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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쿠농/장편 2014. 7. 15. 11:55[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4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드디어 지루하게 꽁냥거렸던 쿠로코와 아카시에게도 스릴쇼크서스펜스(?)할만한 사건이 일어나는 화입니다. 네, 확실히 질질 끌었죠..ㅋㅋㅋㅋ 아무튼 다음 5화에는 추격씬이 있을 예정인데 메이지 시대의 도쿄 지형이 제가 생각한거랑 달라서 다시 생각하는 게 죽을 맛입니다.
아하하 두번 다시 메이지시대로 쓰지 않을거야 아하하
그럼 4화도 재밌게 봐주세요.
능력제어를 받는 날에 오전 근무만 하고 쿠로코의 집에 오니 무슨 일인지 집주인이 없었다. 퇴근하기 한 시간 전에 쿠로코에게 전화를 했을 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전부터 그가 집을 비웠다는 건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아카시는 적잖이 당황했다.
며칠 전에 민화집 제본을 부탁하러 방문 했을 때 오늘 능력제어를 받을 거라고 미리 말해두었으니 쿠로코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평소보다 일찍 왔으니 마침 그가 잠시 집을 비울 때 온 아카시 탓도 있다.
집에는 치요도 없는 것 같았다. 집열쇠가 없는 아카시는 제법 뜨거워진 햇빛을 피할 겸, 천막이 세워진 근처 당고집의 평상에 앉아 쿠로코를 기다리기로 했다.
꿀이 발라진 당고와 시원한 말차를 같이 시켰지만 서서히 속이 울렁거려서 말차만 조금씩 마시고 그늘 아래에서 대문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시장 골목에서 달려온 쿠로코가 대문에 도착한 것이 보였다. 계속 뛰어 왔는지 그는 대문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그가 왜 뛰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카시는 반가운 쿠로코에게 가려고 반 쯤 일어셨으나 그 때 쿠로코가 아카시가 있는 당고집을 향해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뛰어오는 그를 보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쿠로코는 오자마자 앉아있는 그의 왼 손을 잡았다. 쿠로코의 손은 땀에 젖어있었다. 그럼에도 그 손에서 온기가 전해지면서 시원한 평온함이 밀려오는 게 기분 좋아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주 본 쿠로코에게서 미세한 향 태우는 냄새가 났다.
“아카시 군, 평소보다 일찍 오셨네요. 많이 기다렸죠? 미안합니다.”
“아니, 일찍 온 내탓이지. 근데 왜 이렇게 뛰어 온 거야,”.
“아까부터 왠지 네가 우리집에 와 있을 거 같아서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대한 볼일을 다 보고 뛰어 왔는데 역시나였네요.”
그렇게 말하고 옆자리에 앉은 쿠로코는 헝클어진 유카타 옷 자락을 한 손으로 다듬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아카시는 제법 감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먼 곳에서 나는 소리나 냄새가 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어차피 그저 우연이었을 것이다.
아카시가 쿠로코에게 먹지 않았던 당고를 건네 주자 그는 접시를 한 손으로 받아서 옆에 두었다. 쓰기 불편한 왼손으로 당고 한 알아 베어 문 쿠로코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그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종이를 갖다 주는 분이 오늘은 오기 힘들다고 저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새로 만드는 종이도 살펴보고 난 뒤에는 마침 향도 떨어져서 신사 근처에도 갔다왔고요.”
어쩐지 아까 만나자마자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 끝에서 자단향 냄새가 난다 싶었다. 아카시는 괜히 은근슬쩍 엄지로 쿠로코의 손끝을 만져보면서 말했다.
“어째든 쿠로코 씨가 이렇게 오래 외출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저도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너무 집에 만 있었나봐요.”
말하면서도 당고 하나를 다먹은 쿠로코가 나머지 하나는 손을 마주 잡고 있는 아카시에게 건네주었다. 그에게 받은 당고를 베어 무니 바깥에 계속 있어서 곁이 조금 말랐으나 꿀이 발라진 곳은 촉촉해서 맛있었다. 천천히 당고를 다 먹자 쿠로코는 이웃 할머니 댁에 맡겨 둔 치요를 같이 데리려 가자고 아카시를 이끌었다.
“그분에게 자주 맡겨?”
“예전부터 아는 분이기도 하고, 그 집 손녀가 치요랑 친구라서 같이 예뻐해주세요. 혼자 사는 저에겐 정말 고마우신 분이죠.”
쿠로코가 칭찬한 이웃 할머니 댁은 그들이 있었던 당고 집에서 왼쪽으로 두번째 집이라서 정말 쿠로코의 집에서도 가까웠다. 쿠로코의 집보다 더 작은 집 마당에는 친구와 같이 놀고 있는 치요가 있었다.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그 집을 둘러보면서 아카시도 치요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 아카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집 안에서 쿠로코의 손을 잡고 능력제어를 하고 있었다. 능력제어를 할 동안에는 한 손을 못쓰니 쿠로코도 그 때만큼은 작업장에 가지 않고 같이 집안에 있었다. 집안에서 두 사람이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침을 먹고나면 책을 보거나 신문을 보면서 간단하게 수다를 떨고, 치요와 놀아주는 것밖에 없었다. 능력제어라고 해도 거의 빈둥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번에도 평소처럼 저녁까지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오기 전 쿠로코의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기 위해 쿠로코가 자리에 일어나는 바람에 신문을 보고 있던 아카시도 같이 일어났다.
전화를 받은 쿠로코는 바로 아카시에게 수화기를 건네 주었다.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불안해보였다.
“경무조입니다.”
경무조 쪽에서 쿠로코의 집으로 전화했다는 건 능력제어를 하고 있는 아카시를 호출할 정도로 급한 일이 생겼다는 걸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 제어할때 연락하는 걸 제일 싫어하는 아카시가 엄청 화낼 게 뻔했으니까.
그에게 전화를 건네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경무조 건물에 있을 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던 정치범의 소재를 찾았으니 수색에 합류하라며 경무조장이 호출했다고 말했다. 1소대 대장이자 경무조의 우두머리인 그의 호출은 같은 소대장인 아카시이라도 무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정치범은 자신도 붙잡고 싶었던 용의자였다.
부하의 말을 다 들은 아카시는 잠시 침묵하다가 알겠다고 대답한 다음 뒷말은 듣지도 않은 채 바로 전화를 끊었다.
“쿠로코 씨, 어쩔 수 없이 그만 가봐야할 거 같아.”
아카시가 그렇게 말하자 쿠로코는 알겠다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던 치요를 마당이 보이는 마루으로 데려갔다. 마루에서 쿠로코가 소근거리는 말을 들은 치요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곳에 앉았다. 아이를 그 곳에 두고 온 그는 마당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을 꼭꼭 닫았다. 창문은 얇은 장지로 마감을 해서 치요가 거실을 볼 수 없었다.
어두워진 거실에서 아카시와 쿠로코는 마른 침을 삼키고 거실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직 능력제어는 다 되지 않았다. 제어가 다 되기 전까지는 아직 아카시의 몸에 독소가 남아 있어서 이대로 현장에 가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었다. 결국 짧은 시간안에 능력 제어를 마쳐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손 잡는 걸로는 무리였다.
쿠로코가 옆에 있는 아카시의 손을 잡고 괜찮나고 물었다. 아카시는 쿠로코를 향해 고개를 돌려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목을 길게 빼고 서서히 다가왔다. 서로의 코가 맞닿을 쯤 아카시는 머리를 옆으로 살짝 꺾고 눈을 감았다. 서로의 호흡이 단 한번 오가는 사이 쿠로코의 얇은 입술이 입술에 닿았다.
오랜만에 맞대 본 붉은 피부는 매끈하고 부드러워서 그 틈 안으로 빨려 들어 갈 것만 같았다.
결국 카가와 현에서 발견한 예비자가 실종된 지 한 달이 지나자 전 경무조에게 비상명령이 내려졌다. 이미 찾기에는 한참 늦어져 버렸지만 단 한 명이라도 경무조에겐 소중한 인재라서 실낱의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카가와 현은 오사카 지부와 교토 지부가 가까워 두 지부를 중심으로 실종자를 수색하기로 했으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도쿄 지부에서도 파수꾼들을 파견해기로 했다.
사라진 파수꾼을 찾은 건 보통 파수꾼들보단 특수 장기에서 나오는 독성을 느낄 수 있는 탐색자 파수꾼가 나서는 게 훨씬 빠르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탐색자는 전국 경무조를 통틀어 단 한 명 밖에 없었고 게다가 그 사람은 다른 파수꾼 예비자를 찾으러 북쪽에 있었다.
정부의 명령에 따라 도쿄 지부 3소대 전원과 2소대 소속 파수꾼 한 명이 지방으로 파견을 나가자 업무는 눈샐 수 없이 바빠졌다. 6명이나 되는 인원이 자리를 비운다고 평소에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줄어드는 건 아니었으니 빈자리를 메꿔야하는 건 남은 사람들 몫이었다.
덕분에 아카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갔던 쿠로코의 집에 못가고 있었다. 그나마 대장이란 위치가 있어 능력제어를 위해 하루를 뺄 수 있지만 그 반동으로 제어를 하는 주기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주기를 늦춰서 15일만에 능력 제어를 받으러 쿠로코의 집에 갔던 날은 도착하자마자 쿠로코의 품에서 쓰러졌다. 마치 심한 몸살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아침부터 많이 힘들었어도 쓰려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자신을 안고 있는 쿠로코보다 본인이 더 놀랐다. 아무래도 이젠 쉴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탈진한 걸 지도 몰랐다.
쿠로코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그는 우선 아카시를 부축여서 자신의 침실에 앉혔다. 그리고 옷장에서 아카시의 유카타를 그에게 주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옷 갈아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아카시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카시에게 쿠로코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다시 거실로 나갔다. 급하게 나갈 채비를 한 뒤 치요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아마 아카시를 위해 아이를 이웃 할머니에게 맡길 생각인 것 같았다.
자단향냄새가 가득한 집안에 홀로 앉아있는 아카시는 쿠로코가 무릎에 올려 준 유카타를 보고있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보았다. 낮이 길어진 만큼 어느 새 노을도 길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홍색 노을에 빛나고 있던 침실은 무척 어두웠다. 그리고 푹신한 요 위에 두터운 이불을 덥고 있었다. 쿠로코가 돌아오기 직전에 유카타로 갈아입고 쓰러진 뒤 기억이 없었는데, 쓰러진 아카시를 그가 보살펴 준 모양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아카시는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그러다 왼손에서 시원함이 느껴져 옆을 보니 쿠로코가 그의 손을 잡고 누워있었다. 그믐달인 밤이라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잔잔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카시는 무심코 그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고 그냥 미안한 듯 웃었다. 어지러운 머리가 진정이 되도록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살며시 눈을 감고 있으니 쿠로코 집 안에서 낯선 사람의 체취와 흔적이 느껴졌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아니고 아마 어제나 며칠 전에 방문한 사람의 흔적이라서 약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불편했다. 그동안 그의 집에 방문자가 아예 없었던 아니지만 이번 방문자는 익숙하면서도 기분이 나쁜 흔적을 남겼다. 괜히 마음이 불안해진 아카시는 쿠로코의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잠시 잊었던 시원한 평온함이 피부를 통해 들어왔다.
이렇게 옆에 쿠로코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
후덥지근한 낮과 달리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직은 시원한 밤에, 고급 요정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내무성 경보국[각주:1] 간부의 비서로 사실 간부인 귀족과 같이 있던 비서가 휘말려 피해를 입었다는 게 사건의 경위이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있을 때 쯤 갑자기 화살 여러개가 동시에 장지문을 뚫고 날아왔다고 간부가 진술했다. 범인을 본 건 요정의 종업원들이었고 그들은 그 사람을 지붕 위에서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범인은 사건이 일어난 즉 후 바로 요정을 빠져나가서 현재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경찰부대는 경무조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두 시간 뒤 먼저 출동한 2소대의 신입을 뒤이어 아카시가 현장에 도착했다.
사향 냄새를 풍기는 고급 요정은 口자 형태의 2층 목조 건물로 건물들이 빙 둘러진 가운데에는 지붕 없는 정원이 있었다. 간부과 비서가 있는 방은 2층이었으니 범인을 목격한 종업원들 말대로 지붕에서 화살을 쏴서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사건 현장을 살펴 본 아카시는 사건이 일어난 방 앞에 있는 복도 나무 난간에 기대어 지붕을 올려다 보면서, 지붕에서 화살을 쏘지 않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지붕에서 아무리 몸을 낮추어도 복도 위를 가리는 처마 때문에 이 방을 맞출 수 있는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화살이 뚫고 지나간 장지문에 있는 구멍은 길게 찢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위에서 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아카시 눈 앞에서 잔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범인들이 종업원이 2층에 없는 틈 타 장지문을 열고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여러명이 동시에. 하지만 증거가 완벽하지 않아 앞에서 화살을 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안개처럼 흐려져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아카시는 혀를 찼다.
잔상이 끝나고 있을 때쯤 지붕에 갔다 온 2소대 신입이 사향 냄새를 뭍힌 채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대장인 아카시에게 다가왔다.
“범인을 보았던 지붕에 가보니 어떠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고 사향 냄새가 지독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아주 콧구멍이 저절로 막히…, 아니 냄새로 추적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요즘에도 닌자가 있나.”
아카시의 말에 신입은 웃어야할 지 말아야 할 지 결정하지 못해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가 그러고 있든지 말든지 아카시는 손을 들어 바로 앞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반대편에 있는 복도였고, 거기에는 장지문을 닫은 또 다른 방이 있었다.
