알았던 자단향을 다시 맡을 수 있었다. 감각이 보다 예리해졌다. 그 감각들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도 불편했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가벼웠고 머릿 속이 깨끗했다.
이제 쿠로코를 찾아 밖으로 나가야했는데 문은 이미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아예 문을 부술 것을 찾던 그의 눈에 자신이 선물해준 쿠로코의 독서대가 보였다. 그는 바로 두 손으로 독서대를 들어 문 앞으로 갔다. 공복때문에 힘이 없어 겨우 머리 위로 든 독서대를 문고리를 향해 내던지자 나무가 부서지는 큰 소리와 함께 문에 구멍이 났다. 밖으로 나간 독서대와 함께 문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도 떨어져 나갔는지 문 밖에 있는 걸쇠가 휘어져 달랑거렸다.
반쯤 부서진 문을 밀고 나가자 쿠로코의 집에서 어느 기척도 느껴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어 둔 채 치요와 구석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치요, 저 사람도 같이 데리고 이리 와.”
그의 말에 치요는 낯선 여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안대를 풀어주고 어린 몸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여인은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다리에 힘이 없었는지 일어나는 걸 버거워했다. 덕분에 그 옆에서 잡아주는 치요도 힘들어 했다. 비록 힘이 없다해도 어린 아이보단 힘이 쎈 아카시가 그녀를 도와주면 더 쉽게 일으킬 수 있겠지만, 감각이 어느 날보다 훨씬 예민한 지금의 아카시에겐 쿠로코가 아닌 그 누구와 살이 닿는 일은 너무나도 힘든 것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쿠로코의 딸, 치요라도 그 작은 손을 잡아줄 수 없었다.
이윽고 무사히 쿠로코의 집에서 나온 아카시는 치요와 낯선 여인을 데리고 이웃 할머니 집으로 갔다. 벌써 해가 진 시간인데도 이웃 할머니는 치요와 아카시를 맞이해주었다. 하지만 치요의 아버지인 쿠로코 대신 눈이 짓무러진 낯선 여인이 보이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경무조 소속 아카시 세이주로 대장입니다. 잠시만 치요와 이 여인을 맡아주실 바랍니다. 사례는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쿠로코는 잘 있는 거죠? 요새 많이 힘들어 보이는 던데.”
쿠로코의 안무를 물어보는 말에 아카시는 대답하지 않고 치요와 여인을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웃 할머니가 치요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동안 아카시가 그녀에게 목례하자, 치요가 그를 향해 애원하며 말했다.
“아카시 님은 아시죠? 우리 아빠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런 치요에게 아카시는 결국 걱정말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느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아팠으나 불안해 하는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위로라곤 이 것이 전부였다.
치요와 여인을 이웃 할머니 집에 맡기고 거리로 나온 아카시는 가게문이 닫혀진 시장거리를 말없이 보았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사람들 말소리, 집안에 돌아다니는 소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온갖 냄새들이 뒤섞인 바람을 맞고있는 가운데, 그는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끄럽고 필요없는 소리들을 머릿 속으로 들어오는 족족 지우자, 제법 먼 곳에서 남서쪽을 향해 뛰어가는 게다소리가 익숙한 박자에 맞춰서 들렸다. 그리고 역겨운 냄새들 사이로 희미한 자단향을 찾았는데 그 자단향 옆에는 흑색화약 냄새가 있었다.
길게 늘어진 자단향 한 줄기를 따라 아카시는 달렸다. 앞으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 가벼웠지만 반면에 피부는 바람에 닿을 때마다 아프다고 아우성쳤다. 특히 왼쪽 눈의 안압이 심해지는지 터질 것 같이 불편했다. 그러나 아카시에게 이런 이상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없었다.
점점 가까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고 있다. 자신의 냄새를 맡은 아카시가 오기 전 서둘러 이 곳을 피해야 했기에 다리 밑에서 폭탄을 설치하는 쿠로코의 손이 바빠졌다.
자신의 파수꾼이 집에서 탈출했음을 알아챈 건 아직 처형의 일당들과 같이 있었을 때부터였다. 게다가 그가 경무조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느껴지자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하는 마음에 파수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처형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니 다행히 아카시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만약 이들이 알게된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아카시를 죽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최대한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그리고 설치하라는 폭탄을 받고 그들과 헤어진 다음에는 서둘러 약속한 장소로 갔다. 아카시가 도착하기 전에 끝내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자신의 파수꾼은 분명 그 예민한 감각을 활용해서 자신을 찾은 것이니 오기 전에 빠져나가면 위험한 이 곳에 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지니 부품을 여러번 털어트리기도 하고 설치하는 방법도 잊어버린 바람에 맘처럼 잘 되지 않았다. 집중하자, 집중하자고 마음을 되새겼다.
드디어 다리 밑에 폭탄 설치를 마치고 소매 안에 성냥을 찾던 중 다리 위에서 쾅하는 큰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타고 온 자전거를 내팽겨 두고 자신을 내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낡은 천을 머리위까지 두르고 있어 어두운 이 곳에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내려다 보는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만으로도 그가 아카시임을 알 수 있었다.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그 눈빛에 쿠로코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카시 군.”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불렸지만 아카시는 대답하지 않고 쿠로코가 있는 다리 밑으로 단숨에 내려왔다. 평소처럼 거만하게 허리를 꼿꼿하세 세운 그의 모습은 작업실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에 비해 멀쩡해 보였으나 생생하게 들리는 거친 숨소리가 걱정스러웠다. 그가 머리를 덮고 있던 천을 벗으면서 쿠로코에게 다가왔다.
“폭탄이라니 당신 답지 않게 거친 방법이야.”
“……눈이 왜 그런겁니까.”
차가운 표정보다 쿠로코는 달빛에 비친 아카시의 왼쪽 눈이 먼저 들어왔다. 그의 왼쪽 눈은 홍채가 노랗게 변한 건 물론이거니와 과연 눈 앞이 보이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눈자위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변하지 않았던 오른쪽 홍채도 노랗게 변하는 중이었다. 겨우 달빛에 의지해서 보는 중에도 아카시의 상태는 심각했다. 처형은 아카시의 장기에 꽂을 장침을 보여주면서 이 것을 꽂으면 독성물질이 더 이상 몸속에 퍼지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그래서 아카시가 몸에 꽂힌 장침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보고있으면서도 스스로 위안했었는데.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뒷덜미에 꽂았던 장침은 뺐어. 표정을 보아하니 그게 어떤 용도였는지 역시 알고 있었군.”
“어째서 빼셨습니까! 얌전히 거기에 있었더라면 너는 안전했다고요! 그걸 위해 내가…….”
“날 가지고 협박했구나.”
쿠로코의 말에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표정이 굳히고 쿠로코를 다시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를 위해 마음 써준 거 정말 고마워. 하지만 그 인간들에게 굴복할 게 아니라 나, 아카시 세이주로가 어떤 사람인지 믿어야 했어.”
자신의 마음도 못 헤아려주면서 차갑게 내뱉는 아카시의 말에 심장이라도 꺼내 보여주면서까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턱밑까지 차오른 억울함을 가라앉히며 참았다. 차라리 이렇게 싸우는 것보다 아카시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야했다. 처형의 일당들이 언제든 올 수도 있었다.
“맞아요. 나는 지금도 너를 못믿습니다. 아카시 군도 겪었잖아요. 파수꾼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저 사람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던 아카시가 다시 다가오려고 하자, 쿠로코는 입을 꽉 다물고 다리 밑에 붙여둔 폭탄의 도화선을 잡았다. 그리고 아카시 눈 앞에 성냥을 보이는 걸로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계속 표정을 굳히고 있던 아카시가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버릴 수 있겠어.”
나즈막하게 들린 아카시의 말이 강바람에 날아가는 동시에, 그가 갑자기 달려와 쿠로코의 허리를 붙잡았다. 놀란 쿠로코가 아카시의 팔을 놓으려고 하는 순간에 아카시는 그를 껴안고 물가로 뛰어 들어갔다. 그 찰나에 눈앞에서 불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화살 끝이 정확하게 폭탄을 맞추고 아카시와 함께 물에 빠지는 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그러다 머리까지 물에 잠기기 직전 폭탄이 강한 빛을 내면서 터졌다.
물 속에 있었음에도 강한 충격파가 느껴졌고 귓속으로 들어오는 물소리와 섞인 굉음에 정신도 없었다. 다리 밑은 얕은 물가라서 등이 금세 물 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갑자기 물에 빠져 정신이 없는 쿠로코는 숨이 금세 차올라 팔다리를 휘저어 바로 물가에 나왔다. 밖은 폭발해서 무너진 다리때문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는 반파되었고 불 붙은 곳은 화려하게 타고 있었다. 땅에 세로로 박혀진 파편들을 보니 저것에 맞지 않은게 천만 다행일 정도였다.
허망하게 주위를 살펴보던 쿠로코는 바로 옆에서 들린 물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마침 아카시도 물 밖으로 나와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빨간 머리카락이 흠뻑 젖은 바람에 축 쳐져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왼쪽 눈이 마음에 걸렸던 쿠로코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그때 갑자기 아카시가 팔에 힘이 풀려 물에 다시 빠졌다. 당황한 쿠로코가 아카시를 부르며 서둘러 일으켜 세워봤지만 왠일인지 아까와 달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서둘러 그를 품에 안아서 상태를 확인하니 빨갛게 충혈된 왼쪽 눈에서 피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미약한 신음을 냈다. 그러면서도 힘없는 손으로 쿠로코의 옷깃을 더듬어 그를 찾았다.