“종업원들이 지붕에서 범인을 봤다고 했지 그가 화살을 쐈다는 걸 보지 않았고, 장지문의 종이가 뚫린 흔적을 보면 위가 아닌 바로 정면에서 화살이 쏜 걸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붕에 있는 사람은 미끼일 뿐이고 진범들은 따로 있다는 거지. 경찰 부대가 저 곳은 확인해 보았나.”
물어보자 반대편 방문을 말없이 보고 있던 신입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카시는 대답을 들은 즉시 바로 복도를 걸어가 순식간에 문제의 방 앞에 도착했다. 허둥지둥 쫓아 온 신입이 경찰부대를 불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일일히 대답하기 귀찮은 아카시는 말없이 장지문을 옆으로 열었다.
열자마자 안에서 사향 냄새가 진하게 풍겨졌다. 요정 안에 가득히 채운 그 사향 냄새가 맞는데 문제는 원산지가 다른 사향 냄새가 뒤섞여 있어서 사향의 원산지로 추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방 안에는 식기류조차 없어 깔끔한 상태 그대로였고, 역시 어느 누구도 없었다. 이미 사건이 일어난 지 두시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현장에 남아 있다는 건 경찰 부대처럼 멍청한 사람들이니 상대할 가치도 없다. 그들은 종업원들이 미끼를 발견하자마자 요정 안이 혼란해진 사이에 빠져 나갔을 것이다.
아카시는 신입에게 이 방을 치운 종업원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방안으로 들어가 범인들이 흘리고 갔을 흔적을 살펴보기로 했다. 등불이 꺼진 방안은 남향이라서 보름달의 환한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감각이 예민한 아카시에게 문제되지 않았다. 분명 문제되지 않아야 했다.
어째선지 그의 눈은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었다. 범인들이 흘렸을 머리카락도 없었고 옷에서 떨어졌을 실밥도 없었다. 심지어 먼지나 타액이 튀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손을 바닥에 짚어 다다미가 눌린 모양으로 대충이나마 체격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범인들이 영리하게도 여기저기를 완벽히 균일하게 눌려놔서 이마저 확인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흔적을 지운 현장은 처음이었다. 지붕을 확인한 신입처럼 지독한 사향 냄새때문에 체취로도 추적이 불가능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카시 눈 앞에 정체를 알 수없는 범인들의 잔상이 나타나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깨달았다. 이정도로 흔적을 지울 수 있는 건 파수꾼 밖에 없다.
- 현재의 경찰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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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7. 8. 10:13[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3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연재 시각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3편을 올리고 있는 걸까요ㅋㅋㅋㅋ 정말 시간이 빠르네요. 연재를 시작할때 이미 예비분?으로 3편까지 쓰고 시작한 건데요... 그동안 제가 손도 느리고 흑화온 배포본도 쓰고 있어서 이제 4편을 완성했습니다. 우아아 다음주부터 실시간연재를..ㅋㅋㅋㅋㅋㅋ
3편도 잔잔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둘이서 꽁냥거리는 이야기도 3편이 마지막입니다. 사실 이런 연애인듯 연애아닌 연애같은 이야기를 보단 추격, 사건, ero..쓰는 걸 좋아해서 어서 4편 이후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그럼 재밋게 봐주세요 ><
* 이 글은 실제 역사적 사실, 단체와 전혀 다른 픽션임을 밝힙니다.
오늘은 퇴근할 시간보다 좀 늦게 퇴근했다. 지체된 시간을 아쉬워하며 아카시는 서둘러 쿠로코가 사는 지구로 가는 노면전차를 타기 위해 정거장으로 갔다.
그는 능력제어를 받는 날이 아니라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는 퇴근하고 안내자의 집을 방문했다. 개인저택과 쿠로코의 집이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굳이 찾아오는 그에게 쿠로코는 능력제어하는 날이 아니면 오지말라고 했으나, 그 말은 듣지도 않고 언제나 집에 찾아올 명분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그의 집에 갈 명분이 있었다. 아카시는 부드러운 면 보자기에 싼 쿠로코의 유카타와 게다를 품에 안고 이미 사람들로 가득한 노면전차 안으로 들어갔다.
유카타를 빌린 그 때는 붉은 철쭉을 적셔 줄 봄비가 때 아닌 소나기로 내리던 날이었다. 비는 오전부터 내리고 있었지만 오후가 되도 그 기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만일을 위해 개인 사무실에 챙겨둔 우산을 쓰고 갔지만 이미 길거리는 진흙탕이라서 조심 걸어도 정장 바지에 잔뜩 튀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그 다음날 귀가할 땐 젖은 정장은 들고 대신 그의 유카타를 빌려 입었다.
경무조 건물이 있는 지구와 쿠로코의 집이 있는 지구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도착했을 땐 집앞에 노을이 짙게 깔렸다. 평소처럼 마당으로 들어가니 마당에서 화관을 만들면서 혼자 놀고 있던 치요가 아카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치요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어서 아카시는 단번에 발견했다.
예의 바른 아이는 서둘러 제자리에서 일어나 더러운 손을 털고 옷맵시를 정돈했다. 그런 아이에게 아카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종이로 포장한 카스테라를 건네주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오실 줄 몰랐어요.”
“아니, 미리 연락 못한 내가 잘못이야. 쿠로코 씨는 작업장에 있어?”
치요가 혼자 놀고 있다는 건 지금 쿠로코가 작업장에 들어가 책을 제본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아카시의 말에 치요가 그렇다고 대답했고 다시 한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아이의 옅은 머리카락은 부드러워서 만지면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같은 머리색을 가진 쿠로코의 머리카락도 부드러울지도.
마당에서 치요가 받은 카스테라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아카시는 집 뒷마당에 있는 작업실로 갔다.
작은 틈으로 등불 빛이 새어나오는 문을 옆으로 밀어 들어가니 그안에 있는 쿠로코가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짙은 연두색 진베를 입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책을 고정한 나무 판자를 끼고 두꺼운 갈색실로 책을 꿰매고 있던 그는 아카시를 보자마자 실을 입에 물고 있는 채 놀랐다.
“진베 입기엔 아직 춥지 않아?”
“아무래도 책을 제본할 땐 이게 편하니까요. 그나저나 오늘은 능력제어 받는 날이 아니잖습니까. 무슨 일인가요?”
쿠로코의 물음에 아카시는 품어 안고 있던 보자기를 건네주었다. 그가 작업장 안에 있는 다른 의자를 끌어 옆에 앉았을 때, 쿠로코는 보자기를 풀어보고 그 안에 깔끔하게 세탁한 자신의 유카타와 게다를 보았다. 별 기대도 안했지만 쿠로코의 입에선 고마운 말대신 아카시를 나무랐다.
“이건, 나중에 와서 드려도 되잖아요. 아카시 군 집이 우리집에서 가까운 것도 아닌데 굳이 오실 필요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걸 이미 예상하고 온 아카시는 그의 나무람을 웃으면서 흘렸다.
어떻게 말을 돌릴까하는 생각에 주위를 돌려보던 중 눈에 유독 화려한 책 여러권이 눈에 뜨였다. 표지를 각자 다른 무늬의 고급 비단종이로 마감한 그 책들 중 한 권을 조심스럽게 들어 살펴보았다. 한가지 더 특이하게도 제목인 日本民譚옆에 작은 글씨로 Japanese tales이라고 쓰여있었다. 아카시에게도 영어로 된 책은 있었지만 서양식으로 제본한 책들 뿐이라서 일본식으로 제본한 이 책이 이질적이고 신기하게 보였다.
“그건 금발의 서양인이 역관과 같이 와서 이번에 조국으로 돌아가는데 어린 손자손녀들에게 줄 선물이니 제본 해달라고 수주 받은 겁니다. 그래서 특별히 표지를 금붕어 무늬가 들어간 질긴 화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튼튼하게 해달라고 해서 거북등형식으로 엮었고요.”
확실히 이 책은 그동안 만들었던 쿠로코의 책들 중에 무척 화려한 축에 속했다. 그는 책의 형태보다 그 안 들어있는 내용을 중시하는 편이라 대체로 수수하게 만들어 왔었다. 깔끔하게 제본한 책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아카시에게 쿠로코가 책을 펼쳐봐도 된다고 말했다.
책 내용은 제목처럼 애들이 좋아할 만한 민담들이었고 삽화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영어로 번역한 탓에 세로 읽기가 아닌 가로 읽기로 되어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책이 되어버렸지만 어린 아이에게 주는 것이니 그러니하고 납득했다.
하지만 별 내용이 없을 본문 안에 혹시 이 안에 일본의 지리에 대해 언급이 있을지 모르니. 의심이 되는 단어를 위주로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 옆에서 쿠로코는 하던 일도 옆에 잠시 두고 아카시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가 책을 거의 읽었때쯤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별 거 없어. 그냥 여러가지 민담을 영어로 번역한 거야.”
“그렇습니까? 이 것 말고도 전에 한 번 이 언어로 된 책을 제본해달라 수주받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책들도 그리하겠군요.”
자신이 만든 그 책을 보면서 살며시 웃는 쿠로코를 보니 아카시는 심각한 눈으로 마냥 속 좋아 보이는 그에게 충고 하나 해주었다.
“이 책의 내용이 군사나 지리에 관한 게 아니라 다행이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연관되지 않게 조심해. 이왕이면 쿠로코 씨가 외국어 서적은 수주 안 받으면 좋겠어.”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쿠로코는 여전히 차분한 미소로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건 매력적인 일입니다. 이야기란 본디 널리 퍼지는 것이 더 가치가 있으니까요.”
지난 십 년 동안 알고 지낸 쿠로코는 이런 사람이었다. 항상 무표정에 멍해보이는 얼굴이지만 알고보면 무척 고집이 강한 성격이다. 특히 좋아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쿠로코가 작업하고 있는 책의 매듭을 묶고 마지막으로 다듬고 있을 때까지 아카시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경무조 일을 하다보면 주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소음이 심한 곳에 가기 마련인데 조용한 쿠로코의 집에 오면 복잡한 마음과 머릿속이 편안히 가라앉았다. 자신의 집도 그만 혼자 살고 있어서 조용하지만 그것만으로 편안해지지 않는다.
아카시는 집보다 여기를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쿠로코가 왜 자꾸 별일도 아닌데 집에 오냐고 물었을 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일을 끝난 쿠로코가 자리에 일어나면서 아카시에게 저녁 먹고 가라고 말했다. 그를 올려본 아카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함께 작업실을 나와 문을 자물쇠로 잠그던 쿠로코가 다시 먼저 말을 꺼냈다.
“아카시 군, 이번에는 어떤 간식을 사오셨습니까.”
“응? 뭐가.”
“아까부터 너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났습니다. 이젠 몰래 줘도 소용없으니 치요를 위해서도 간식 사오지 마세요. 안 그래도 입이 짧은데 간식 때문에 밥을 더 먹지 못하잖아요.”
“벌써 들키지 몰랐는데 대단해. 하지만 맨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
잔소리를 해도 실실 웃으면서 흘려 넘기는 아카시가 얄미운 지 쿠로코는 손등으로 그의 팔을 살짝 때리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너는 손님이 아닙니다. 언제나 편안하게 오라고 매번 말해주었잖습니까.”
“아까는 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거랑 이거는 다르죠. 정말이지 말싸움은 절대 안 지려고 하네요.”
“그게 내 특기인걸.”
앞마당으로 걸어가는 짧은 길에서 투닥거리는 두 사람 앞에 치요가 간단한 다과를 차린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아무래도 일하고 있는 쿠로코와 아카시에게 카스테라를 대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고사리 손으로 카스테라를 자르고 다과를 준비한 마음씨가 기특해서 쿠로코는 말싸움을 멈추고 치요의 쟁반을 대신 들어주었다.
“치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밥 먹을 시간이니 이건 나중에 먹도록 할게요.”
“아빠, 그럼 아카시 님도 같이 먹는거에요?”
치요의 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노을빛 하늘처럼 예쁘게 웃어주었다.
능력제어를 받기 위해 쿠로코의 집에 가기 전 새로 개점한 도라야키 가게가 있다고 해서 들릴 생각으로 오늘은 두 정류장 전에 먼저 내렸다. 전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가 뒤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아카시는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쿠로코가 도라야키 봉지를 안고 있는 치요와 함께 장난끼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짜증났다가 쿠로코 부녀인 걸 알고 기뻐진 아카시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작업을 끝낸 책을 의뢰자에게 전해줄 겸, 치요랑 잠깐 외출하고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우연히 이 근처에 있었는데 왠지 아카시가 이 곳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단다.
“사람이 많아서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네. 쿠로코 씨나, 치요나 너무 기척이 없어.”
“하지만 집안 내력인 건 어쩔 수 없죠.”
“사실 닌자인 거 아니야?”
아카시가 옆에서 나란히 가고있는 쿠로코에 농담을 던지자 그는 눈웃음을 살짝 지으며 그러니 조심하라고 장단을 맞춰주었다.
셋이서 나란히 집에 왔던 그날 밤. 치요를 재우자마자 거실에서 아카시에게 어떤 책을 보여주었다. 탁자위에 올려진 책은 서양식으로 제본되어 있었고 두께는 얇았다. 좀 더 다가가 제목을 보니 'Billedbog uden Billeder' 글자밑에 picture book without pictures라고 작게 적혀있었다.
“그림없는 그림책?”
“책 제목이 그거인가요? 서양의 유명한 동화작가가 쓴 책이랍니다. 전에 찾아온 역관에게 부탁해서 잠깐 빌렸습니다.”