“아카시 군 왜 그러세요?”
다급하게 건넨 말에도 아카시는 대답할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옷깃을 잡던 손으로 왼쪽 눈을 더듬어 찾고는 이내 손가락을 눈꺼풀 안으로 집어 넣어려고 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쿠로코는 서둘러 그의 왼손을 잡아 떼어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됩니다! 정신차리세요.”
“……놔, 너무 아파.”
아무래도 장침으로 막아두었던 독성물질에 한번에 중독되어서 상태가 평소보다 심각해진 것 같았다. 피눈물이 나는 건 둘째치도 이대로두면 고통에 괴로워하는 아카시가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스스로 자해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정도 상태면 손을 잡는 것도, 임시 방편으로 입 맞추는 것도 소용없을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한번도 하지 않았던 그 방법뿐이었다.
우선 아카시를 위해서라도 아무도 없는 장소로, 아니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가야했다. 아카시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록 심해지기 전에 쿠로코는 아카시를 등에 업고 물가를 나왔다. 그리고 주택과 창고가 있는 거리로 가기 위해 서둘러 강둑을 올라갔다. 그러나 물에 흠뻑 젖은 아카시를 등에 업고 올라가는 건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그때마다 쿠로코는 이를 악물고 아카시를 위해 버텨냈다.
기여코 올라온 쿠로코는 숨도 고를 새없이 주위를 빠르게 살펴보았다. 아직 그 사람들이나 경찰 부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확인을 마치자마자 제일 가까이에 있는 주택으로 달려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큰소리를 내면서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리가 부셔지면서 난 굉음때문에 두려워 열어주지 않는 것 같다.
문도 열어주지 않는 이 사람들이 너무 원망스러워 쿠로코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실컷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다른 집으로 갔다. 그러다가 맞은편 골목에 있는 집에서 자신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모자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쿠로코는 바로 그들에게 달려갔다.
“저희는 파수꾼과 안내자입니다.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불안한 눈으로 쿠로코와 아카시를 보았다. 쿠로코가 경무조 사람이라고 말해도 여인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을 등 뒤로 숨겼다. 그래도 다행인 건 대문을 닫지 않았다. 쿠로코는 결국 눈물 한방울을 흘리면서까지 이 모자에게 더욱 더 간절하게 애원했다.
“작은 곡간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이면 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금 제 사람이 위급해요.”
“.......방 빌려 드릴게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여인이 자리를 비켜주며 집안으로 안내하자 쿠로코는 팔에 힘주어 아카시를 고쳐 업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둘 다 물에 흠뻑 젖은 바람에 다다미로 물이 떨어지는 걸 꼐속 미안해하자 여인은 괜찮다고 살짝 웃어주었다. 그 미소에 쿠로코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안내 받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쿠로코를 뒤를 쫓아오던 이 집 아이가 여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기면서 칭얼댔다. 그 방은 아이의 방인 모양이었다. 쿠로코는 살짝 뒤돌아 아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치요 또래로 보이는 남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다시 자기 엄마 품에 안겼다.
방에 들어 간 쿠로코는 천천히 아카시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그 사이에 여인이 이불을 가져와 쿠로코 옆에 가져다주고 대신 문을 닫아주었다. 등불이 없는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쿠로코는 익숙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아카시의 달라 붙은 옷을 벗겼다. 그만 기절해버렸는지 움직이지 않는 아카시 때문에 쿠로코라도 옷을 벗기는 건 힘들었다. 헤지고 더러워진 셔츠와 바지, 속옷을 차례대로 옆에 내려두니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쿠로코는 처음보는 아카시의 나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다음 오른손으로 그의 왼쪽 목덜미를 만지니 그쪽을 중심으로 열이 올라와 뜨거웠다. 쿠로코는 천천히 아카시의 가슴팍을 훑어내려갔다.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는 손바닥에서 아카시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자신의 파수꾼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아카시의 심장을 느끼는 쿠로코의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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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10. 9. 23:20[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6
안녕하세요. 아오입니다.
정말 오랫만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자그만치 두달만에 올리다니ㅠㅠㅠ 늦어도 너무 늦었네요ㅠㅠㅠ 5편에 비하면 그렇게 긴 편도 아니고 제법 일찍 썼는데도 마무리하는 걸 미루는 바람에 이 사태가 벌어졌네요ㅠㅠㅠ
6편 다음으로는 이제 2편만 남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끝맺을 수 있도록 저 자신을 채찍질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댓글도 감사해요ㅠ
6편도 재밌게 봐주세요 ><
다음날,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경무조로 전화가 걸어왔다. 시끄러운 전화종 소리는 경무조의 침묵을 사정없이 깨트렸다. 비서는 촛대처럼 생긴 전화기 앞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지 않고 바로 송화기를 들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 입을 대고 여보세요라고 말하자 마자 귀에 댄 송화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쿠로코 테츠야 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아카시 군이 아직 안 돌아 온 것 맞나요? 오전에 연락을 받기로 했는데 아직 없어서 먼저 연락했습니다.]
아카시의 이름을 듣자 비서는 말을 잃고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에 당황한 쿠로코가 다시 물어보자 비서는 마른 침을 삼키고 사정을 설명했다.
이른 아침에 경무조는 시노자키에 있는 경찰부대 처소로부터 급한 전보를 받았다. 경무조 2소대 대장 실종, 현재 수색중. 그 전보를 받자마자 비서는 마침 경무조로 출근한 1소대 대장에게 알렸다. 대장은 잔뜩 화가 나서 시노자키에 원래 파견한 파수꾼에게 경찰부대와 합류한 즉시 수색에 참여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부터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직 연락을 못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사정을 다 들은 쿠로코는 억누른 신음소리를 냈다. 송화기에서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지만 비서가 해줄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그러나 쿠로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지금 경무조로 갈테니 시노자키에 데려다 주세요. 제가 아카시 군 찾을 수 있으니까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비서는 놀라서 다시 물어보았지만 쿠로코는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 비서는 신호음만 들리는 송화기를 보면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유일한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는 비서는 경무조로 찾아 온 쿠로코를 포드 자동차에 태우고 최대한 빨리 시노자키로 달려갔다. 이제 비는 그쳤지만 하늘을 여전히 우중충했다. 자동차를 타 본 적이 처음이었는지 쿠로코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완전 얼어버렸다. 그런데도 그의 눈은 다른 곳에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있었다.
아라카와 강을 건너 시노자키에 있는 경찰부대 처소에 이를 때 쯤 쿠로코가 비서에게 강이 있는 쪽으로 가자고 보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비서는 그래도 경찰부대에게 자신들이 왔음을 보고하려고 했지만 옆에 앉아 있는 그가 워낙 다급하게 재촉하는 바람에 그를 따르기로 했다. 쿠로코는 점점 동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에도 강 강줄기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히가시시노자키로 가까이 가자 쿠로코는 서둘러 비서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얼떨결에 정지하자 그는 바로 차 문을 열고 강변으로 내려가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비서도 시동을 끄고 쿠로코를 뒤 따라갔으나 그는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양복을 입고 있는 비서는 진흙탕이 된 바닥때문에 빨리 뛸 수 없었으나 쿠로코는 유카타 자락에 진흙이 튀어도 상관 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아카시를 찾는 게 절박한 것겠지. 파수꾼이나 안내자가 아닌 비서는 그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먼저 달려 간 쿠로코는 오른쪽 줄기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서 그는 오른쪽 줄기에 있는 작은 강섬에 연결되어 있는 두개의 다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카시 군!”
쿠로코의 외침에 비서는 놀랐다. 설마하는 마음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히가시시노자키쪽 강변, 다리 아래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검은 정복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빨간 머리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2소대 대장이 맞았다. 쿠로코가 그 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강섬에 이어진 첫번째 다리로 올라 갈 동안 비서는 놀라서 그 자리에 섰다.
비록 아침에 짙은 안개가 껴 있어서 경찰부대원들이 아직까지 찾을 수 없었다고 해도 그런 아카시를 쿠로코가 단번에 찾은 것은 결코 우연으로 치부 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아카시가 경무조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생각이 마치자 확하고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그가.
비서가 따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 동안 쿠로코는 강섬에서 강가까지 이어진 두번째 다리까지 뛰어가 건넜다. 평소엔 뛰어다닐 일이 없어 이미 다리는 후들거리고 숨은 턱 밑까지 올라왔다. 눈 앞이 노래져도 쿠로코는 멈출 수 없었다. 다리를 다 건너고 아카시가 쓰러져 있는 다리 밑으로 가기 위해 가파른 턱을 내려가다가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쿠로코는 아카시 앞으로 오자마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가 맨 처음 한 것은 아카시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그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워 쿠로코는 입김으로 손 끝은 녹였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엎드러 누워있는 아카시의 볼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볼이 쿠로코의 온기로 점차 따뜻해졌다.
죽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눈물이 차오른 걸 막을 수 없었다. 쿠로코는 아카시의 볼을 만지면서 그를 깨웠다. 저 멀리서 쿠로코와 같이 온 비서가 우연히 만난 경찰 부대원과 함께 우르르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그 구둣발 소리들이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아카시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카시 군.”