그의 말에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표지 아래있던 표제지에는 Hans Christian Andersen라고 작가 이름이 적혀있었다. 동화작가로서 안데르센이란 이름은 그도 들은 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실제로 그의 책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외국서적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검사 하는 게 본인의 일 중에 하나인지라 아카시가 주의 깊게 본편을 읽어가는 중에 옆에 있던 쿠로코는 그가 다 읽는 걸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카시 군은 이 언어 잘하십니까?”
“버벅거리지 않을 정도로 읽고 쓰는 건 할 수 있어. 왜?”
“저도 이 언어를 배워보고 싶습니다.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안 보고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데 바쁜 아카시 군에게 매번 부탁하는 것도 미안하고요. 그러니 차라리 이런 날에 틈틈히 너에게 배워서 제대로 읽고 싶네요.”
동화책을 바라보고 있는 쿠로코의 옆모습을 보고 있던 아카시는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사관학교에서 받았던 교재 가져와줄게. 아직 있을지도 몰라.”
“감사합니다. 나중에 제대로 익히게 되면 이 언어의 책들을 번역할 수 있게 되겠지요.”
“쿠로코 씨의 본심은 그거네.”
살짝 웃으면서 내비치는 쿠로코의 본심에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그의 바람이 한 발자국 더 이루어 질 수 있게 아카시는 책의 맨 첫장을 다시 펴서 처음 글자에 손 끝을 갔다 댔다. 약속한 교재가 지금 없으니 우선 본문이라도 번역을 해주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쿠로코가 원하는 건 이 책의 내용일테니까.
아카시가 즉석에서 알려줄 걸 짐작했는지 그와 동시에 쿠로코가 공책과 책상 밑에 두고 있던 자신의 필묵함을 꺼냈다. 마침 읽어주려고 하는 아카시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그는 연적에 담은 물을 벼루에 뿌리고 서둘러 먹을 갈았다.
“왼손으로 쓰는 거 괜찮아? 손 놓고 있는게 더 좋지 않겠어?”
“아직은 손 놓고 있으면 네가 힘들잖아요. 그건 좀 무리고…….”
말을 흘리면서 골똘하게 생각하던 쿠로코는 좋은 꾀가 떠오른 모양인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떴다. 그는 자신과 아카시의 유카타 소매를 걷어 최대한 상대방의 피부가 많이 닿게 팔짱을 끼었다. 쿠로코가 갑자기 가깝게 오자 놀라서 오히려 몸을 뒤로 빼고 그를 밀 뻔 했다.
“불쾌해도 참아주길 바랍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아니, 그렇지 않아. 좀 놀라서 그런거니까. 이제 시작해도 돼?”
물음에 쿠로코는 공책을 펴고 먹물을 묻힌 붓을 들어 대답했다.
아카시는 천천히 영문을 직역해주면서 글씨를 쓰는 쿠로코의 오른팔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왼팔을 움직였다. 쿠로코가 그에게 편안하게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아카시는 계속 쿠로코의 움직임에 맞추어 주었다.
그가 직역해주는 것을 세 장 이상 써내려가는 동안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두사람이 책에 집중하는 동안 밤은 깊어지고 촛불이 자작자작 타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카시는 책을 읽고 있었던 거실 다다미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것도 같이 책을 읽고 있던 쿠로코의 팔을 베고 있던 채로.
처음 눈 떴을 땐 멀쩡한 침실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에서 자고 있는지 기억이 안 나지않아 멀뚱히 잠자고 있는 쿠로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게, 동화책을 번역한 것에서 너무 열중한 나머지 두 사람은 동이 트기 직전까지 책을 붙잡고 있었다. 결국 직역해주는 아카시의 말이 꼬이고 그걸 받아 적고 있는 쿠로코의 글씨가 꼬불꼬불 되고 나서야 뒤로 쓰러지듯이 잠들어 버렸다. 이랬으니 잘 기억이 안 날 법했다.
고개를 돌려 마당에 연결 된 문의 살짝 열어둔 틈을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 버린 듯 했다. 너무 늦잠을 잔 탓에 졸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이제는 일어나야할 시간이었다.
아카시는 자기에게 팔 베개 해주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손을 잡아 준 쿠로코의 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쿠로코는 금세 눈을 뜨고 따라 같이 일어났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쿠로코 씨도 잘 잤어?”
주고 받은 아침 인사에 쿠로코는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 아카시도 같이 하품을 했는데 이리저리 뻗친 쿠로코의 머리가 신경 쓰여 저절로 손으로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안내자가 잠에서 방금 깨어난 모습을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그동안 쿠로코가 먼저 일어나 그가 깨어나기까지 기다리곤 했었다.
푹신한 요가 아닌 맨 다다미에서 자서 그런지 평소보다 몸이 뻐근했다. 한 팔로 기지개를 펴고 움츠리고 있던 몸을 움직이자 옆에 있는 쿠로코도 같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팔 베개 해준 팔이 불편한 지 여러 번 어깨를 돌렸다.
“맨 바닥에서 잘 못자는 도련님에게 팔베개 해줬더니 몸이 천근만근이네요.”
“나이가 많아서 그런게 아니고?”
“왜 이러세요. 아직 팔팔할 때입니다.”
아카시의 농담에 쿠로코는 무시 말라고 받아쳤다. 의자에 앉아서 책이나 읽는 샌님에, 소심하고 차분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장난끼가 많고 당돌한 면이 숨어있었다. 그래서 파수꾼과 안내자로 만나 1년 뒤 친해지기 시작 했을 때 신분 차가 있었음에도 쿠로코가 먼저 아카시에게 장난을 걸었다. 외동이었던 아카시는 타인에게 장난을 처음 당해봐서 당황했었지만 지금은 같이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
연신 어깨를 두드리던 쿠로코가 아카시에게 뻐근한 어깨를 내밀고 안마를 부탁했다.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수 안마를 해주었다. 만약 부하들이나 다른 대장들이 아카시의 이런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놀랄 것이다.
주먹으로 두드리고 주물려주기도 했다. 그런 동안에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늦게 일어난 덕분에 같이 늦잠을 잔 치요가 눈을 비비고 거실로 나왔다. 책이 펼쳐져 있고 문방사우도 정리하지 않은 거실에서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놀랐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앉은 치요는 쿠로코와 아카시를 번갈아보더니 작은 손가락으로 볼을 가르켰다.
“둘 다 볼에 다다미 자국 났어요.”
치요의 말에 아카시와 쿠로코는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그 말을 들으니 이제야 광대와 관자놀이에 찍힌 다다미 자국이 보였다. 쿠로코는 아카시의 시선이 간 자신의 오른쪽 광대에 손을 대고 만져보더니 자국이 느껴져서 웃어버렸다.
“정말 꼴불견이네요.”
“그러네.”
아카시도 쿠로코를 따라 자신의 왼쪽 볼을 만지며 웃었다. 소소한 기억이 될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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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7. 1. 15:09[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2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두번째 이야기로 다시 왔습니다.
이번에도 아직은 별거 없는 이야기들 뿐입니다. 아마 4편까지 지루하지 않을까.... (._. .. ㅋㅋㅋㅋ어째든 어서 사랑은 스릴쇼크서스펜스한 부분을 쓰고 싶습니다 흑흑ㅎ
그럼 재밌게 봐주세요.
* 이 글은 실제 역사적 사실, 단체와 전혀 다른 픽션임을 밝힙니다.
그들이 사랑했던 쿠로코 부인은 치요가 세 살 일 때 '그 사건'에 휘말려 돌아갔다.
'그 사건'이란 5년 전, 무사세력을 억압하는 정부의 행동에 반발한 한 무리가 정부기관 인근에 있는 시장을 점령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로 인질극을 벌였던 사건을 말한다. 당시 그 들은 인질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고 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당연히 그걸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협상은 무산되고 경찰부대과 경무조가 합동해서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진압 하던 중에 지휘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고한 인질들 중 35명을 공범으로 몰아 학살하고 말았다. 그 때 어린 치요와 같이 시장에 갔던 쿠로코 부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학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정부는 인질들을 죽인 사건에 대해 공범이라 어쩔 수 없었다며 해명했지만 국민들과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 결국 진압 작전을 지시했던 지휘자의 사태를 끝으로 사건은 피해자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마무리 되었다.
당시 갓 20살이 된 아카시는 아직 사관학교의 졸업예비생 신분이라서 경무조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그래서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건의 자세한 경위를 알 지 못했다. 경무조에서 의도적으로 내막을 감췄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후로 능력제어는 쿠로코의 집에서 하게되었다. 원래는 쿠로코가 그 날이면 아카시의 별장에 찾아와 하루를 보냈는데, 쿠로코 부인이 돌아간 이후에는 세 살 밖에 안 된 치요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서 결국 지금처럼 바꾸었다.
그때는 사관학교에서 조금이나마 스스로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고, 능력도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다행히 쿠로코에게 능력제어를 받는 건 한 달에 한 번 꼴이었다. 그래서 아카시는 부인의 유품을 정리 해야하는 쿠로코를 위해 최대한 능력제어하는 걸 늦춰서 장례식 이후 꽤 오랫만에 그에게 찾아갔다.
한 달하고 23일이란 시간의 흐름에 쿠로코는 부인을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사건 이 후에도 집을 깔끔했고 거실 한 쪽에 마련한 불상과 집안 가득하게 풍기는 향 냄새 외에는 바뀐 것도 없었다. 집에 찾아온 아카시를 위해 아직은 서툰 솜씨로 식사를 차려준 쿠로코의 얼굴에도 차분한 미소가 다시 찾아왔다. 반찬이 얼마 없는 밥을 먹으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푹신한 요 위에 누워서 손을 잡고 같이 잠에 들었던 늦은 밤,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치요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악몽을 꾸다 깼는지 너무 서럽게 울고 있던터라 선 잠을 자고 있던 두 사람도 일어나야했다. 아직 능력제어가 덜 된 탓에 쉽게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카시에게 쿠로코는 미안해하며 양해를 구했다.
“미안합니다. 금방 다시 재우고 올게요.”
“괜찮아, 아니 괜찮습니다. 이미 많이 나아졌습니다.”
무의적으로 나온 반말에 스스로 무례하다고 생각해 미간을 찌푸렸다.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통해 파수꾼의 능력을 기르면서 성격이 점점 오만한 쪽으로 변한 탓인지 점점 평민인 쿠로코에게 존댓말을 쓰는 게 어려워졌다.
사정을 알고 있는 쿠로코는 웃으며 어차피 신분의 차이가 있으니 반말해도 된다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조급함이 느껴져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아카시는 치요가 울고있는 방으로 간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치요가 금방 울음을 그쳐서 집안은 조용해졌지만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반나절동안 쿠로코의 손을 잡고 있었다고 해도 완전히 몸 속에 돌아다니는 독성 물질이 완전히 해독되지는 않는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자 그는 누워있기 힘들어 근처에 둔 주전자로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에게 급히 간 쿠로코가 방문을 반쯤만 닫고 나간 덕분에 소리나지 않게 문을 조심히 밀 수 있었다. 치요의 방은 가까운데 있어서 몇 걸음 가지않고 그 방 문앞에 설 수 있었다.
아카시와 있던 침실문과 달리 쿠로코는 치요의 방문을 꼭꼭 닫아두었다. 때문에 방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파수꾼인 아카시는 예민한 감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지지직- 심지가 타는 소리가 나는 촛불 때문에 은은하게 빛나는 문 너머에서 쿠로코가 다시 잠든 치요를 안고 천천히 톡, 톡, 톡 토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새근새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처럼 듣는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도라지꽃 일곱송이보다 소중한 아이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사이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는 부르다 울음이 북받쳐 오르면 잠시 멈추고 눈물을 닦은 뒤 다시 치요를 토닥이면서 이어 불렸다. 그 모습은 계속 태운 탓에 깊게 배인 향 냄새와 같았다.
지난 5년동안 시원한 평온함은 알려주었고 의지가 되던 쿠로코의 이런 나약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문을 꼭꼭 닫았을 지 모른다.
아카시가 조심스럽게 문을 등지고 기대어 앉아 있을 동안 자장가는 계속 반복 되었다.
간만에 외근이 없는 날이었다. 출근하고 계속 사무실에 있던 아카시는 반나절 동안 앉아 있어서 그런지 몸이 뻐근했다.
그러나 안에 있는다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서 그는 그동안 외근때문에 바빠서 미뤄둔 서류들을 처리했다. 주로 다른 기관장들에게 줄 축의금이나 선물에 대한 예산 결제, 외국에서 온 대사를 접대 준비 사항에 관한 보고서 같은 경무조 외부 활동에 관한 서류들이었다.
사건들에 관한 서류는 거의 없었다. 정부가 위험하다고 정한 이름있는 반동 세력에 관한 사건들이 아니면 작은 사건들은 보고서를 보존하지 않았다. 사실 경무조의 출범 의의는 파수꾼의 능력으로 국민을 지킨다는 것이지만, 정작 하는 일은 정부와 그들에게 권력과 돈을 지원하는 귀족들, 오야토이 외국인[각주:1]을 반동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훌륭한 사병에 불과하다. 그나마 파수꾼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조직이라는 이유로, 집 지키는 개 취급 당하는 경찰부대에 비해 대우와 위치가 좋은 건 있다.
자기 앞에 올라 온 서류를 일찍이 처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면으로 만든 커튼을 걷은 창문을 통해 들어 온 햇빛은 정오가 가까워져 눈이 부셨다. 봄 햇빛 치고는 꽤 밝았다.
아카시의 사무실 창문은 경무조 건물 뒤쪽에 있는 정원을 향하고 있어서 푸른 잔디와 피기 시작한 붉은 철쭉이 보였다. 치요가 자주노는 그 집 앞마당보단 훨씬 크지만 철쭉만 빼면 정갈한 푸른색이 닮았다. 멍하니 창문 밖을 보고 있던 그는 점심을 먹고 정원에 앉아서 햇빛을 쬐야겠다고 마냥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아카시가 자리에 앉고 들어오라고 하자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람은 아카시의 부대인 2소대 소속 파수꾼이었다. 부대에 소속된 지 얼마 안 된 2소대 네 번째 파수꾼인 신입은 아직도 아카시의 사무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별 다를 게 없는 사무실을 둘러보는 그의 손에는 서류가 들려져 있었다. 아카시가 그걸 보고 손을 내밀자 그는 그제야 서둘러 서류를 그에게 주었다.
“오늘은 외근이 없어서 그런지 온 몸이 근질거리네요. 점심 먹고 나면 어서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야겠어요. 안 그러면 몸에 버섯이 자라날지도 몰라요.”
신입은 심심했는지 너스레 웃으면서 농담을 꺼냈다. 하지만 아카시가 그를 따라 웃지도 않고 간단하게 무시해버렸다. 냉랭한 대장의 반응에 그가 식은 땀을 흘리고 겨우 웃고 있었다. 더 낮아진 분위기를 타파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카시는 이제 그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재미있고 넉살이 좋은 건 좋은 성격이나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람은 아카시에게 실속 없고 피곤하기만 했다.
조금 울적해진 신입이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자 외근 갔다 온 다른 부하가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급하게 들어온 그는 사무실에 신입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어서 그를 내보내고 문을 꼭 닫아 바로 아카시에게 다가왔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카시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부하는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누키[각주:2]에서 발견된 파수꾼 예비자가 실종 되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
실종에 관한 공문이 내려온 적이 없었기에 아카시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턱을 괴는 그의 미간은 어느새 찌푸려져 있었다.
“카가와 현의 예비자라면 나이가 서른인데 뒤늦게 능력이 발현되었다던 사람이었나? 그라면 탐색자가 찾아 낸 지 한 달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실종되었던 건가. 그에게 경찰 부대가 붙어졌을텐데. ”
“임무를 맡았던 경찰부대원의 말로는 처음에는 능력 제어를 위한 안내자를 찾던 중에 집안에서 사라진 걸 보고 몸이 좋아서 어디 산책이라도 간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실종 된 걸 알고 수색했으나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부하의 말을 듣던 아카시는 예비자가 산책 간 줄 알았다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능력이 막 발현한 파수꾼은 온 몸이 너무 아파서 안내자를 만나기 전까지 전혀 움직일 수 없다. 결국 일을 그르친 건 파수꾼에 대해 잘 몰랐던 경찰 부대 때문이었다. 제복만 번지르르하게 입을 줄 알지 일처리는 수준이하라고 속으로 평가했다.
어쨌든 정황을 들어보니 꽤 심각한 일이었다. 예비자 본인의 신변이 위험한 것도 있다만 인력이 항상 부족한 경무조에게도 앞으로 위험이 될 일이다.
“경찰부대에선 아직 아무 말이 없지만 아무래도 납치 인 것 같습니다. 원래 탐색자의 일은 극비 임무라서 예비자가 안내자를 만나 사관학교로 인도 되기 전까지는 가족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를 텐데 납치 되었다는 건 범인이 경무조를 잘 알고 있거나…….”
“본인이 누군가와 공모하고 스스로 빠져 나갔거나. 나이가 많으니 그쪽도 무시할 수 없지. 둘 중에 하나라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군. 정보의 출처는 소문인가?”
아카시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부하를 올려다 보며 물어보자 그는 자세를 바로하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조만간 공문이 내려 올 것 같지만 아직 상부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외부에서 이에 대한 소문이 돌아도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말도록 대원들에게 대신 일러두어라. 특히, 이번에 들어 온 신입은 쓸데없이 말이 많으니 더 조심하도록 교육 시켜놔. ”
명령에 부하는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했다. 고개를 든 그의 표정은 지적한 후임 때문에 그리 좋지 않았다. 분명 신입에게 대장은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 입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넉살이 좋은 사람이지만 순진하고 좀 바보같은 면이 있어서 선임으로서 걱정했었다. 그런데 일러둔 지 얼마 안돼서 이렇게 실수를 할 줄이야.
부하는 아카시가 그만 나가보라는 말에 따라 사무실을 나오면서 이번에는 호되게 가르쳐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능력 제어를 받는 날이 아니였으나 쿠로코에게 부탁한 일이 있어서 아카시는 야근을 하지 않고 바로 퇴근했다. 쿠로코가 급한 일이 아니면 능력제어를 하는 날에 찾으러 오라고 했지만 그는 마감날에 맞춰서 가기로 했다.
자신의 안내자가 하는 일때문에 거의 집에만 있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기 전에 전화도 해보았다. 아카시가 쿠로코 집에 전화기를 설치한 지 6개월 밖에 안되서 아직 전화기에 익숙하지 않는 쿠로코의 어색한 모습에 소소한 재미있다.
5년동안 매번 타는 전차를 타고 익숙한 시장 길을 걸어가고 나면 익숙한 집이 보였다. 지난 5년동안 보수도 하고 치요를 위해 울타리를 작고 예쁜 걸로 바꾸고 마당을 꽃으로 가꾸기도 했지만, 차분하고 정갈한 집 모양새는 변함이 없었다.
대문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치요가 통통 발소리를 내면서 현관으로 달려왔다. 아이는 아카시에게 밝게 웃고 두 손모아 인사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쿠로코를 닮았으나 외모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치요의 미소는 다정한 그 미소이었다.
그런 치요에게 그는 가방에서 판 초콜렛을 꺼내 주었다. 작은 아이 손에 잡힌 그 판 초콜렛은 일전에 만났던 외국인 관리에게 받았던 선물이었다. 귀한 거라서 아카시도 하나 밖에 가져올 수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초콜렛을 처음 본 치요는 그것을 받고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초콜렛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자 그 것이 간식임을 깨닫고 놀란 눈으로 아카시를 올려다 보았다. 동글동글한 아이의 눈을 마주 본 아카시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치요한테만 주는거야. 쿠로코 씨에게 말하면 나 또 혼나. 알지?”
그의 부탁에서 치요는 머뭇거리다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요에게 가방과 정장 자켓을 주고서 아카시는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집 뒷마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쿠로코의 작업실이 있었다.
장인들의 작업장이 집에 붙어 있는 게 드문 건 아니지만 쿠로코의 작업실은 뒷마당에 있는 탓에서 대문에서 보면 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딸린 창고를 개조하고 증축한 그의 작업장은 뒷마당의 공간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어서 안에 들어가면 개인공방치고 넓은 편이었다. 그늘 진 뒷마당에 있는 작업실의 창문에서는 하얀 장지를 주홍색으로 밝힌 등불빛이 보였다.
미닫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입구 옆에 있는 책상에서 쿠로코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독서대에 복사할 책을 올려두고 필사하고 있었다. 그는 책을 제본하는 장인이나 가끔 필사를 맡아서 할 때도 있었다.
아카시의 안내자이기 때문에 정부으로부터 생활 보조금을 받고 있으니 결코 생활비가 부족해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일하는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책을 좋아하는 쿠로코는 그렇게 말했다.
필사에 열중인 쿠로코는 그가 작업실에 들어와 자기 옆을 지나가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주 있던 일이라서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차분하게 몇번이고 봤던 이 곳을 둘러보았다.
쿠로코의 작업실에는 역시 종이가 많았다. 책의 크기에 맞게 재단 된 내지로 쓰는 얇은 종이와 표지로 쓰는 두꺼운 종이는 종류와 색에 맞게 보관장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가 있는 곳의 옆 책상에는 완성된 책들이 주인의 이름표와 함께 하얀 종이에 싸여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중에는 아카시가 부탁한 책도 있을 것이다.
작업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쿠로코의 서재가 있는데 이 서재 때문에 그의 작업실은 넒었다. 서재에는 쿠로코가 제본일을 시작하면서 모은 책들로 장서량 꽤 많았다.
문학을 좋아하는 애독가답게 주로 고전 소설부터 요즘에 나오는 신소설에, 하이쿠 모음집을 포함한 시가집들이 주로 많았다. 거기에 간간히 부인들이 보는 육아와 요리에 관한 실용서도 있었다.
서재를 한 바퀴 돌고 난 아카시가 들어올린 책은 한쪽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보관하고 있는 쿠로코의 일기였다. 치요가 태어나고부터 쓴 일기는 보통 육아일기와 다를게 없을 것이지만 분명 거기에는 자신에 관한 내용도 있을지도 몰라서 매번 읽고 싶었다. 하지만 막 책을 펼치는 순간, 목표치까지 끝난 쿠로코가 아카시를 불렸다.
“그 책 내려놓고 오세요. 부탁하신 책 드리겠습니다.”
“한번만 읽어보면 안 돼? 나중에 치요에게 보여줄 거 잖아.”
아카시가 약간 고집을 피우며 책에 꿋꿋이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하지만 부탁에도 쿠로코는 단호했다.
“아카시 군이 치요가 아니잖아요. 이리 안 오시면 책도 저녁도 없습니다.”
저녁도 안 준다는 말에 서운한 웃음이 나와 어쩔 수 없이 다시 그의 일기를 내려놓았다. 지금 아니면 항상 쿠로코와 손을 잡고 있으니 일기를 읽을 기회가 없으니 지금 읽지 못한 게 아쉬웠다.
쿠로코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무릎 위에는 부드러운 하얀 비단 보자기에 싸고 붉은 실로 매듭진 책이 있었다. 어찌나 꼼꼼하게 쌌던지 안에 있는 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재에서 자신에게 걸어오는 아카시에게 근처에 있는 빈 나무함도 같이 가져오라고 했다. 그가 검은색 옻칠한 나무함을 건네주자 무릎에 있는 책을 바로 나무함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아무리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춘화를 선물해드려도 되는 겁니까?”
“그 쪽에서도 춘화같은 그림을 즐겨보는 문화가 있어. 그리고 이건 그 나라 관리가 원해서 준비한 거고.”
아카시에게 이유를 들은 쿠로코는 어느 정도 납득했으나 그래도 탐탁치 않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만에 하나 어린 치요가 작업실에 오다가 춘화를 보게 되면 큰일이니 그동안 노심초사 했을 것이다.
쿠로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함을 아카시에게 주고 작업실에 나갔다. 밖에 나오자 작업실 문을 닫아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그는 아카시와 함께 집 앞 마당으로 걸어가면서 춘화책을 만들면서 실수로 치요에게 보여질까봐 걱정되서 밤을 새가며 작업했으며, 할때마다 노골적인 그림에 정신적으로 피곤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아카시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올려보았다.
“아카시 군, 설마 치요에게 간식 같은 거 주지 않았죠?”
“응, 퇴근하고 바로 오는 길이라서 사갈 여유가 없었어.”
오늘도 의심하는 쿠로코의 말에 아카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이번에는 쿠로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주었으니 들키지 않을 것이다. 소심한 치요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현관문으로 들어오자 집 안에 있던 치요가 달려와 맞이했다. 쿠로코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치요는 아버지에게 초콜렛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거짓말 했다고 생각했는지 쿠로코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치요는 크게 한 숨을 쉬고 조금 불안한 눈으로 아카시를 올려다 보았다. 아카시는 그런 아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했어.”
여전히 불안하고 미안한 표정인 치요의 작은 어깨를 토닥여주고 그는 아이와 함께 거실에 앉아 쿠로코가 차려주는 저녁을 기다렸다.
따뜻한 된장국과 말린 생선을 구운 반찬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마치자 아카시는 쿠로코를 도와 저녁상을 치웠다. 저녁도 얻어 먹었으니 보답으로 다른 곳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설거지도 했다. 그리고 칭찬 받을 생각에 거실로 들어갔는데 탁상을 사이에 두고 딸과 마주 앉는 쿠로코가 심각한 눈으로 그 위에 올려진 판 초콜렛을 보고 있었다.
“이거, 아카시 군이 치요에게 준 거 맞죠?”
아무래도 맘이 약한 치요가 쿠로코에게 초콜렛을 보여 준 것 같았다. 거짓말을 잘 안 하는 성격을 아버지에게 물러 받았으니 어쩔 수 없었을 지도 몰랐다. 증거도 있는 마당에 시미치를 뗄 수 없었던 아카시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치요, 참 착하네.”
“말 돌리지 마세요. 간식 같은 거 사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외국 과자면 귀한 거 아닌가요? 그러면 아카시 군 아버님부터 드리세요.”
잔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매번 가져오는 간식에 대해서 이제 포기할 만도 한데 쿠로코도 고집이 있어서 제법 끈질겼다. 그러면 그럴 수 록 아카시도 고집을 부리고 몰래라도 사오고 있었다. 그래서 쿠로코가 잔소리를 하면 아카시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지만 그렇다고 서로 기분 상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나 형제들 사이에서 하는 작은 장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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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6. 24. 21:12[흑적] 땅거미 내리는 저녁 1
정말 오랫만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입니다.
연재를 시작하기 앞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감이 안 잡히네요...
우선 이 글은 센티널버스를 기반으로 써보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이제 막 메이지유신이 시작할 때로 잡아보았지만 사실 잘 아는 게 없어 실제랑 이 글의 설정이 많이 다를겁니다. 그러니 배경에 신경쓰지 말아주세요...헤헿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이 글은 실제 역사적 사실, 단체와 전혀 다른 픽션임을 밝힙니다.