쿠로코가 다시 부르자 아카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조차 들어올리는 게 힘들었는지 왼쪽 눈은 뜨지 못했다. 게슴츠레 뜬 오른쪽 눈동자를 보니 다행히 아직 노란색으로 변하지 않았다. 멍하니 앞을 보던 아카시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쿠로코를 보았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지만 입술만 달짝이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내가 왔습니다.”
비서와 경찰 부대원들이 다리 밑으로 와 아카시를 부축이고 들것에 옮겼다. 정신이 없던 아카시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다가 다시 눈을 감고 기절했다. 아카시가 경찰 부대에 의해 구출되어 서양식 의원에 이송되기 까지 쿠로코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기억이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지럽게 점멸했다.
처음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땀 냄새가 맡아졌다. 그리고 여러가지 소리도 들렸는데 같이 들리는 이명 때문에 어떤 소리 였는지 구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손 끝이 무척 쓰라렸지만 너무 졸려서 아카시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 후에 눈을 뜨니 이번에는 눈 앞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보였다. 등에 까칠한 면이 느껴지는 걸 보면 병상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의사 한 명이 아카시의 눈을 제 손으로 가리자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아카시는 간간히 짧게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자기를 반복했는데, 깨어 날 때마다 자신의 숨소리와 몸을 감싸는 공기의 온도만 느껴질 뿐이었다. 눈을 떴다 생각해도 보이는 건 하얀 빛 뿐이었고. 또 하나, 자신의 왼손을 놓지 않고 꼭 잡아 준 손이 있었다.
아카시가 완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사건이 일어난 지 3일 후 였다.
누워 있는 채 주위를 살펴보니 서양식 의원이었다. 얇은 커튼을 친 창문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축축한 방안 공기를 느껴보니 그 사이에 장마가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는 멍한 머리를 움직이기 위해 손을 움직여 봤다. 그러나 손 끝이 아렸고 빳빳해 손가락이 움직이기 힘들었다. 뭔가 싶어서 손을 들어 보니 그의 양 손가락 모두 붕대에 감겨 있었다. 붕대는 깨끗했으니 아마 한번 이상은 갈은 것 같았다.
굳게 닫은 나무문 너머로 뒷꿈치를 끄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아카시는 아프지 않은 팔에 힘을 주어 힘겹게 상체를 올리고 침대판에 기대어 앉았다. 잠시 후 뒷꿈치를 끌면서 그의 부하가 들어왔다. 현장에서 그의 비서 역할을 하는 2소대 고참이었다. 그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정신을 차린 아카시를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그동안 죽은 듯이 누워계셔서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 분께서 이제 정신을 차릴 거라 하셨는데 정말이었군요.”
아카시는 누가 그렇게 말했나고 물어보지 않아도 쿠로코일거라 짐작했다. 계속 옆에 있을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몽타주 그리는 화가를 데리고 와라. 용의자들의 얼굴을 목격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근데 하지만 급하게 보고할 게 있습니다. 그것부터 들으시죠.”
그로선 어서 빨리 수배전단부터 발부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명령을 나중으로 미룰 정도로 급하게 보고 할 것이 있다는 부하의 말을 듣기로 했다. 우선 그와 함께 병실 안에 있는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고 몸을 움직이자 왼쪽 허벅지가 아팠다. 활이 스쳐서 생긴 상처가 꽤나 큰 모양이었다. 그래도 부하 앞에서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다리를 움직이고 있을 때 마침 쿠로코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움직이는 아카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다시 누우세요.”
“아니, 이제 괜찮으니까.”
“너보다 네 몸을 잘 아는 건 저입니다.”
단호한 쿠로코의 말에 아카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대에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얌전하게 누운 그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제 나이보다 어려보일 정도로 어색했다.
어쩌다가 그 모습을 옆에서 본 부하는 고분고분하고 온순한 대장이 신기하고 조금 놀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 아카시를 적으로 두면 남은 인생이 가시밭길이 될게 뻔했다.
아카시가 바로 눕자 쿠로코는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부하는 대장의 안내자를 내려다보면서 지난 3일을 떠올랐다. 그는 깨어나지 않는 아카시를 위해 삼일 밤낮동안 집에도 가지 않고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런 쿠로코가 걱정된 그는 자신이 있을테니 잠시라도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괜찮다면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아침이 되서야 아카시의 상태가 많이 호전 된 것을 느낀 쿠로코가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찰 부대원에게 말했고 비로소 잠시나마 눈을 붙이고 돌아 온 것이었다.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피를 나눈 가족보다 따뜻하고 성스럽게 보여서, 같은 파수꾼에겐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어서 빨리 보고해야하는데 문제는 보고 할 내용이 심각하고 안내자인 쿠로코가 듣기에 거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하는 그에게 잠시만 양해를 구했으나 쿠로코는 자신이 절대 들으면 안되는 기밀사항이냐면서 아카시의 손을 놓치 않으려고 했다.
결국 아카시가 이대로 보고해도 된다고 말하고 나서야 부하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영어를 작성해서 영어를 잘 모르는 쿠로코는 한번에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사누키 지방에서 실종된 예비자가 나가라 호수에서 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말을 잊지 못한 부하의 말을 대신해서 마저 보고서를 읽은 아카시는 부검을 끝낸 시신 그림을 보았다. 시신 등에 난 커다란 자상은 마치 돼지를 도살하고 그 안에 있는 내장을 끄집에 낸 것 처럼 보였다. 보고서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특수 장기가 사라짐.
“그 것만 사라졌군.”
“네, 아직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동기는 밝혀진 셈입니다,”
부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아카시는 부하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범인은 파수꾼의 특수 장기를 노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는 혹은 그들은 파수꾼의 특수 장기를 노리고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부하가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인 쿠로코를 위해 말을 최대한 아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대화만으로 깨달은 것 같았다. 특유의 무표정이 변하지 않았어도 아카시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그 힘이 엄청 세서 손이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아카시는 보고서를 다시 부하에게 돌려주고 나중에 얘기하자며 내보냈다.
부하가 병실을 나가고 단 둘이 남자 아카시는 아무 말없이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이젠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에게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걱정말라고 해야하는게 맞을텐데 며칠 전에 아카시도 공격을 받고 하룻밤 동안 실종 된 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다고 쿠로코가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는 아카시를 대신해서 쿠로코가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중얼거렸다.
“너에겐 내가 있으니 걱정마세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일주일 후 퇴원하기까지 그동안 아카시는 병실에 있어도 맘 편히 쉴 수 없었다. 자신이 목격한 용의자들이 몽타주를 만들었고, 예비자가 발견되서 수색업무가 끝난 3소대 대장이 돌아오자마자 그의 병실에서 간부급 긴급회의도 했다. 그래서 그가 깨어나기 까지 곁에 있었던 쿠로코는 의원에 올 수 없었고 따로 경찰부대의 보호를 받았다.
활이 스쳐서 벌어진 살은 이미 붙었지만 걷기 위해 발을 딛으면 찌릿찌릿하게 아파서 당분간 목발 신세였다. 그럼에도 아카시는 목발로 지탱하면서 시노자키에서 사망한 경찰부대원의 유골이 모셔져 있는 신사에게 갔다. 아카시는 살았지만 나무에서 발견한 그는 피살당했다. 그의 죽음이 아카시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를 애도하는 건 스스로의 의무였다.
아카시는 사망한 그의 이름이 적혀있는 위패 앞에서 합장하며 참배했다. 그리고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이번이야 말로 범인들을 잡겠노라고.
아카시를 습격하고, 경찰 부대원이 사망한 사건 이후, 도쿄 안에는 그들의 몽타주가 그려진 수배전단이 나돌았다. 수배전단으로 얼굴이 알려진 자들은 총 여섯명. 이중에 두 명은 부상중이니 의사들이나 약제사들을 중심으로 추적하면 찾은데 수월하다. 게다가 기억력이 좋은 아카시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몽타주의 정확성도 보장되었다. 일주일 안으로 수배전단은 전국으로 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빠져나갈 구멍을 막고 그들이 목을 조이는 것 뿐.
그러나 예비자를 살해해 특수 장기를 훔쳐가고 2소대 대장을 공격했던 그들의 위세는 한 풀 꺾였는지 2주 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시노자키에서 아카시가 도망쳤던 길을 따라 수색도 해보았지만 역시나 이미 다 완벽하게 지워져서 범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파수꾼이나 그들의 안내자를 다시 공격할까 싶어서 그들 주위에 인원이 더 많은 경찰 부대를 붙여서 경호하고, 그들을 미끼로도 사용했지만 범인들은 걸려들지 않았다.
그로인해 불 타올랐던 수사는 다시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남은 건 결정적인 제보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가락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꼭꼭 숨었는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제보만 들어 올 뿐이었다.
막힌 수사의 흐름에 대해 다시 회의한 대장들은 우선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파수꾼들의 예리한 감각을 최대한 활용해 순찰을 강화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아카시의 제안으로 지바현 가까이에 있는 파수꾼 사관학교에도 경호를 세우기로 했다. 현재 첫번째 피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예비자였으니 지금 사관학교에 있는 예비자들 또한 그들의 목표물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려서 열흘 후, 장마가 끝나기 무섭게 오랜 적막을 깨트리고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을 잡기 위해 사건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게 참 우스운 상황이나 그동안 몽타주와 체취나 기타 정보말곤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경무조에겐 수사에 도움이 될 길잡이 역할을 할 증거를 찾을 절호의 기회이었다.