경무조 동경지부 2소대 대장인 아카시가 부하 한명을 데리고 사건이 일어난 구라마에 창고 구역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 비좁은 곳은 사건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벚꽃 핀 봄이지만 새벽에 소나기가 내렸고 날도 흐려서 제법 바닷바람이 차가웠기에 사람들은 서로 붙어있었다.
교역품을 보관하는 창고지역에 답게 오사카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체로 수수한 색의 두꺼운 기모노를 입었으나 종종 서양 복식을 입은 사람들과 상인들과 같이 온 외국인들도 보였다. 그들처럼 아카시 또한 서양복식으로 된 검은색 정복을 입고 있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는 빳빳한 챙이 달린 정모로 감추었다.
이미 일반 경찰부대원들이 주위를 정리해준 덕분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큰 방해 없이 현장 안쪽으로 빨리 갈 수 있었다.
사건 현장에 도착하니 아침에 발견 되었다던 시체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져 유족들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에 내린 소나기 때문에 혈흔도 대부분 씻겨 내려간 상태. 어떤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질척한 진흙 바닥을 보면서 아카시는 왜 자존심 강한 경찰부대 제1 대대장이 꾹 눌러 쓴 서한으로 직접 협력을 요청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부대 대원 중 제일 고참인 사람이 아카시에게 다가와 아침에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말들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현장을 살펴보는 것에 집중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파수꾼인 아카시의 눈에는 보통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흔적들이 또렷하게 보여서 그 단서를 쫓아 사건의 경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빗물에 박힌 돌이 드러난 진흙 바닥에 피해자가 있었던 흔적을 보아하니 피해자는 남들보다 키가 작았으며, 저항없이 앞으로 단번에 고꾸라진걸로 보니 그는 급소를 맞고 즉사했다. 아마 머리를 맞았을 것이다. 시체가 있었던 자리 주위에 찍힌 많은 발자국을 살펴보던 아카시에게 옆에 있던 부하가 말을 걸었다.
“대장님, 미세하지만 왼쪽 창고 벽에서 건어물 냄새가 납니다만 여기에서 만든 건어물 냄새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시체가 있었던 자리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피해자의 냄새가 아닙니다. 그 냄새와 함께 거의 맡아본 적이 없는 매운 냄새도 섞여있습니다.”
감각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경무조의 파수꾼들 중에서도 특히 후각이 민감한 부하의 말에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일러둔 대로 후각을 집중하니 이 곳과 다르게 더 짠 내가 강하고 기름내가 섞인 바다 냄새가 났다.
계속 팔짱끼고 주위를 살펴보던 아카시는 비에 흠뻑 젖은 왼쪽 창고벽을 살펴보았다.
나무로 만든 창고 벽은 허술하게 송진이 발라져 있었다. 먼지도 많이 묻어서 거무튀튀한 벽을 보던 그는 다시 모든 신경을 시각에 집중했다. 마감이 덜 된 나무벽은 송진이 발라져 있어도 자잘한 틈이 많았다. 그리고 그 틈에는 미처 비에 씻겨지지 않는 아주 미세하게 남은 혈흔이 말라있다.
그렇게 미세한 혈흔 하나를 찾아내자 나머지 혈흔들도 같이 크게 인식되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혈흔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방팔방으로 튄 혈흔의 꼬리는 그가 현장으로 온 방향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피는 주로 밑쪽으로 튀었고 높은 곳까지 많이 튀지 않았다. 이만하면 단서는 충분했다.
자신과 부하의 뛰어난 감각으로 얻은 몇 가지 단서들로도 아카시가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를 볼 수 있었다. 이미 단서들을 머릿속에서 짜 맞추고 있던 그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호흡을 정리하니 제법 시끄러웠던 주위의 소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이윽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는 밤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아직 비가 오지 않아 마른 거리가 잔상으로 보였다. 새벽 내내 차가운 소나기가 왔는데도 피가 제법 말라진 것을 보면 사건은 비가 오기 전에 일어났다.
그 다음엔 맞은 편에서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는 키가 작은 남자와 몸집이 남들보다 큰 남자의 잔상이 나타났다.
그들이 바로 앞까지 오자 아카시는 살짝 뒤로 물러셨다. 이윽고 눈앞에서 두 사람은 크게 싸우기 시작했다. 우선 키 작은 남자가 왼쪽 벽으로 몸집이 큰 남자를 왼쪽 벽 쪽으로 밀었고, 몸집은 큰 남자는 넘어지면서 벽에 부딪쳤다. 아마 그때 그의 몸에서 나는 건어물 냄새와 매운 향신료가 섞인 체취가 벽에 묻었을 터.
그렇게 넘어진 몸집은 큰 남자는 손에 흉기, 아마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뾰족한 돌맹이를 들고 뒤 돌아선 키 작은 남자를 뒤통수를 쳐 죽였다. 키 작은 남자의 피는 뒤에 있던 몸집이 큰 남자에게 모조리 튀었다. 그가 가름막이 된 탓에 그의 피는 벽 아래쪽에 드문드문 튀었던 것이다.
결국 피해자를 죽인 범인은 흉기를 들고 다시 왔던 방향으로 도망갔다. 그가 간 방향은 배들이 정박한 부두 쪽이었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몸집이 큰 남자를 보는 것으로 잔상은 끝났다. 다시 주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잔상을 다 본 아카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있었던 경찰부대 고참에게 말했다.
“피해자를 죽인 범인은 키가 6자 이상 될 정도 몸집이 훨씬 큰 남자, 이 지역 사람이 아닌 다른 어촌 지역에서 온 사람이라 추정된다. 아예 매운 향신료를 즐겨 먹는 외국인일 수 있으며 성격은 소심하나 충동적인 면이 있을 테니 체포하는 데 조심하도록. 최근 3일 전에 건어물을 실은 화물선을 탄 선원들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카시가 이 긴 말을 위압적인 말투로 빠르게 말하자 고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국 같이 옆에 있던 그의 부하인 경무조 대원이 한숨을 쉬면서 아카시의 말을 필기한 쪽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부하는 자신의 쪽지를 얼떨결에 받는 그 사람을 보면서 조금 우쭐해 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감각이 뛰어나고 능력이 좋은 파수꾼들이 모인 경무조 동경지부에서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아카시 세이주로였다. 25세 젊은 나이로 2소대 대장이 될 수 있었던건 위세높은 가문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그의 뛰어난 추리 덕분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품있고 아름다운 외모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소대의 대장들을 포함한 나이 많은 대원들은 모든 게 완벽한 이 사람이 인간적이지 않다고 싫어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래서 그를 우러러 보았다. 마치 신격화 하는 것처럼.
부하가 동경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말던 아카시는 아직도 말이 없는 그 고참을 무시하고 바로 사건 현장을 떠났다.
그와 자신의 부하가 할 일은 완벽하게 끝냈다. 나머지는 몸 쓰는 일이니 그것이 전문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게 옳았다.
경무조 건물이 사고 현장에서 제법 멀어서 아카시는 인력거를 타지 않고 노면전차로 돌아왔다. 오는 중에 그의 부하는 다른 곳에 호출이 있어 헤어졌다.
경무조는 희귀한 능력을 가진 파수꾼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대규모인 경찰부대보다 규모가 현저히 적었다. 그래서 대장이든 일반 대원이든 혼자서 다니는 건 빈번했다. 그래도 정원이 5명인 1소대만 있는 오카사나 교토에 비하면 도쿄에는 3소대나 있으니 나름 수도의 경무조답다고 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소대원들까지 포함해서 건물 안에 있는 대원들은 대여섯 명 정도였다. 각자 책상에 앉아서 사무원들과 같이 일을 보고 있던 그들은 2소대 대장인 아카시에게 인사했다. 대충 형식적으로 인사를 받아준 그는 곧장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 들어갔다. 같이 따라온 비서가 차를 내어주겠다며 대신 문을 닫아주었다. 올해 서른이 된 그는 세 명의 경무조 대장을 동시에 보필하고 있다. 이도 규모가 작은 경무조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책상에 앉은 아카시는 서랍에서 보고서 용지가 들어있는 결재판을 꺼내고 필통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펜을 들었다. 서양에서 들여온 이 펜은 촉이 금속이라서 더 세밀하게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붓보다 애용했다. 펜촉에 잉크를 묻힌 그는 망설임 없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단순한 살인사건이기에 아카시가 상부에 보고할 내용은 많지 않았다. 그런 사건들은 윗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따로 첨부할 증거도 없는 보고서에 아카시는 마지막 한 줄을 적었다.
반동분자와 연관 없음.
Not associated with terrorist.
영문 보고서도 포함해 보고서 두개를 작성하고 난 다음, 나머지 시간에 다른 사건에 관한 자료를 읽고 있던 아카시는 오후 네 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사복인 갈색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네모난 서류 가방을 들고 사무실에 나오자 책상에 앉아있던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카시를 마중했다.
“전에 말해두긴 했지만, 내일은 못 나오니 다른 사람들에게 대신 말해줘.”
“능력 제어때문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 해드리겠습니다.”
그가 꺼낸 능력제어라는 말에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수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되려 그것이 그들을 혼자서 살 수 없게 만들었다.
파수꾼들은 능력이 발현되기 전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 스무살을 기점으로 능력이 발현되면 원치 않아도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되고 그때부터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파수꾼에 관한 연구의 결과들에 의하면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특수한 장기가 있는데 그 장기에서 나오는 물질이 그들의 감각을 증폭 시켜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물질은 독성도 띠고 있어 파수꾼들의 생명을 갉아먹었다. 거기다가 잔뜩 예민해진 감각때문에 남들이 느낄 수 없는 것까지 느끼고 마니, 그렇게 들어온 엄청난 정보량은 머릿속애 마구잡이 침투하여 사람의 정신마저 온전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파수꾼이란 개념이 서양의 센티널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능력이 발현된 파수꾼들을 보고 귀신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기피했었다.
그런 이유로 파수꾼들은 몸 속에 쌓은 독성을 중화시켜 예민해진 감각을 잠시 가라 앉혀주는 능력제어라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능력제어는 파수꾼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비하게도 파수꾼들만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장기에서 나오는 독성을 중화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파수꾼이 안내자이다.
안내자들은 파수꾼에 비해 밝혀진 바는 별로 없다. 그들은 파수꾼들과 달리 특출난 능력이 있지 않고, 생명을 갉아 먹는 독성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서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파수꾼을 만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자신이 안내자임을 모르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과 함께하는 능력 제어는 간단했다. 파수꾼들은 자신의 안내자라고 정해진 사람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몸 속에 돌아다니는 독이 해독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어쩌면 파수꾼들보다 안내자가 더 신기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카시도 다른 파수꾼들처럼 능력 제어를 위해 10년 전부터 정해진 자신의 안내자를 만나려 일찍 퇴근했다. 봄이 되자 부쩍 낮 시간이 늘어나 하늘은 아직도 푸른 색이었다. 아마도 그의 집에 도착할 때쯤 되야 노을이 질 것 같았다.
경무조 건물 옆에 있는 백화점 앞을 지나가니 아침부터 있었던 약간 두통이 지금은 제법 세져서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직 다 피지않는 벚꽃 냄새가 오늘은 지독하게 맡아졌다. 아카시는 뻑뻑한 왼쪽 눈을 차가운 손등으로 지긋이 누르며 자신의 집과 반대 방향에 있는 지구로 가는 노면전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정거장으로 갔다.
노면 전차를 한시간 정도 타고 정거장에서 내려 조금 걷다보면 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의 한 줄기인 식료품 점과 공예품 점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면 조금 한적한 곳에 책을 파는 서점들이 있다. 그 가게들 중에서 수작업으로 제본하는 장인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카시의 안내자 쿠로코 테츠야였다.
아카시는 그에게 능력제어를 받기 위해 가다가 두통이 심할 때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처음 그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다보면 쿠로코가 자신에게 주는 시원한 평온함도 떠올라서 어느 정도 진정할 수 있었다.
때는 겨우 15세의 나이로 능력이 발현 되었던 10년 전. 다른 파수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카시도 예민해진 감각과 특수한 장기가 뿜어내는 독성에 괴로운 나날을 보냈었다.
에도에서 몇 안되는 귀족 가문의 당주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리를 이을 외동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안절부절 못했고, 나중에 파수꾼을 찾는 탐색자가 찾아와 그가 파수꾼임을 알려 줬을 땐 놀라는 동시에 기뻐했다. 하지만 우선 아들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선 그의 안내자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한 파수꾼을 찾고 그의 안내자까지 찾아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탐색자가 당주의 닥달에 최대한 빨리 찾은 사람은 23세의 평민 남자이었다. 이름이 쿠로코 테츠야인 그 사람은 그 당시 책 만드는 장인 밑에 들어가 배우고 있던 견습생이었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아내가 있는 가장이었다.
때문에 쿠로코는 자신을 찾아온 탐색자에게 자신이 파수꾼을 돕는 안내자이며, 아카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들었을 때 무척이나 당황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이 첫대면 하던 날, 아카시는 자신의 안내자가 격식을 차린다고 나가기와 하카마를 입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방안으로 들어왔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엔 아카시가의 저택에서 어색해하고 있던 쿠로코이었지만 아카시가 침의에 누워 괴로워하는 것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다가와 바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쿠로코의 체온이 땀으로 흠뻑 젖은 아카시의 손에서 전해진 순간 거짓말같이 고통이 시원하게 가시기 시작했다. 잔뜩 예민했던 감각도 잦아 들어서 안내자가 주는 평온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그게 너무 기뻐서 앞에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있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자 당황한 쿠로코가 손을 꽉 잡아주면서 미리 들은 이름을 불려주었다.