시간은 아직도 열대야가 가시지 않는 저녁 9시 30분경, 사건이 일어난 곳은 화려하게 꾸민 2층 목조 건물인 고급 유곽이고, 사건의 피해자는 내무성 차관이었다. 최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사건이 발생한 지 30분만에 도착한 아카시는 데리고 온 부하와 함께 부검실로 옮겨지는 피해자를 보면서 말없이 생각했다.
눈썹 숱이 남들보다 많았던 이 사람은 5년 전 임관식날에 만난 적이 있었는데 거칠어보이는 생김새에 몸에 남아있는 유녀들의 향냄새와 느낌이 이상한 피냄새로 첫인상에 색을 밝힐거라 짐작했던 기억이 있다.
같이 있었던 유녀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일을 치루고 있던 중에 구토했고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죽어갔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다운 죽음이었을지도.
피해자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 그만두고 아카시는 팔짱을 끼고 사건이 일어난 방안을 살펴 보았다. 흩어진 이부자리와 벗은 옷가지, 피해자가 토한 피섞인 구토물까지 그대로였다. 저번 사건처럼 어떤 흔적도 아예 없을 정도로 깨끗한 상태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에 있는 흔적들은 평범한 것들이라서 사건에 도움이 될 증거는 아니었다.
능력 제어를 오랫동안 안 한 탓에 가득이나 속도 않 좋은데 신내가 가득한 구토물의 냄새 때문에 불쾌했다.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복도 쪽으로 뒷걸음을 치던 중 문 옆에 있던 작은 반상을 보았다. 반상 위에는 술병과 술잔, 잘게 썬 식물의 뿌리를 볶아서 만든 안주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 반상 위에 있는 안주가 담긴 접시를 들자 안주에서 매캐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저기있는 구토물에 섞여있는 냄새들 중 하나였다. 매캐운 냄새가 나는 뿌리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중에 하나가 피안화[각주:1]였다.
아카시는 방 밖에 있는 부하를 불려서 안주를 확인해보라고 했다. 급하게 걸어 온 부하가 아카시처럼 안주 접시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고 생김새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다 확인하자 그는 아카시는 심각한 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피안화의 뿌리가 섞여 있습니다. 게다가 만져볼 때 따가운 걸로 보니 독성도 전혀 빼지 않았네요.”
“어차피 부검에서도 나오겠지만 독살이군. 난 이 안주를 만든 부엌으로 가겠다.”
부하에게 건물 안을 더 살펴보라고 명령한 아카시는 혼자 2층에서 부엌으로 가는 길 중에 가깝고 빠른 건물 뒷길로 나왔다. 잡초가 듬성듬성나고 서늘하고 어두운 길을 따라 부엌 뒷쪽으로 가니 허리가 굽은 노파 한 분이 밖에 나와 계셨다. 깊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진한 이목구비로 봐서 젋었을 땐 미인이었을 그런 여인이었다. 인상만으로 범인이니 아니니 판단하는 건 위험하나 검은 정복을 입은 사내를 불안하게 올려다보는 그 분에게 용의자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선 아카시는 노파가 안내한 식료품 창고에 가보았다. 창고 안에 있는 술단지 여러 개와 안주거리를 만들기 위한 야채들 속에는 피안화 뿌리는 없었다. 그나마 있는 구근채소도 토란이나 우엉이었다.
다시 노파와 함께 부엌으로 돌아오면서 추리해보니 역시 용의자는 유곽의 외부 사람이었다. 내무성 간부를 노린 것을 보아 분명 시노자키에서 아카시를 습격했던 일당으로 가닥이 잡혀졌다. 하지만 피안화 뿌리를 가져온 범인의 윤곽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부디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부엌의 뒷문을 통해 들어오자 흔적을 찾고 있던 부하가 어느새 부엌과 건물 안이 연결 되어있는, 부엌 문에 서 있었다. 그는 심각한 눈으로 문을 보고 있다가 뒷문으로 들어오는 아카시에게 목례했다. 그리고 아카시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여기에 낯선 사람의 체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의 말에 아카시는 재빨리 부하에게 가 문에 묻은 체취를 맡았다. 확실히 노파의 체취가 아님은 확실했고 체취가 묻은 위치도 노파의 키보다 약간 높았다. 용의자일지도 모르는 낯선 이의 체취는 어딘가 익숙했다. 특히 자단향이.
“우선 젊은 남자는 맞는데 담배나 술 냄새가 벤 땀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단향 냄새가 나는 걸로 어쩌면 중이 아닐가 싶네요. 중이 이런 곳에 있었다는 건 역시 이상한 일이겠죠.”
부엌 문 앞에서 맡은 체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 부하는 아카시의 가슴에 오는 위치에서 묻은 체취로 낯선 이의 신장도 추정하고 있었다.
부하는 체취만으로 누군지 알지 못하겠지만 아카시는 체취를 맡자마자 그 곳에 있던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갈 때마다 항상 맡았던 자단향 냄새를 가진 사람은 담배를 피면 손에 밴 담배냄새가 종이에도 밴다고 피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면서 술도 끊었다.
머리 속에서 그 사람이 떠오르자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문 쪽으로부터 뒷걸음쳤다. 그러다 발 밑에 무언가 밟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구둣발 밑에는 바닥에 이리저리 밟혀서 더러워진 끈이 있었다. 면실로 만든 굵은 실은 본래 갈색이었을 것이다. 그 갈색실도 아카시가 많이 보았던 실이었다.
갑자기 숨쉬기 힘들어지고 왼쪽 다리는 다시 쓰라리는 것만 같았다. 비틀거리는 아카시에게 부하가 괜찮냐고 물었다. 그는 부하에게 이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체취가 느껴진 부엌 문을 다시 보자 아카시는 숨이 턱하니 막혔다. 그 곳에는 문지방에 기대고 있는 쿠로코의 잔상이 있었다
다음날, 아카시는 점심을 핑계로 경무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딜 가나고 묻는 비서에게 정확한 행선지는 말하지 않았다.
경무조 관복을 그대로 입은 채 나온 그의 얇은 자켓 주머니엔 어젯 밤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한 증거자료가 있었다. 피해자의 신원, 유녀와 노파의 진술서, 안주에서 나온 피안화 뿌리에 대한 메모, 사건 현장에서 남겨진 용의자의 흔적에 관한 보고서, 그리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몰래 챙겼던 갈색끈.
사실은 이 것을 모아 아침에 보고서를 작성하고 1소대 대장에게 올려야 했으나 아카시는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책상위에 올려진 보고서 용지를 볼때마다 쿠로코의 얼굴을 아른거렸다. 무표정으로 자신을 마주보는 그의 얼굴에 아카시는 숨쉬기 어려웠다. 멍하니 책상에 앉아있었던 그 시간이 참으로 무기력해지고 꿈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앉아있는 것으로 엉킨 끈이 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카시는 증거들을 가지고 지금 쿠로코의 집으로 갔다. 모든 증거들이 그를 향하고 있어도 아카시만은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갈색끈과 자단향 냄새가 같은 것 때문에 쿠로코의 잔상을 본 것 뿐이라고, 이번은 자신이 틀렸다고.
만약에 하나, 정말로, 피해자가 먹을 안주에 피안화 뿌리를 넣은 자가 쿠로코가 맞다면, 그에게 자수하라고 설득 할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그에게 유리하게 변호 하는 것까지 미리 생각해두었다.
축축한 장마가 끝난 여름의 햇빛을 눈부시게 따가웠다. 날씨가 더운 탓에 돌아다시는 사람들이 얼마없는 시장 거리에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수백번이 더 왔던 이 길 끝에는 쿠로코의 집에 있었다. 한 발자국씩 앞으로 갈 수 록 매미소리가 커져갔다.
이윽고 쿠로코 집에 도착하자 매미 소리는 더 크게 났다. 너무 시끄러워서 저절로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마루에 있는 기둥에 매미가 붙어 있었다. 왠지 위화감이 들어서 쿠로코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다. 그냥 여기서 되돌아가 경무조에 모든 것을 알리는 게 맞는 게 아닐까.
그러나 고민은 잠시일 뿐, 아카시는 대문을 열고 쿠로코의 집으로 들어갔다. 지나치게 깨끗한 작은 마당을 가로 질려 장지문을 밀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나타나 인사했던 치요가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현관에도 아이의 작은 신발과 어떤 흔적도 없었다. 반듯하게 혼자 놓여있는 쿠로코의 게다 옆에 자신의 가죽 구두를 벗은 아카시는 자켓을 벗으면서 곧장 거실로 갔다.
열린 거실에는 쿠로코가 정좌로 앉아 있었다. 매미소리가 시끄러운 그 곳에서 쿠로코는 말없이 아카시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표정은 모든 감정을 깔끔하게 지웠다. 그와 별개로 아카시는 깔끔하게 이발하는 쿠로코와 답지 않게 그의 머리가 제법 자랐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서 다시 위화감이 들었다.