“세이주로 군. 이제 괜찮습니다. 푹 쉬어도 돼요.”
잔잔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그날 오랜만에 단잠에 들었다.
시간이 흘려 잠에서 깨고 그동안 잘 먹지 못했던 끼니를 떼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주는 파수꾼과 안내자 사이에게 가장 중요하고 맨 처음 해야 할 '각인'의식을 서둘러 준비했다.
아카시 가 집안 사람들은 아직 힘들어하는 아카시를 위해 어서 두 사람이 의식을 치루길 기대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 의식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인'의식은 파수꾼과 안내자, 두사람의 성관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마음가짐에 따라 어쩔 수 없으니까 성관계를 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쿠로코는 무척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의식을 주저했던 건 아카시가 남자이고 아직 미성년이란 이유보다 자신에게 평생을 약속한 아내가 있다는 이유가 더 컸다. 그 이유를 듣자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아카시도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망설이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탐색자는 결국 성관계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복잡한 또 다른 절차를 알려주었다. 그 방법은 서로의 정액을 마시고 충분한 시간까지 서로의 피부를 접촉하고 있어야 하는 것.
결국 그 방법대로 아카시와 쿠로코는 약수가 담긴 두 잔에 각자의 정액을 섞고 상대방의 것을 마시고 찝찝한 채로 그들은 하루 종일 손잡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약수에 탔다고 했지만 남의 정액을 마시는 경험은 그렇게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게다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준 안내자라도 처음 본 사람과 손을 잡고 있어야 했던 건 불편했다. 그래도 아카시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시장 안을 걸어가니 두통이 더 심해져서 속까지 메스꺼웠다. 음식 냄새가 가득한 식료품점 거리를 어서 지나가야 했지만 잊지 않고 만쥬 한 봉지를 사갔다. 자신이 산 건데도 달콤한 만쥬 냄새도 괴로워서 최대한 냄새가 나지 않게 봉지 입구를 여러번 접고 가방 안에 조심하게 넣었다.
잠시 후 식료품점 골목을 빠져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쿠로코의 집에 도착했다. 대문으로 집에 들어온 그는 그는 집주인를 부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장지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안에서 폭신한 다다미를 두드리는 가벼운 발걸음이 들렸다. 마구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발소리가 거의 없을 정도이지만 그의 귀에는 확실히 들렸다.
아카시가 가죽 구두를 벗기 전 쿠로코의 하나 뿐인 딸인 치요가 나타나 그를 맞이했다. 이 맘때 아이는 빨리 커서 몇달 전에 새로 산 분홍색 유카타가 조금 짧게 느껴졌다.
“아카시 님, 어서 오세요. 지금 아버지께선 주방에 있으세요.”
“치요, 오랜만이야. 그리고 이건 선물.”
허리를 겨우 넘는 여덟살짜리 여자애가 자신과 편하게 마주볼 수 있도록 허리를 굽혀 준 아카시는 집안에 들어오면서 시장에서 사온 만쥬 봉지를 가방에서 꺼내 아이에게 건네 주었다. 아이는 간식 봉지를 받고 제 어미를 닮은 얼굴로 밝게 웃었지만 이내 어쩐 일인지 조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주방에 있을 쿠로코가 갑자기 아카시 뒤에서 나타났다.
쿠로코는 특이하게도 존재감이 다른 이들보다 무척이나 적어서 파수꾼인 아카시도 집중하지 않으면 뒤에서 나타나는 그를 못 느낄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감각이 제일 예민할때라 쿠로코가 말을 꺼내기 전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습니다. 치요. 감사히 받아주세요. 그리고 아카시 군, 간식 같은 거 사오면 아이 버릇만 안 좋아진다고 말했잖아요.”
“이 만쥬가 여기서 제일 맛있대.”
무표정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잔소리하는 쿠로코에게 아카시는 살짝 웃으면서 말을 돌려버렸다. 최고의 파수꾼이라고 칭송받는 그의 어리광에 쿠로코는 한 숨을 쉬고 그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잡았다. 평소에는 붉은 색인데 지금은 노랗게 변한 왼쪽 홍채를 보다가 쿠로코가 잠깐 미간을 찌푸리고 자기보다 키 큰 그에게 상태를 물었다.
“오면서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긴 했는데, 지금 쿠로코 씨와 손 잡고 있으니까 괜찮아졌어.”
하늘과 맞닿은 바다색 눈동자로 언제나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아카시는 항상 고마워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젠 어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그에게 아카시는 기대고 싶은 마음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쿠로코가 잡아준 왼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따라 시원한 평온함이 전해지고 있어 그를 괴롭히는 두통이 사라지고 기분도 나아졌다. 그러나 우선 불상에 먼저 인사를 드려야 했기에 아카시는 그의 손을 잠시 놓아주었다. 대신 외투와 가방을 쿠로코에게 건네 준 그는 방 거실 한구석에 나무로 짠 작은 불상에 천천히 걸어가 그 앞에 앉았다. 불상 안에는 은색 향로와 작은 꽃꽂이 장식, 쿠로코 부인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패가 세워져 있었다.
살아 생전 그녀는 참 다정한 사람이라서 누구보다 쿠로코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불상 아래 서랍에 있는 향과 성냥을 꺼낼 때마다 남편의 파수꾼인 자신에게도 다정했던 그 미소를 떠올렸다.
향로에 향을 피운 아카시는 금색 작은 종을 들고 흔들어 그녀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그 다음 그가 합장을 하는 동안 종소리가 사라진 차분한 거실에는 은은한 향 냄새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을에 물들었다.
쿠로코는 그가 편한 검은 회색의 유카타를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 저녁상을 차렸다. 저녁은 돼지고기를 넣은 된장국과 생선구이, 야채절임이 있는 소박한 가정식이었다. 쿠로코 부녀와 마주 앉은 아카시는 앉자마자 그와 왼손을 마주 잡았다. 사실 한 손으로만 먹어야 하니까 이 자세는 불편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가시지 않는 두통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밥을 넘길 수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먹는 것도 벌써 몇 년째이라 아무렇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아카시와 쿠로코는 늘 그랬던 것처럼 계속 손을 마주 잡은 채 식기를 정리하고, 사온 간식을 셋이서 나누어 먹고, 치요를 재웠다. 그리고 그들도 책을 조금 읽다가 이부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카시 왼쪽에는 아까부터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쿠로코가 있었다.
능력제어도 의식처럼 성관계를 맺으면 하루를 불편하게 보낼 일이 없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에 그들은 계속 이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불편해도 아카시는 잔잔히 오는 평안함과 그의 온기가 더 좋았다.
촛불도 끄자 방안은 무척 어두워서 바로 옆에 있는 쿠로코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카시는 그에게 고개를 돌리고 인사했다.
“잘자, 쿠로코 씨.”
“아카시 군도 안녕히 주무세요.”
어둠 속에서 자신과 마주보는 시선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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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6. 16. 09:55[청흑] MAN IN THE EYES 4
[이 글은 '2014.06.15 청흑배포전'에 발행된 책의 일부입니다. 엔딩을 제외한 다른 본문은 공개합니다.]
2014.06.16
원래는 행사 하루 전에 올리려고 했으나 어떻게 하다보니 행사 다음날에 올리네요.
간단한 후기를 하자면 사실 인쇄된 책 색이 원래 파일이랑 완전 달라서 너무 속상했습니다ㅠㅠ
스루님께서 주는 표지는 민트가 섞인 예쁜 하늘색이었는데(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고요.)
근데 책이 코발트 블루로 나와서 ㅠㅠㅠㅠㅠ흑흑흑흑 다음에는 그냥 방문해서 뽑아야겠어요ㅠㅠ
그리고 예약을 구글로 해서 예약을 먹은 분들에겐 정말 죄송합니다. 구글이 다 먹어버릴줄은 상상도 못했네요ㅠㅠ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책이지만 완매해서 기쁩니다! 사주신 분들 복 받으실거에요!
며칠 전, 아오미네가 코치를 그만 두었다. 이유는 내년에 복학함에 따라 다시 농구부 선수로 들어가게 되어서 겨울 훈련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쿠로코는 그가 자신을 아직도 부담스러워서 이 참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쿠로코가 자신이 남자도 좋아할 수 있다는 건 깨달았다고 해도 그걸 아오미네에게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주 연락하고 얼굴을 내비치면 연인까지는 못 가도 친구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쿠로코가 다시 아오미네의 자취방에 갈 생각을 하던 중 다른 애들이 수다 떠는 소리가 멈춰졌다. 혼자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쿠로코는 왜 갑자기 그들이 그러는 지 몰랐다.
“저 사람 아오미네 아니야?”
후쿠다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 말하자 그쪽을 보고 있던 다른 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미네의 이름을 들은 쿠로코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보다 키가 큰 애들 사이 비집고 그들이 보는 곳을 보니, 그 곳은 러브 호텔들이 서있는 번화가의 뒷골목이었다. 길을 밝히는 불이라고는 화려한 네온 사인 밖에 없는 어두운 골목이라도 쿠로코는 단번에 아오미네를 찾을 수 있었다. 아오미네 옆에는 그에게 기대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것을 본 순간 자신의 발 밑에 블랙홀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아오미네 옆에 여자가 있다는 걸 본 다른 애들도 바짝 얼어 붙었다. 마른 침을 삼키고 있는 몇몇 애들은 고개마저 돌렸다.
“와, 대박. 지금 저 사람 저런 곳에 여자랑 있는 거 맞지?”
“애인 이겠지. 애인이랑 저런 데 가는 게 뭐가 이상하냐.”
“근데, 나 아오미네에게 애인 있다는 애기 못 들었는데.”
후리하타가 그렇게 말하자 애들의 볼은 더 상기되었다. 그들에겐 원 나잇 스탠드는 엄청난 자극이었다. 귀국자녀답게 아무렇지 않는 카가미가 애들에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자고 했지만 애들은 호기심에 쉽사리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오미네가 여자를 안고 러브호텔로 들어가기 전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결국 아오미네와 눈을 마주 친 애들을 화들짝 놀랐지만 정작 그는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기만 했지 그는 망설임 없이 여자와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랑 눈 마주쳤는데도 들어가네.”
“근데 사람 무시하는 거 같아서 좀 기분 나쁘다.”
“야, 아오미네는 처음부터 그랬잖아. 나중에 가서야 좀 친해진 건데.”
애들은 찝찝함만 남은 이 곳을 서둘러 빠져가려고 했다. 그때 카가미 발에 무언가가 차여서 밑을 보니 쿠로코가 웅크리고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당황한 카가미가 상체를 숙이고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그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다른 애들도 쿠로코가 걱정이 돼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결국 후리하타가 쿠로코처럼 웅크리고 그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놀란 눈으로 자신들을 향해 상체를 숙이고 있는 애들을 올려보았다.
“……울고 있어.”
후리하타의 말에 애들은 숨도 멈추고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 중에 카가미만 고개를 들어 그가 들어 간 러브호텔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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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6. 13. 11:55[청흑] MAN IN THE EYES 3
[이 글은 '2014.06.15 청흑배포전'에 발행될 책의 일부입니다. 엔딩을 제외한 다른 본문은 공개합니다.]
2014.06.13
이번 이야기는 학원스포츠물에서 빠질 수 없는 합숙 이야기입니다 헤헤헤헤
근데 합숙이라고 해봤자.. 그런거 없엉... 거의 훈련하고 밥먹고 그런것뿐이네요..
음..
* 실제 발행될 책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1군 선수들이 인터하이 본선을 치루는 걸 맞춰서 남자 농구부의 합숙 일정이 잡혔다. 이번 인터하이는 지방에서 개최해서 합숙지는 그 근처 바다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경기에 부담이 없는 2군 선수들은 합숙보단 놀러 간다는 느낌으로 신나게 준비했다.
하지만, 2군 코치인 아오미네는 혈기 왕성한 애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물론 그의 배후에는 포커 페이스가 무서운 이마요시 감독이 있었지만.
어쨌든 세 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자 아오미네는 2군 선수들을 모아두고 앞으로 있을 훈련에 대해 브리핑했다. 아침에는 해변가에서 조깅을 하고 오전 연습에는 빌린 체육관에서 개별 연습, 그 다음에는 오후에는 본선을 앞두고 있는 1군 선수들과 실전 연습을 하고 나면 저녁 먹고 야간 연습까지. 밥 먹을 시간만 빼면 쉬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야간 연습이 끝나자마자 바로 쓰려져 잘 기세였다.
감독은 인터하이 때문에 1군 선수 숙소로 가 있고, 코치도 모든 걸 건성으로 한다는 이미지가 강한 아오미네라서 2군 선수들은 몰래 빠져나가 놀 생각이었다. 합숙 계획표를 보고 실망한 2군 선수들에게 아오미네는 손에 들고 있는 노트를 뜯어서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그 종이에는 각자 부원들 위한 개별 연습 리스트들이 쓰여졌다. 노트에 아무렇지 않게 휘갈려 쓴 메모이나 찬찬히 살펴보면 각자 도움이 되는 연습들이었다. 언제 실력과 체력을 체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오미네는 2군 선수들을 하나한 신경쓰고 있었다.
쿠로코도 받은 메모를 찬찬히 보았다. 체력과 슛이 약한 그를 위한 연습들이 적힌 리스트에서 아오미네가 책상에서 이걸 적었을 모습이 떠올랐다. 쿠로코를 위한 연습 리스트를 짜면서 여러 번 그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아오미네의 글씨를 엄지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어쩌면 자신이 대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애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해변가로 집합했다. 그리고 도착한 전날에 브리핑한대로 2군 선수들은 줄을 맞추고 조깅 하기 시작했다. 선수들 옆에는 아오미네가 같이 뛰면서 호루라기로 박자를 맞추었다.