아카시는 자신도 또한 말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 그러자 쿠로코가 말을 꺼냈다. 방안에 울리는 매미 소리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왼쪽 눈동자가 조금 노랗게 변하고 있네요.”
“능력 제어 받으러 온 건 아니야.”
“점심은 아직이죠? 같이 먹읍시다.”
일어나기 위해 무릎을 세운 쿠로코 앞에 아카시는 대답 대신 자켓 안주머니에서 어젯밤 사건의 증거자료를 꺼냈다. 증거 앞에 쿠로코는 다시 앉아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어젯밤에 쿠로코씨가 뭐 했는지 말해줘. 그걸 듣고 싶어서 온 거야.”
그러나 아카시의 말에도 쿠로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증거자료를 읽고 있는 그의 얼굴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카시는 더 안달났고 쿠로코의 표정에 더 집중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더 불리할 뿐이야. 어젯밤에 뭘 했는지 들어야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 아직 보고 안 올렸으니까 날 믿어.”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한 쿠로코는 고개를 들자마자 갑자기 아카시의 양팔을 잡았다. 놀란 아카시가 본능적으로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쿠로코는 힘껏 자신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때 왼쪽 팔이 짜릿하게 저리고 등 뒤에 소름 돋았다.
“지금입니다!”
쿠로코의 신호와 동시에 마루에서 난 창문을 열고 괴한 두사람이 들어와 아카시를 덥쳤다. 그리고 집안 다른 곳에서 숨어 있었던 다른 이들도 진검을 들고 들어와 칼 끝을 아카시에게 겨누었다.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카시는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시끄러운 매미소리 때문에? 집안이 지나치게 깨끗해서? 파수꾼인 아카시가 못 느낄 정도로 괴한들이 완벽하게 기척을 숨긴 것도 있지만, 그보다 쿠로코가 자신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부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꼼짝없이 잡히고 포위 당하고 있는 처치라도 아카시는 끝까지 저항했다. 힘껏 발버둥 치면서도 그는 계속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쿠로코를 올려다 보면서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만 쿠로코는 대답하지 않았고, 자신의 옆으로 앉은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온나멘[각주:2]을 걸친 사람이 천천히 거실로 들어왔다. 가면이 작아 아래턱은 보이지만 아카시라도 그것만으로 정체를 알아 볼 순 없었다.
“장기는 어디에 있는가.”
“왼쪽 어깨에 있을 겁니다.”
낯선 남자 입에서 장기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카시는 파수꾼만의 장기가 적출 된 채 발견된 예비자가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그토록 찾았던 범인들이 어째서 쿠로코를 알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적 충격에 온 몸이 굳어가고 있을 때 쿠로코 옆에 있던 남자가 아카시가 입고 있는 하얀 셔츠깃을 잡아 뒤로 당겼다. 어찌나 세게 잡아 당겼는지 단추가 뜯어지고 옷도 찢어졌다.
아카시의 왼쪽 어깨가 드러나자 어느새 바짝 다가 온 온나멘을 걸친 사람이 장침을 꺼내들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장침을 본 아카시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쿠로코를 보았다. 쿠로코도 아카시를 보고 있어서 서로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쿠로코!”
하지만 쿠로코는 대답하지 않은채 지난 10년동안 쌓았던 신뢰를 무참히 깨트렸다. 그에 따라 느끼는 배신감은 아카시를 더 절망으로 몰아갔다. 쿠로코를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아카시의 어깨로 온나멘을 걸친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 살갗을 훑는 손가락에 놀란 그는 어깨를 흔들면서 저항했다. 그러자 그를 붙잡고 있는 괴한 중 하나가 아예 아카시 위로 올라타 내리 눌렸고, 쿠로코의 옆에 있던 남자가 아카시의 머리를 잡아다가 바닥에 내리쳤다. 다다미이었도 세게 부딪친 바람에 머리가 울려 정신을 잃을 뻔 했다. 그때 여전히 아카시의 팔을 잡고 있는 쿠로코가 그의 팔을 더 세게 잡는게 느껴졌다.
더 이상 저항 할 수 없는 사이 온나멘을 걸친 사람은 드러난 아카시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훑다가 뒷목에서 가까운 곳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곳에 들고 있던 장침을 단번에 꽂았다.
어깨근육을 찌른 장침은 생각보다 훨씬 아파서 맞자마자 짧은 비명을 질렸다. 왼쪽 어깨부터 왼쪽 손 끝까지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와 별개로 서서히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갑자기 이런 적이 없었던 그는 당황했다. 머릿속에서는 발버둥치라고 말하는 데 그 의사가 몸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를 감싸고 있는 예리한 감각들도 점점 몸 밖으로 빠져 나갔다.
이윽고 자신을 내리찍고 있던 괴한들이 힘을 풀고 붙잡고만 있어도 아카시는 그들의 손을 떨쳐내지 못했다. 일어나려고 가까스로 무릎을 움직였지만 그 뿐이었다. 무기력함에 좌절하자 그는 무심코 시선을 올려 쿠로코를 보았다, 쿠로코의 눈은 그의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보이는 그의 입은 무언가를 말하는 듯이 움직이고 았었지만 이젠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카시에겐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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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8. 19. 00:04[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5
안녕하세요. 아오입니다.
정말 많이 늦어버렷습니다ㅠㅠㅠㅠ 5화 추격씬이 정말 잘 안 써더라구요ㅠㅠㅠ
다음부턴 시대물하지 않겠습니다ㅠㅠ 땅거미가 끝나면 맘대로 써도 되는(???) SF를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서문은 여기까지 하고 바로 5화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재밌게 봐주세요!
- 문제의 방에서 식사를 한 손님들은 두 명으로 둘 다 서양식 정장을 입고 있었음.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고 함
- 성격은 친절하고 유쾌하다고 했으나 충분히 연기일 가능성이 있음
- 용의자들은 방명록에 긴다이치 하지메, 에도가와 코난이라고 작성했으나 가명일 수 있음
- 그들에게 사향 냄새가 나지 않았고, 사향 냄새는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나기 시작함
- 공범을 발견한 종업원은 무서워서 다시 1층에 내려갔으므로 2층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음
- 2층에 있던 손님들 중에 간부의 비명소리에 놀라서 방에서 나왔던 사람들이 있으나 범인을 목격하지 못함
- 그 손님들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식사를 마치고 요정을 나갔음. 그래서 식기를 치우러 간 종업원이 올라가던 중에 간부의 비명소라와 함께 지붕에 있는 공범을 발견하게 된 것
수사 책임자인 아카시가 이틀 전에 일어난 고급 요정 살인사건에 대해 보고하자 1소대 대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문제의 방에 있었던 손님들의 몽타주 두 장을 내려보고 있었다. 요정의 종업원들의 진술대로 그려진 그 얼굴들은 제법 남자다웠다. 하지만 특이하지 않고 평범한 외모였다. 그림을 보다가 심경이 복잡했는지 그는 다시 한 번 깊게 한 숨을 쉬었다. 40대 중년인 대장은 하루만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아카시가 덧 붙이지 않아도 노련한 이 사람은 이 사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사건들보다 훨씬 복잡한 사건이었다. 용의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요정을 나갔다고 하니 우선 그들은 살인혐의에선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가 화살을 쏘고 나갔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곳에 있었다던 손님들이 공범이 목록에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한 두명이 원한 관계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동시에 암살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조직이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추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에는 파수꾼이 포함 되어 있음이 분명했고, 저절로 약 두달 전에 일어난 파수꾼 예비자 실종 사건을 맞물렸다. 따라서 유추 할 수 있는 경우는 2가지.
첫 번째, 파수꾼 예비자가 외부에 있는 반동 세력과 접촉해서 스스로 그 쪽으로 들어가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두 번째, 경무조 안에 첩자가 있다. 만약 두번째 경우대로 경무조 안에 첩자가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경무조 사상 최대 위기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뿌리 뽑아야 하지만 과연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범인을 찾아 잡아 넣는 게 쉬울까.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였다.
사건 당시 내무부 경보국 간부는 자신의 서류 가방에 현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수감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명단에는 수감자의 신상명세와 함께 어떤 수감자가 어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지, 그들의 가석방 심사 여부가 명시되어 있다고 했다. 범인이 반란세력들 중 하나라면 교도소에 잡혀있는 자신들의 동료를 속히 석방시키려고 사건을 저지른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범죄 동기에 대해 아카시는 다른 의견을 냈다.
“경고 일겁니다. 만약 수감된 범죄자들을 석방시킬 목적이면 차라리 인질극이나 그를 협박하는 게 더 수월했겠죠. 하지만 살인을 저질렸다는 건 저들에게도 파수꾼이 있거나 혹은 경무조에 첩자가 있다 알리고 싶었고, 예비자 실종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경무조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저지른 겁니다.”
아카시의 말에 1소대 대장은 어느정도 납득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의문점이 풀리지 않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건 그의 앞에서 아무 표정없이 서 있는 아카시도 마찬가지이었다. 첩자가 있다면 왜 그 사실을 스스로 알리고 있는 걸까.
1소대 대장은 아카시에게 이제 그만 나가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만간 이에 대해 정부에서 공문이 내려올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카시는 그의 명령대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오늘이나 내일 미리 능력제어를 받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능력제어는 단순한 핑계였다. 이 복잡한 머릿속을 쿠로코 옆에서 비우고 싶었다.