해변가를 3바퀴 넘게 쉬지 않고 뛰고 있자 하나 둘 씩 뒤쳐지는 애들이 생겼다. 해변가가 그리 길지 않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에서 뛰는 건 운동장에서 뛰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아직 두 바퀴 남았다. 이것들아. 다리랑 팔을 더 움직여!”
2군 선수들 옆에서 뛰면서 아오미네는 목소리를 높이고 소리쳤다. 그도 같이 쉬지 않고 뛰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큰소리를 내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호루라기까지 불었으면서도 숨이 찬 기색도 없었다. 애들은 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아오미네를 보면서 괴물이 따로 없다고 중얼거렸다.
네 바퀴 반을 넘어갈 때 쯤 쿠로코는 무리에서 떨어져 제일 뒤에서 뛰고 있었다. 이미 체력은 3바퀴 반으로 넘어갈 때부터 바닥을 드러냈다. 팔과 다리를 멈추지 말라는 아오미네 말 대로 억지로 움직이고 있었다만 그렇게 한 바퀴를 뛰니 이제는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거친 숨을 내쉬면서 뛰고 있던 쿠로코는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숨 쉬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는 이렇게 약한 체력을 탓하며 이대로 자고 싶었다.
그 때, 큰 손이 뒤로 쓰러지는 쿠로코의 등을 힘주어 밀었다.
“아, 오미네 씨.”
“테츠, 숨 쉬는 게 잘못 되었잖아. 입 말고 코로 들이마시고, 짧게 호흡해.”
이미 반 쯤 감긴 눈으로 왼쪽을 보자 가까운 곳에 아오미네가 있었다. 쿠로코를 한 손으로 밀면서 그는 옆에서 같이 뛰고 있었다. 마치 그게 신기루 같아서 자신이 드디어 천국에 왔다고 잠시 착각했다.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힘 들어서 호흡을 잘 하지 못하자, 그를 보면서 짧게 호흡하는 걸 보여주었다. 숨을 내뱉어서 달싹이는 입술을 따라 쿠로코도 코로 숨 쉬고 입으로 내뱉었다.
호흡을 맞추자 아오미네는 잘했다면서 오른손으로 쿠로코의 등을 원을 그리며 쓰다듬어 주었다. 그 느낌은 든든하고 편안했다. 쿠로코가 다시 앞을 보고 뛰고 있을 동안 아오미네는 멀찍이 앞에서 뛰고 있는 부원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뭐라고 말했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만지고 있는 아오미네의 큰 손을 느끼고 있었다.
합숙도 삼 일째 되니 어느 정도 체력이 붙어서 쿠로코는 식사 시간에 쓰러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피곤한 몸을 스트레칭해서 풀어준 그는 계속 가고 싶었던 주방으로 갔다. 2군 선수들이 있는 숙소에도 매니저가 왔지만 그녀 혼자 약 20인분을 만들 수 없어서 아오미네도 같이 만들고 있었다. 많은 양을 먹어야 해서 먹을 때마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음식 맛은 꽤 좋았던 걸로 기억했다.
음식 하는 아가씨 같은 아오미네를 상상한 쿠로코가 주방에 도착하자 저녁시간을 앞두고 매니저와 아오미네는 바빴다. 큰 중화요리 용 후라이팬을 들고 야채를 볶고 있는 아오미네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가 맺혔다. 그리고 무거운 후라이팬을 들고 있는 팔에는 검은 근육이 불끈 솟아 올랐다. 움직일 때마다 팔에서 검은 용이 날뛰는 것 같아서 쿠로코는 혼자서 이 멋진 모습을 봤을 매니저가 부러웠고 질투도 났다. 참 치졸한 마음이었다.
그런 자신이 조금 부끄러운 쿠로코는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삶고 있는 매니저에게 갔다. 뒤에서 인사 했을 뿐인데 매니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 질렸다. 덩달아 같이 놀란 아오미네가 매니저 옆에 있는 쿠로코를 보고 소리쳤다.
“기척 좀 내라고! 위험했잖아.”
“전 평범하게…….”
“전혀 평범하지 않아!”
자기가 기척을 못 느낀 거면서 성을 내는 아오미네에게 말대답하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갔다. 자기 옆에 온 그에게 아오미네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테츠 넌 가서 쉬라고. 안 피곤하냐?”
“저, 체력이 좋아서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쿠로코가 팔을 들어 나오지 않는 알통을 보여주고 말하자 아오미네는 코웃음 쳤다.
“아까 체육관에서 쓰려 졌던 게 누군데.”
체력이 좋아졌다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쿠로코는 쓰러졌다. 체력이 약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아오미네 앞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무리한 것도 있으니 반은 아오미네 탓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그가 알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시무룩해진 쿠로코는 주방을 나가지 않고 밥 많이 먹겠다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아오미네가 야채를 볶다 말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 나만큼 줄 거니까 다 먹어야 한다. 그래서 넌 뭘 잘하는데.”
“삶은 계란이요.”
쿠로코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아오미네는 다시 한 번 크게 웃고 그에게 삶은 계란을 맡겼다. 아오미네의 명령에 쿠로코는 그의 옆에서 계란을 정성스럽게 삶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는 돼지 뒷다리 수육, 아오미네 특제 야채 볶음과 함께 뜬금없이 삶은 계란이 나왔다.
모두 힘내서 연습하고, 인터하이에 출전한 1군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도와 식사를 만들어주고 있는 사이 어느 새 합숙도 마지막 날이 왔다. 그 동안 1군 선수들은 본선에서 선전했으나 8강 전에서 작년에 우승했던 R고등학교를 만나는 바람에 결국 준결승전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8강 전이 합숙이 얼마 안 남았던 때라서 마지막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래서 이마요시 감독은 마지막 날 저녁에는 연습을 없애고 1군과 2군 같이 바다에서 놀 수 있게 했다. 바다에서 놀 생각에 분위가 살았고 애들은 들떴다. 그런 애들이 이상한 데로 가서 미아가 되지 않도록 와카마츠 코치와 이마요시 감독도 같이 나갔다.
그러나 쿠로코는 나가지 않고 숙소에 남았다. 그리고 당연하게 아오미네가 바다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군인 카가미가 메일로 야시장에서 같이 놀자고 했지만 쿠로코는 적당하게 변명했다. 그도 기껏 바다에 왔는데 바다에서 놀지도 못하고 야시장에도 가지 못하는 건 아쉬웠다. 그래도 그 것보다 쿠로코는 아오미네 옆에 있는 게 더 중요했다.
저녁을 먹고 나가는 애들을 배웅했던 쿠로코는 일찍감치 씻으러 욕실로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욕실에 아오미네가 있는 거 아닐까 기대했지만 없었다.
그렇다면 숙소 어딘 가에 있을 거라 분명했다. 쿠로코는 나가서 그를 찾을 생각에 욕탕에 들어가지 않고 샤워만 했다. 대충 머리를 닦은 수건을 목에 걸고 은근슬쩍 아오미네가 묵고 있는 방에도 가보고, 로비에 있는 탁구장에도 가보았으나 쿠로코가 그를 발견한 곳은 민박집의 뒤뜰이었다. 뒤뜰에는 백열등 하나 밖에 없어서 어두운 편이었다. 그리고 벤치가 세 개가 있었는데 가운데 있는 벤치에 아오미네가 앉아있었다. 단번에 그를 발견한 쿠로코는 쪼르르 아오미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쿠로코가 일부러 헛기침도 하고 말하기 전 어깨를 톡톡 토닥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오미네가 놀라지 않고 쿠로코를 보았다.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뭐야, 테츠는 안 갔어? 바다에 왔는데 야시장에 가서 뒤풀이 정도는 해야지.”
“아오미네 씨는 왜 안 나가셨는데요?”
변명하기 귀찮아서 되물어보자 아오미네는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 귀찮아서 안 나갔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쿠로코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실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소소하고 특별할 거 없는 수다지만 쿠로코는 이 순간이 좋았다. 아오미네에게 처음 반하고 아침 연습 때마다 바랐던 순간은 어두운 밤에도 하늘색으로 빛났다.
이마요시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티셔츠의 목덜미가 꽤 젖은 걸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머리를 덜 말려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쿠로코가 목에 건 수건을 빼앗고는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
“아무리 더워도 머리는 말려야지. 여름 감기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아오미네의 손길은 거칠어서 쿠로코의 머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하도 흔들어서 어지럽고 머리카락이 빠질 것만 그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포근함이 너무 좋았다. 얼굴이 달아 올랐다. 아오미네가 제법 가까이 있어서 살짝 흥분되었다. 그래서 뒷산에서 풍겨오는 상쾌한 냄새가 그한테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은은한 비누 냄새. 만약 아오미네의 품에 안긴다면 그 냄새가 자신의 피부에 스며드는 걸까.
그렇게 상상하자 갑자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포옹하는 상상만 했을 뿐인데 반응하는 아들내미에 쿠로코는 당황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그는 서둘러 아오미네가 들고 있는 자신의 수건을 뺏었다.
“이제 다 말랐습니다. 수건 주세요.”
“테츠, 너는 은근히 옆에서 챙겨 줘야 한다고.”
개구지게 웃는 걸 겨우 참으면서 장난스럽게 위엄 있는 척 말하는 아오미네 말에도 쿠로코는 눈도 못 마주치고 알겠다고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 들키지 않게 수건을 뭉쳐서 다리 사이를 가렸다. 민박집 뒤뜰에 백열등 하나만 있는 게 다행이었다. 어두운 탓에 빨개진 목덜미와 어색해진 표정이 보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쿠로코의 머리를 툭툭툭 가볍게 치던 아오미네에게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기 위해 코치는 쿠로코에게 어서 들어가라고 말하고는 앞마당으로 걸어갔다. 그가 떠난 그 곳에서 쿠로코는 상체를 숙였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무릎에 뜨거워진 볼을 대보았지만 그래도 빨갛게 달아오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아, 어떡하지.”
점점 힘이 들어가는 아들내미처럼 애정도 같이 커져가고 있었다. 쾅쾅 울리는 심장소리가 가득한 뒷 뜰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겨우 진정시키는 동안 쿠로코는 벌써 아오미네와 같이 있던 이 밤이 그리워졌다.
합숙이 끝나니 여름 방학이 빠르게 지나갔다. 벌써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른 애들은 절망했다. 쿠로코도 여름 방학의 마지막 일주일이 싫었다. 그건 개학날까지 그 일주일 동안 부활동을 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일 봤던 아오미네를 일주일이나 볼 수 없다는 게 쿠로코는 아쉽고 아쉬워서, 침대에서 그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결국 쿠로코는 아무도 없는 학교로 갔다. 전에 아오미네의 집이 이 근처라는 얘기를 들어서 어쩌면 그가 저번처럼 산책하려 학교까지 올지도 몰랐다. 점심을 서둘러 먹고 학교에 도착하니 운동장을 가로 지르는 동네 고양이 말고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허전한 학교를 둘러 본 쿠로코는 정문에서 눈에 뜨지 않은 반면 정문을 볼 수 있는 식수대에 몸을 숨겼다. 만약 아오미네가 학교에 나타나면 우연을 가장해서 그와 만날 계획이었다. 그러다 오늘 못 만나면 내일이라도 다시 올 생각이었다. 식수대에 기대어 앉으며 왜 이렇게까지 하는 지 스스로 물어도 답은 정해졌다. 쿠로코는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끈질긴 사람이었다.
하늘색 세상이 기다리는 자에게 복을 주나니, 한 세 시간 정도 기다리자 정말로 아오미네가 학교로 왔다.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여서 스트레칭한 아오미네는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곧장 체육관으로 갔다. 쿠로코가 있는 식수대도 지나 그에게 등을 보일 때가 기회였다. 쿠로코는 재빠르게 일어나되 소리없이 아오미네를 향해 걸어갔다. 아오미네의 넓은 등이 제법 가까워지고 손을 뻗으면 그의 어깨에 닿을 수 있을 때, 갑자기 아오미네가 뒤 돌았다.
“역시! 이젠 이런 장난은 통하지 않는다고. 테츠.”
“딱히, 장난 친 거 아닙니다. 그나저나 제가 있었다는 걸 보셨어요?”
사실 속으로 무척 놀랐다. 그러나 다행이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별일 아닌 것처럼 그를 올려 본 쿠로코가 물어보자 아오미네는 단순하게 감이 왔다고 말했다.
“여러 번 당해보니까 감이 생기더라. 그러니까 뒤에서 나타나지 마라.”
“시야 안에 제가 있어도 보지 못하시면서.”
“아니, 이젠 잘 보여.”
닫힌 체육관 입구로 걸어가며 그냥 건넨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는 심장이 매우 두근거렸다. 본인은 알고 있을 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쿠로코의 심장을 바쁘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근거림은 아오미네도 자신을 좋아할 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다정한 아오미네를 향한 애정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 자리에 서서 맥박이 거칠게 뛰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가리고 있는 쿠로코를 아오미네가 불렸다.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려가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가보니 그의 손에는 체육관 입구 열쇠가 들려있었다.