바쁜 와중에도 능력 제어를 명목으로 쿠로코의 집에 오자 왠일인지 자신을 반기는 치요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 어디에도 없는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니 여름 독감에 걸려서 의원이 근처에 있는 친척집에 며칠 맡겼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카시는 쿠로코가 재혼하라는 친적들의 말을 듣기 싫어해서 웬만한 일로 그들에게 손을 빌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치요가 심하게 아프면 일도 마다하고 자신이 직접 간호했던 그가 아이를 친척에게 맡겼다니.
아카시가 이상하게 생각하든 쿠로코는 혼자 부엌으로 돌아가 저녁을 만들었다. 예전 같지 않는 쿠로코의 뒷모습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까 치요 얘기할때도 그는 그 외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물어본다고 해도 역시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안내자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날이 밝고 현장으로 돌아 가야하는 다음 날이 되었다.
이른 아침에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은 바로 아침을 먹었다. 복귀해야하는 저녁까지 시간이 많이 남자 아카시는 혼자서 장기를 하고 있었고, 쿠로코는 평소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치요가 조용한 아이이긴 해도 없으니 집안이 무척 조용했다. 집안에 들리는 거라곤 집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다 뿐이었다. 아카시는 원래 쿠로코의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조용함을 좋아했으나 오늘은 너무 조용한게 내심 불안했다.
지금 손에서 전해지는 시원한 평온함은 부쩍 더워진 날씨를 신경쓰지 않게 해주었다. 그리고 집안이 저번에 능력제어를 받으러 왔을 때와 다르게 낯선 사람의 흔적도 느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맞다. 지나치게 깨끗했다. 며칠 전에 있었을 치요나 지금 옆에 있는 쿠로코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아카시는 쿠로코 몰래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은연중에 쿠로코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는지 그가 아카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그의 눈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한 아카시는 결국 별일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카시 군이 요새 바쁘고 능력제어하러 자주 오지 않아서 많이 피곤한 거 같습니다. 요새 잠은 잘 자고 있어요?”
“걱정마. 나 나름대로 제어하면서 일하고 있어.”
“피곤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한 숨 정도 자면 되니까요.”
쿠로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요즘 많이 피곤해서 괜히 이상하게 느끼는 걸 수 도 있었다. 안 그래도 그제 일어 난 사건이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기도 했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집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익숙하지 않는 이 분위기를 외면하기 위해 상(象)을 왼쪽 대각선 앞으로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쿠로코가 아카시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다시 돌리니 쿠로코는 눈이 마주치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입술을 조금씩 달짝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하지만 쿠로코는 아카시처럼 자신도 아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던 사람이 이러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나설 필요없다 생각하고 다시 장기판을 보았다. 안 그래도 경무조 일 때문에 답답한데 여기서도 답답하게 행동하는 쿠로코가 오늘은 귀찮아졌다.
사건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자 정부는 경무조를 더욱 압박했다. 정부 안에서도 입지가 강한 귀족 가문의 출신인 경무조 대장들 앞에서도 그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그 이유로 경무조는 정부에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욱 바쁘게 밖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런다고 사건이 하루빨리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의미없었다.
새벽까지 다녀 온 외근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개인 사무실에서 선잠을 잤던 아카시는 아침이 되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서의 책상으로 갔다. 간이 침대에서 일어날 때부터 온몸이 돌덩이 같이 무거웠다. 피곤한 것도 피곤한 것지만 그동안 능력 제어를 제대로 받지 못해 며칠동안 속도 메스꺼웠다. 그러나 비서의 책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전화기가 있어서 직접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출근하지 않는 비서를 대신해서 촛대처럼 생긴 전화기의 송화기를 든 아카시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수화기에 입을 댔다. 연결된 교환원에게 쿠로코의 집주소를 말하자 다시 신호음을 들렸다. 잠시 후 집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아카시 군이신가요?]
아침이라 조금 잠긴 그의 목소리에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긴장했던 몸이 편안하게 이완되었다.
“능력제어를 받으러 오늘 오후에 갈게. 이번에도 자고 가야할 것 같아.”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곳에 가도 되겠습니까. 바로는 못가고 점심시간엔 갈 수 있어요.]
생각도 못한 그의 의견에 피곤함이 사라질 정도로 놀랐다.
기여코 점심시간 전에 쿠로코가 도시락을 들고 경무조를 찾아왔고, 아카시는 그의 앞에서 안절부절했다. 정신이 없어서 치요를 어떻게 하고 왔나고 물어 볼 겨를도 없었다.
아침에 전화를 끝내고 아카시는 1소대 대장에게 바로 허락을 구했다. 대장도 아카시처럼 어젯밤에 퇴근도 못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했고 또 예민해서 사무실에 들어 온 아카시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아카시는 말하면서 대장이 이 황당한 제안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카시 혼자 현장에 이탈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는지 그는 웃는 얼굴로 쿠로코가 현장에 오는 걸 허락했다. 깊게 주름진 대장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아카시는 거북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째든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고 있다해도 아카시에게도, 경무조 사람들에게도 안내자가 자신의 파수꾼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는 일은 처음이었다. 능력제어가 대체로 성관계이다보니 파수꾼들에게 안내자는 뒤로 숨기는 정부와 같아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잘 소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히 경무조 사람들은 아카시와 쿠로코가 다른 파수꾼들과 달리 성관계를 맺지 않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괜히 부끄러웠다.
그런 사연인데 경찰 부대원들이 있는 현장까지 따라와서 손을 잡고 있다니. 경찰 부대원들은 파수꾼들보다 더 민망해서 애써 아카시와 쿠로코를 보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파수꾼과 안내자이고 뭐고 남자 둘이 꼴사납게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일 뿐이었다.
오늘도 파수꾼과 경찰부대가 한 조를 이루어서 도쿄 시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순찰 업무야 원래 경찰 부대의 업무이나 용의자에 파수꾼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정부가 경무조 파수꾼에게도 순찰 업무를 맡겨버렸다.
파수꾼들이 속해 있는 순찰조들은 규조[각주:1]와 부촌이 있는 고지마치[각주:2]를 순찰하고 다녔다. 용의자들이 이런 곳에 숨어 있을리가 없을텐데 대낮에 이곳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이 일이 순찰을 가장한 경호이기 때문이었다.
아카시는 쿠로코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경무조가 정부와 귀족의 뒷치다꺼리나 해주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매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일반 사람들에겐 존경받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근데 지금 이 모습은 과연 보여주기 떳떳한 모습일까.
경찰 부대원들과 조를 이루어 순찰을 도는 동시에, 능력제어를 하고 있는 아카시는 옆에 같이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쿠로코의 눈치를 보았다. 다른 쪽 보고 있는 안내자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역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 되도록 순찰은 계속되었다.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비워둔 시간에 겨우 쉴 수 있었다. 별 성과없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그래도 아카시는 경무조이니 어느정도 익숙하지만 하루종일 옆에서 손을 잡고 같이 돌아다닌 쿠로코는 많이 힘들어 했다. 내색하지 않아도 잦아진 한숨과 맞잡은 손에서 나는 땀으로 알 수 있었다.
각자 저녁을 먹기 위해 경찰부대와 헤어진 아카시는 쿠로코와 함께 식당이 있는 골목으로 갔다. 무엇을 먹을지 물어보려고 쿠로코는 봤는데,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아카시 왼쪽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아카시가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손을 들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시계는 4시 50분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여기서 쿠로코의 집으로 가면 딱 저녁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쿠로코 씨, 이제 집에 가도 돼.”
“하지만, 아직 제어가 다 되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시간이 없어서 잠만 자고 갔잖아요.”
“이정도면 며칠은 버틸만해. 그리고 치요가 걱정되지?”
쿠로코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카시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카시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먼저 잡은 손을 놔주었다. 다시 한 번 가라고 말하자 잠시 망설인 쿠로코는 아카시와 눈을 마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가면 이번에는 아카시 군을 걱정하겠죠. 잠시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갑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쿠로코는 아카시의 손을 잡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는 점점 사람들이 없을만한 곳을 향해 더 깊이 들어갔다. 이윽고 쓰지 않는지 문이 열어있는 작은 창고를 찾자 그 곳으로 들어갔다. 텅빈 창고는 아무도 없었고 바닥엔 짚풀이 깔려 있었다. 그나마 작은 창문이 있어서 어둡지 않았다.
창고에 들어 오자 쿠로코는 아카시를 벽에 붙여 세웠고 그 앞에 섰다. 그는 점점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에 따라 아카시는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더러우니 서서해도 괜찮겠죠.”
“하는 거야?”
“아무래도 이쪽이 빠르니까. 역시 불편하십니까?”
그런 말을 듣자 왠지 자신만 입맞춤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민망했다. 쿠로코처럼 아무렇지 않게 단순히 능력제어라고 받아드리면 되는 일인데.
아카시는 쿠로코처럼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위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으로 아카시의 양볼을 잡았다. 그다음에는 망설이지 않고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입술의 도톰한 살이 닿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쿠로코가 바로 혀를 내밀어 아카시의 입 속으로 들어왔다. 아카시는 저절로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혀가 닿는다. 타액에 미끄러진 쿠로코의 혀끝은 아카시의 입 안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어깨를 잡고 있는 쿠로코의 손에 맞닿은 입술과 매끈한 혀, 뜨거운 그의 숨이 아카시에게 아주 가깝게 닿을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손끝이 간질간질한 설렘과 함께 입술로 느끼는 시원한 평온함에 몸이 안심되어 편안했다. 편안함에서 오는 원초적인 기쁨이 몸 속에서 차올랐다.
하지만 쿠로코의 입맞춤이 평소보다 더 거칠었다.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점차 계속하면 할 수록 움직임이 빨라지고 강하게 눌렸다. 부드러웠던 느낌들은 점점 아찔하게 변했다. 처음 느낀 자극에 아카시는 당황해 쿠로코를 밀어버렸다. 입술이 떨어지자 거친 숨이 나왔다.
그순간 쿠로코가 얼굴도 보여 볼 틈없이 아카시를 두 팔로 끌어 안았다. 이렇게 안긴 적이 없어서 당황했다. 쿠로코의 숨이 목덜미에 닿은 느낌은 낮설었다.
쿠로코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적막함이 창고에 가득했다. 이 상황에서 아카시는 왠지 자신도 쿠로코를 마주 안아야할 것 같아서 두 팔을 쿠로코의 허리에 둘렀다. 그의 등에 깍지를 끼니 한결 편안해졌다. 온몸으로 느끼는 쿠로코의 체온과 그만의 냄새가 시원한 평온함으로 다가왔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과 다르게 포근했다.
손을 잡지 않고 창고를 나가기까지 두 사람은 노을이 질 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쿠로코가 경무조에 두번째 찾아오자 불편한 분위기는 없었다. 아카시 덕분에 다른 파수꾼들도 자신의 안내자를 경무조로 데려오는 일이 더러 생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걸 옆에서 보고있는 일반 경찰부대원들은 여전히 거북해했다.
점심 때가 오자 하늘에는 덕지덕지 먹구름이 꼈다. 슬슬 장마철이 올 때라서 며칠동안 흐린 날이 계속 됬는데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았다. 아마 늦은 저녁때에 올 지도.
순찰을 돌고 난 뒤, 경찰 부대원들과 따로 쿠로코와 점심을 먹었던 아카시는 식당에 나오면서 그에게 집에 가도 된다고 말했다.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요.”
“이 정도면 괜찮다는 거 알잖아. 그리고 오후에는 시노자키[각주:3]쪽으로 가게 될 거야. 거기서 동쪽으로 더 갈지도 모르고.”
“그럼, 같이 가겠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야지. 치요를 계속 다른 집에 맡길 수 없잖아.”
“하지만 사태가 심각하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전보를 보내서 말하면 치요도 이해해…….”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말을 끊고 한 물음에 쿠로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막히자 시선을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손을 잡고있는 쿠로코의 손에 힘이 들어가 그의 손톰이 손바닥을 찌르고 있었다. 도통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던 쿠로코의 무표정에서 불안감이 비치자 아카시는 한 숨을 쉬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냥 순찰 업무일 뿐이야. 전에 같이 해봤을때 이상한 일 있었어?”
물음에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식당가를 빠져나오고 광장 앞에 있는 경무조 건물에 이르자 아카시는 방향을 바꿔 쿠로코를 데리고 노면전차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정류장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사람들은 손을 잡고 있는 두사람이 정류장에 오자 흘겨보거나 자리를 조금씩 피했다. 하지만 아카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는 노면전차를 기다렸다.
“언제 쯤이면 돌아오십니까?.”
계속 말이 없던 쿠로코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말을 들은 아카시는 대답하기 위해 곰곰히 생각했다.
그가 에도가와에 가는 이유는 거기에서 고급요정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는 두 사람 중 한명을 보았다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경무조 1소대 대원이 경찰부대와 함께 수색하고 있었으나 그 대원이 오늘 능력제어를 해야해서 손이 나는 아카시가 대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는 이틀날 아침까지 무조건 시노자키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잠깐 사람이 비어서 대신해서 가는거니까. 내일 오전 중에는 경무조에 돌아 올 수 있어.”
그의 말에 쿠로코가 대답하기 전에 노면전차가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노면전차를 타는 틈에 쿠로코의 손을 놓아주고 그를 출입문 쪽으로 밀었다. 당황한 쿠로코가 뒤돌아 기다려 달라고 했으나 아카시는 어서 그를 전차에 태워버렸다. 뒤이어 탄 사람들 때문에 내리기 힘들었다.
“돌아 오면 전화할게. 그럼 됐지?”
사람을 다 태운 노면전차는 천천히 바퀴를 움직이면서 앞으로 미끌어지듯이 가고있었다. 쿠로코는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점점 멀어지는 아카시에게 기다리겠다고 소리쳤다. 그를 위해 손을 흔들어주자 속도를 얻은 노면전차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저녁 무렵의 시노자키는 조용했다. 게다가 하늘은 바늘로 툭하고 찌르기만해도 금방 비가 쏟아 질 것 같아서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용의자가 목격된 곳이라도 들었으나 막상 와보니 분위기가 가라 앉아 있었다. 제보를 듣고 일주일 넘게 수색했지만 성과가 없었던 탓인 모양이었다. 아카시가 시노자키에 도착했을때도 별 이상한 느낌 같은 걸 느끼지도 못했으니 용의자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내뺐거나 잘못된 제보 이었을 터.
이런 분위기에서 그가 할 일은 특별히 없었다. 고지마치에서 했던 것처럼 하룻밤만 대신 순찰을 돌 뿐이었다.
가게들이 일찌감치 닫은 바람에 썰렁한 거리를 아카시는 혼자 걷고 있었다. 평소엔 경찰부대원 함께 무리로 다녔지만 인원이 없는 이 곳에선 단독으로 다녀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면서 경찰부대에서 그에게 단검과 나무로 만든 노끈에 달린 호각을 주었다.
다른 지역을 순찰하러 간 경찰 부대원을 만나기로 한 삼거리에 도착하자 하늘 위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서둘러 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비때문에 주위가 어두워졌는데 그늘 밑은 제법 어두웠다.
그는 정복에 묻은 빗방울을 손으로 털어내며 비가 세차게 내리는 거리를 보았다. 어느새 길바닥에는 웅덩이가 생겼지만 저 멀리서도 만나기로 한 경찰부대원이 보이지 않았다. 비를 피하기 위해 이쪽으로 뛰어 올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가게나 집안에서 사람들이 저녁먹는 소리마저 지우는 세찬 소나기 소리밖에 없었다.
에도 강이 있는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워 소름이 돋았다. 아카시는 두 팔로 몸을 끌어안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이고 나무 뒤로 돌아가자 그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놀라서 뒤로 물러가자 어떤 사람이 나무에 기대 앉아있었다. 검은색 정복 바지를 입은 사람은 아카시가 여기서 만날 약속을 한 그 경찰 부대원이었다.
아카시의 발에 차였는데도 그는 힘없이 목을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섬뜩했다. 그의 상태를 보기 위해 한 팔을 뻗어 다가갔는데, 그 때 뒷덜미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추워서 느끼는 소름하곤 달랐다.
아카시는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느껴지 않았던 인기척이 숨은 모습을 드러내고 점점 그들이 있는 나무로 조금씩 다가왔다. 아직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분명 사각 안에서 숨어 있으리라. 상대가 누군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음은 지나가는 개도 알 수 있다. 이대로 있는 건 위험했다.
아카시는 풀 밭만 있는 오른쪽 길로 천천히 뒷걸음쳤다. 사람들이 있는 상가와 주택가는 반대쪽 길이었으나 이미 그 길가에는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 발씩 아카시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설령 포위 당하고 있다해도 침착하면 된다. 거리는 무척 어둡고 빗소리는 거세다. 이건 파수꾼인 아카시가 더 유리했다.
맞은편 가게 사이 작은 골목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나오자마자 아카시는 뒤돌아 오른쪽 길로 뛰어갔다. 그도 아카시를 노리는 일당 중 한 사람이었는지 길가에 나타난 두 명이 바로 쫓아왔다. 다른 일행들도 나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은 네 명. 거리를 계속 늘리면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
다행히 아카시가 가는 방향은 경찰부대 처소와 멀지 않았다. 그는 점점 어두워지는 갈림길 앞에서 처소가 있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얼마 안가 왼쪽 길에 있던 나무 위에서 발소리가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나무에서 어떤 사람이 아카시 앞에서 쿵하고 내려왔다. 역시 검은 복면을 쓴 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발도해서 칼을 아카시에게 휘둘렀다.
그가 내려오기 전에 인기척을 느끼고 뒤로 피해서 목을 향해 휘둘린 칼 끝을 피할 수 있었으나, 목을 팔로 막아서 어쩔 수 없이 베이고 말았다. 상처에서 뜨거운 피가 흘려나왔다. 아카시가 상처를 움켜쥐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발소리를 내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아카시의 귀에선 뒤에 쫒아오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흥분해서 심장이 마구 뛰고 있다. 살의가 가득한 사람을 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잡힌다면 분명…….
순간, 아카시 눈에 앞에 있는 사람이 흐릿한 잔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잔상은 천천히 칼을 들어 아까와 다르게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칼끝은 앞으로 나와 있는 왼쪽 무릎과 허벅지를 스친다. 피묻은 칼끝이 눈높이까지 올라 올 때 잔상은 사라졌다. 이런 잔상은 본 적이 없어서 아카시는 너무 놀라 숨을 멎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은 쏜살 같이 칼을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미 잔상으로 움직임을 파악했던 아카시는 칼끝이 스칠 왼쪽 다리를 뒤로 당겨 피했다. 칼끝이 가슴팍에 올라올 때 쯤 그는 바로 칼을 들고 있는 그 사람의 오른쪽 팔뚝, 빈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복면도 벗겼다.
그 사람은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팔을 잡힌 상태에서 칼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먼저 아카시가 정복 안쪽에 있던 단검을 꺼내 그의 어깨에 찔려 넣었다. 쇄골과 견갑골 사이에 찔린 그는 칼을 놓치고 어깨를 부여 잡았다. 비 소리 사이로 비명이 울려펴졌다. 그러자 아카시를 쫓아 오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그 사이에 아카시는 주저없이 그 사람의 어깨를 찌른 단검을 다시 뺐고 바로 앞으로 달려갔다. 이 참에 거리를 벌리고 서둘러 처소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시는 입술을 깨물고 있는 힘껏 달렸다.
습격한 일당들은 다섯 명이 아니었다. 아카시가 경찰부대 처소에 가까워 질때 쯤 뒤에서 새 울음같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처소 근처에서 숨어있던 또 다른 일당들이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채 그를 가로 막았다. 모습을 드러 낸 사람만 해도 세 명, 어디서 숨어 있어서 거친 숨소리를 내는 두 명으로 일당들은 총 열 명이었다. 이정도면 일개 강도단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들은 아카시를 노리고 습격한 것이다. 처소를 코 앞에 두고 상황이 나쁘게 흘려갔다.
만에 하나 앞에 가로 막고 있는 그들을 돌파하고 처소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으나 경찰부대라고 인원이 많은 것이 아니라서 경찰부대원들까지 위험해 질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승산이 없었다. 결국 아카시는 옆으로 뛰어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주택가 사이 골목길로 들어갔다.
뒤에서 그 일당들이 쫓아와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다른 골목에서도 그들의 일행으로 추정되는 인기척이 추격에 가담했다. 두려움과 불쾌함이 점점 목을 조르고 있었다. 능력제어를 받은 지 하루도 안되서 왼쪽 눈이 답답하게 저리기 시작해 왼쪽 눈을 감았다. 기세가 누그러지 않는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고 있어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현재, 아카시는 나루터 나무판자 아래에 몸을 숨겼다. 밑에는 대부분 강물이라서 앉아있는 아카시의 하체는 이미 잠겨 있었다. 강은 점점 물살이 빨라지고 수위도 올라왔다.
여기에 오기까지 옆에서 달려든 일당 중 하나에게 치명타를 입혀서 몸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벌려두었다. 하지만 아카시가 그들 눈 앞에 사라지고 최대한 인기척을 없애도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아카시가 가는 방향을 정확히 알고 그를 점점 강쪽으로 몰았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그들을 주시하던 중 불현듯 고급 요정에서 일어 난 사건이 뇌리에 스쳐갔다. 그 사건의 용의자와 저들은 같은 일행이다. 그렇다면 아카시를 노린 이유도 저번 사건이랑 동일하다. 과연 그 파수꾼은 경무조를 공격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나루터 밑 바닥에 몸을 숨기고 있을 동안 그 일당들이 드디어 강변에 나왔다. 그리고 잠시 멈추고 있다가 아카시가 숨어 있는 나루터로 점점 다가왔다. 기척이 느껴지자 아카시는 서둘러 도망치다가 주운 나무 지팡이 위에 단검을 묶는 걸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호각에 달린 노끈으로 묶었다가 그걸로도 부족해서 정복 자켓의 찢어진 소매를 더 찢어서 헝겁이 된 소매로 한 번 더 묶었다.
만약 그들과 싸워야 한다면 단검으로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 도망치는 길에 적당한 지팡이를 들고 왔다. 또한 검술은 저들보다 못할지라도 어릴때부터 배웠던 창술은 자신있었다.
아카시는 단검이 지팡이에 잘 고정 되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때마침 일당들이 바짝 다가왔다.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나무 판자를 밟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왼쪽으로 들어 오는 사람의 잔상이 보였다. 아카시는 바로 칼끝을 세우고 잔상을 향해 찔렸다. 그 때문에 왼쪽에 있던 실제 본인은 갑자기 나타난 단검에 놀라서 뒤로 자빠졌고, 아카시가 나올 수 있는 틈이 생겼다.
몸을 굴러서 나루터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을 공격하는 여럿 잔상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임시로 만든 창을 꽉쥔 아카시가 사라진 잔상대로 움직이는 칼들을 다 쳐내자 일당들은 놀란 듯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아까보다 더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들과 대치하면서 포위되지 않도록 계속 자리 바꾸면 움직였다. 하지만 그럴 수록 그는 강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시 발목이 강물에 잠겼다.
아카시가 아무리 잔상으로 움직임을 먼저 볼 수 있다한들 저 일당들을 모두 처리하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나 대치상태는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아카시가 그들에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하는 결말 뿐이다. 해결방법은 결국 어떻게든 그들에게 도망쳐 살아남는 것 밖에 없었다. 아까 자신을 가로 막었던 두 사람은 복면을 벗겨서 얼굴을 확인했었고,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 중 몇 명도 거센 비때문에 복면이 흘려내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살아서 사건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각오를 다 잡은 아카시는 먼저 왼쪽에 있는 사람을 공격했다. 잔상이 보여준대로 두 사람이 휘두르는 칼을 피하고 강에 가까이 있는 사람의 복부를 찔렸다. 그 즉시 그는 창을 버리고 강으로 뛰어갔다. 칼을 든 다른 사람들이 아카시를 쫓아왔으나 이미 허리까지 들어온 그는 불어난 강물의 거센 물살에 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카시가 불어난 강에 빠질 생각을 했던 건 그가 있는 쪽 앞이 강줄기가 두개로 나누어지는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나루터에 도착하자마자 이를 확인했던 그는 강에 뛰어 들어 가게 되는 상황이 오면 두 물줄기 가운데 있는 땅으로 건너갈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최대한 그쪽에서 직선 거리인 자리가 어디인지 파악해두었다.
물살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세서 최대한 옆으로 헤엄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 때문에 파도같이 치는 물결이 얼굴을 계속 덮치고 있어서 숨 쉬는 것 또한 힘들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처럼 두 물줄기의 가운데 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카시는 마지막까지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비록 물살 때문에 오른쪽 물줄기로 조금 넘어가 버렸지만 그래도 반대편에 땅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강가 근처라고 해도 물이 불어나고 밑바닥도 깊었다. 겨우 가까이 가서야 발이 강바닥에 닿았고 다리에 힘을 주어 물살을 버티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화살이 날아와 강에서 빠져나오는 아카시의 허벅지에 스치고 지나갔다. 살갗이 찢어져 많은 피가 강물에 휘말려 떠내려갔다. 쓰라린 상처를 막고 뒤를 돌아보니 아카시가 건너 온 강가에서 복면을 쓴 누군가가 긴 활을 들고 아카시를 겨누고 있었다. 저 자다. 저 자가 분명 그 파수꾼이다.
드디어 용의자를 발견했지만 강렬한 통증에 그는 그만 다리에 힘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물살이 이때라고 아카시의 몸을 게걸스럽게 잡아 먹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있어도 통증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카시는 더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팔을 바닥에 뻗어서 바위라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손에 잡히는 건 자갈 뿐.
마지막 희망이라는 생각으로 상체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앞으로 보았다. 가까운 곳에 작은 강섬과 이어진 다리의 기둥이 보였다. 그는 더이상 떠내려가지 않도록 통나무 기둥을 붙잡기 위해 오른쪽 다리로 강 밑 바닥을 밀어 기둥 앞으로 갔다. 거센 물살 때문에 그의 몸이 기둥을 들이받았다.
부딪친 오른쪽 어깨와 등이 엄청 아파서 숨도 못 쉴 정도였다. 그 바람에 귀는 멍멍해서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신음이 보다 크게 들렸다. 다행히 그가 부딪친 기둥은 강가에서 가까웠다.
팔, 다리, 등, 온 몸이 아팠다. 체력도 정말 바닥나서 눈만 감으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여기서 주저 않고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몸을 숙여서 물살을 버티며 강가를 향해 한걸음씩 걸어갔다. 피가 흘려나오는 허벅지까지 빠져 나왔을 땐 바닥에 손을 대고 기어갔다.
아카시는 여기 오기 전에 쿠로코와 약속했다. 내일 아침에 경무조로 돌아가 전화해주기로, 지금도 비를 보면서 걱정하고 있을 그에게 목소리를 들어주기로 했는데.
온 몸이 물에서 빠져나오고 땅에 박힌 나무 기둥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는 그 옆에 쓰러졌다. 물에 흠뻑 젖은 몸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멀리서 이곳으로 달려오는 발소리들이 들렸지만 아카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다리까지 건너서 아카시 위까지 도달했다.
'……그도 무시할…….'
빗소리 때문인지, 오락가락하는 정신때문인지 그들이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잠 때문에 신경쓰기도 힘들어서 아카시는 모든 걸 놓고 눈을 감았다. 점점 예리한 감각들이 그에게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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