햇빛을 가려서 시원한 체육관에 들어간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당연히 농구 연습밖에 없었다. 쿠로코야 정말 단 둘만 있는 체육관에서 반짝이고 깜짝 놀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회를 엿보긴 했지만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고 두 사람은 건전하게 농구만 했다. 체력이 깡패인 아오미네를 상대로 쉬지 않고 1대 1 농구를 하다보니 나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런 상상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정말 힘들어서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든 쿠로코가 쓰러지고 나서야 1대 1이 끝났다. 그래도 쿠로코가 제법 오랫동안 버티고 있어서 몸을 많이 움직인 아오미네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시원했던 체육관은 어느 새 후덥지근하고 땀 냄새 때문에 답답했다. 어서 샤워하고 나가고 싶은 건 아오미네도 마찬가지라서 그는 바닥의 껌딱지가 된 쿠로코를 잡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힘든 와중에도 아오미네에게 손이 잡혀서 좋았다.
체육관 한 쪽에 있는 샤워실로 힘들게 갔지만 애석하게도 샤워실은 낡은 샤워기와 수로를 교체 공사중이었다. 공사 중이란 안내문을 샤워실 앞까지 가서 봤으니 당연히 두 사람은 이 사실을 몰랐다. 샤워할 수 없자 쿠로코는 기분이 다운되었다. 모처럼 아오미네랑 같이 샤워해서 그의 근육질 몸매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물을 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어서 집으로 가야겠습니다.”
“어차피 내 자취방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샤워하고 가라.”
아오미네의 배려를 쿠로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 들었다. 그의 알몸을 보는 것 대신으로 자취방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정말 학교에서 가까운 자취방에 도착하자 아오미네가 쿠로코 보고 먼저 씻으라고 권했다. 그의 말에 쿠로코는 먼저 욕실로 들어가 기다리는 아오미네를 위해 후딱 샤워하고 왔다. 그가 옷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오자 아오미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팔짱을 끼고 쿠로코를 보고 있는 아오미네가 살짝 눈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테츠, 아예 자고 갈래? 옷 빌려 줄게.”
나쁜 짓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한 그 제안에 쿠로코는 역시 거절하지 않았다. 자취방에 놀려가는 것까지 생각했지, 여기서 둘이서 같이 자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오미네는 언제나 쿠로코의 기대와 바람을 넘어섰다. 그래서 결국 자신에게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본의 아니게 아오미네는 교활했으나 쿠로코는 그런 그가 언제나 좋다. 이젠 좋다는 말이 지겨울 정도로.
쿠로코가 옷을 빌려 다시 갈아 입을 동안 아오미네도 샤워했다. 그는 위에는 아무 것도 안 입고 반 바지만 입고 나왔는데 덕분에 몸매를 감상하는 것도 이루었다. 쿠로코가 지금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어깨 근육부터해서 오밀조밀하게 예쁘게 자리 잡은 복근을 보고 만지고 싶다고 느끼는 반면, 아오미네는 보통 체격인 쿠로코에게 자신의 옷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
“바지가 흘러내리거나 하지 않지?”
“조금 크기는 하지만 흘러내릴 정도는 아닙니다.”
쿠로코의 말에 아오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 생각이 없는지 그는 밥을 차리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남자는 상대방이 자기 옷을 입어주는 것에 두근거린다고 하던데 아오미네가 별 반응이 없으니 쿠로코는 아까부터 두근거렸던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괜히 자신이 아오미네의 친근함에 괜히 착각했던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저녁은 간단하게 냉동식품으로 때웠다. 그리고나서는 스포츠채널에서 해주는 NBL하이라이트를 보면서 떠들거나 영화를 보는 둥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간에 영화가 지루했는지 아오미네는 소파 밑에서 잡지를 꺼냈는데 그것은 그라비아였다. 옆에 고등학생이 있는데도 거리낌없이 보고 있었다. 쿠로코는 그걸 보고 뭐라도 태클을 걸까 했지만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오미네가 여자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았으니까. 다시 시선을 돌린 헐리우드 영화 속 연인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지막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과연 쿠로코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자정이 넘어가자 아오미네와 쿠로코는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자취방은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원룸이라서 침대는 바로 옆에 있었다. 그의 침대는 퀀사이즈로 혼자사는 사람의 침대치고 컸다. 어쩌면 둘이서 침대에 자는 것도 가능할지도.
“너 혹시 침대 아니면 못 자는 파이냐?”
사실은 상관없어서 합숙 때 잘 잤지만 혹시나 하는 맘에 쿠로코는 철면피 깔고 그렇다 대답했다. 그러자 아오미네가 심각한 눈으로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표정에 쿠로코는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하고 같이 침대에서 자자고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아오미네가 이불장에서 겨울 이불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바닥에 겹치게 깔고 또 그 위에 자기가 덮을 이불도 깔았다. 이불 세 개 때문에 침대보다 푹신해 보이는 바닥이 뿌듯했는지 아오미네는 짜잔- 두 팔을 벌렸다.
“이러면 아오미네 씨가 덮을 게 없잖아요.”
“난 괜찮아. 몸에 열이 많아서 원래 잘 안 덮고 자. 이불을 깔았더니 힘드네. 어서 자라.”
일부로 힘든 일 하지 않았어도 됐는데. 그렇게 생각한 쿠로코는 원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아오미네가 덮으라고 건네 준 얇은 이불을 안고 이불 세 개가 깔려진 바닥에 앉았다.
쿠로코가 푹신한 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고 나니 이윽고 방 불이 꺼졌다. 어두운 곳에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발걸음 소리와 침대 매트리스를 누르는 소리, 이불이 비벼지는 소리만 들렸다. 쿠로코는 눈을 감고 청각과 후각에 집중했다. 멀리 있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합숙 때 맡았던 그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좀 더 가까이 있었다면 숨소리도 그 냄새도 느낄 수 있을텐데. 가까이 있는 아오미네가 지금은 어느 때보다 멀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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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6. 12. 15:14[청흑] MAN IN THE EYES 2
[이 글은 '2014.06.15 청흑배포전'에 발행될 책의 일부입니다. 엔딩을 제외한 다른 본문은 공개합니다.]
2014.06.12
이부분을 쓸 땐 연성으로나마 쿠로코의 소원을 이루어준 것 같아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헤헤-
그리고 이마요시 선배의 사투리는 어렵네요
*발행 될 책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틀 날, 쿠로코는 점심 시간에 다짜고짜 감독을 찾아갔다. 이 학교에서 아오미네를 잘 아는 사람은 그와 같은 T고등학교출신이자 선배인 이마요시이었다. 와카마츠 코치도 아오미네의 선배이지만 그에게 아오미네의 이름 두 자를 꺼내는 순간 땅 하늘이 뒤흔들 정도로 화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까이 가기 꺼려져도 감독에게 갈 수 밖에 없었다.
점심을 빵으로 간단하게 먹은 터라 쿠로코는 감독이 오기 전에 교무실에 들어가 그의 자리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동료 교사들과 같이 들어 온 이마요시는 가는 눈을 접고 너털웃음으로 쿠로코가 있는 자기 책상으로 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하이고, 니 기척 좀 내고 다니래이.”
책상을 보면서 오고 있었음에도 쿠로코를 보지 못했는지 감독은 눈을 뜨고 놀랬다. 그런 감독의 반응에 쿠로코는 되려 화가 조금 났다. 그 바람에 목소리도 덩달아 낮아졌다.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 그렇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고.”
감독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쿠로코에겐 아직 돌아오지 않는 동료 교사의 의자를 권해주었다. 조금 있다가 그 교사가 돌아올 것은 예감에 쿠로코는 망설였지만 계속 서 있는 건 다리가 아프므로 두 번은 주저하지 않았다. 쿠로코까지 자리에 앉자 이마요시는 턱을 괴고 그에게 어서 말해보라는 식으로 턱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아오미네 씨가 왜 농구를 싫어하는 척을 하는 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이번이야말로 농구부를 그만 둔다 말하려 온 줄 알았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으니 걱정마세요.”
표정이 잔뜩 굳은 쿠로코가 되 받아치자 감독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특유의 웃는 표정으로 속마음을 감춘 감독은 농담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아무튼, 쿠로코 군이 은제 우리 후배님이랑 친해진기가?”
감독의 말을 바로 긍정할 수 없었던 쿠로코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아직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쿠로코의 반응에 감독은 알겠다며 자신이 알고 있는 아오미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자기도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가 처음 아오미네를 만났던 건 T고등학교 감독을 따라 아오미네의 모교인 T중학교를 찾아 갔을 때라고 했다. 그때부터 이미 아오미네는 다른 선수들보다 실력이 뛰어나서 성격은 오만했고 농구 하는 걸 귀찮아 했다. 심지어 T고등학교에 온 이유도 시합은 나가되, 연습을 안 하겠다는 조건으로 들어왔댄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에도 아오미네는 고교 농구의 전설이자 폭군이 되어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감독은 대등한 실력의 호적수가 없었기에 그가 농구에 더 이상 흥미를 가지 못했고 하면서 싫어하게 된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다 대학에 올라와서도 농구 선수로서 활동했다가 그만 어깨 쪽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부관절와순 파열이었다고 하는데 수술할 정도가 아니라서 휴학을 하면서 재활치료를 하고 있던 중 이참에 지겨운 농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반대했었고 아오미네의 선배인 감독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감독은 그가 다시 코트로 돌아가길 위한 마음에 잠깐이라도 여기 와서 코치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아, 그래도 걱정 말래이. 그 점마에겐 월급 같은 건 없다.”
묵묵히 감독의 말을 듣고 있던 쿠로코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쿠로코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고 아오미네의 어깨는 괜찮냐고 물어보자 감독이 크게 웃었다.
“어깨는 이미 다 나았제. 회복력도 괴물같아 갔고 금방 낫드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후에 뵙겠습니다.”
쿠로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감독을 알겠다며 어서 가보라고 인사했다.
“아 참,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기가?”
감독의 말에 쿠로코는 가다 말고 다시 그를 뒤돌아 보았다.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어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감독은 알겠다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니는 누구보다 끈질기는 사람이니 기대하고 있겠데.”
감독과 면담을 하고 난 뒤 열흘이 지난 날, 쿠로코가 아침 연습때 와 있는 아오미네에게 승부를 걸었다. 이젠 아무도 도전하지 않을 것 같던 승부를, 의외의 사람이 나서자 부원들은 연습을 하다 말고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와카마츠 코치가 입을 벙긋거리면서 말을 더듬고 분위기 수습하지 못할 동안 마침 그 곳에 있던 감독은 쿠로코와 아오미네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동안 고민해서 낸 결론이 저런 거였다는 점에서 그는 쿠로코가 꽤 저돌적인 성격임을 깨달았다. 과연 농구부원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딸리는 쿠로코가 어떻게 아오미네를 이길 지도 궁금해서 흥미도 생겼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저는 혼자서 아오미네 씨를 이기는 건 힘드니 2대 2 승부로 하게 해주세요.”
“네 주제를 잘 아네.”
“네.”
쿠로코가 그의 말을 인정하자 아오미네는 그를 빤히 보았다. 감정을 읽기 힘든 멍한 두 눈은 아오미네를 향해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악당처럼 웃으면서 쿠로코의 제안을 받아주었다.
“네가 누구를 데려오든 상관없으니 그냥 2대 1로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난 혼자가 더 편해.”
“뭐?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아오미네의 말에 오히려 다른 곳에 있던 카가미가 성냈다. 쿠로코가 카가미를 보고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카가미가 그의 히든카드이었던 모양이다. 부원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느낀 카가미는 그제서야 자신이 바보짓을 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쿠로코는 한 숨을 쉬고 다시 아오미네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나중에 후회하셔도 위로해드리지 않습니다.”
“너나 나중에 울지 말라고.”
승부는 그로부터 이튿날이 지나고 방과 후 오후 훈련이 시작하기 전 치루게 되었다.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 밤처럼 어두워지더니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폭격기라도 맞는 것처럼 엄청난 소리가 울려퍼지는 체육관의 코트 안에는 그때 알려졌듯이 역시 쿠로코와 그와 같은 반 친구이자 1군 선수인 카가미가 서 있었다.
아직 아오미네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체육관 안에는 1군, 2군 할 것 없이 대부분 부원들이 서둘러 와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체육관에서 도전자인 쿠로코와 카가미만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굳게 닫혀있는 문이 열리자 모든 부원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하지만 아오미네가 아니라 무수한 시선에 놀란 와카마츠 코치와 감독이었다. 감독은 웃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코트 한 가운데에 있는 카가미와 쿠로코를 보았다. 쿠로코와 카가미가 시선을 느끼고 마주보자 감독은 손을 흔들고 웃어주었다. 그리고 코치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는 그를 쿠로코가 빤히 지켜보았다.
비웃고 있는 건지, 힘내라고 응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보니 조금 불안하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이기든 지든 아오미네와 쿠로코의 지루한 관계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쿠로코는 이왕이면 아오미네에게 이기고 싶다. 그건 남자로서 자존심이었다.
체육관 가까운 곳에서 큰 번개가 내리쳤다. 번쩍하는 사이에 체육관 문이 다시 열렸다. 천둥소리와 함께 들어 온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제일 기다리던 아오미네였다. 무시무시한 등장에 체육관 문 옆에 있던 부원들이 지레 겁을 먹었다.
아오미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 미소로 코트 안으로 걸어왔다. 거기에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에 검은색 후드집업까지 입었으니 가히 악당이라고 할 수 있을 비주얼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워밍업은 필요 없으세요?”
“그런 건 하면서 해도 되잖아.”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내려보면서 말하자 옆에 있던 카가미가 다문 치아사이로 뭐라 중얼거렸다. 아마 귀국자녀답게 영어로 말했는데 정확한 뜻은 몰라도 느낌상 욕같았다.
심판 역할을 할 부원 하나가 공을 들고 세 사람이 있는 코트 안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그가 와서 해주는 건 호루라기로 경기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것뿐이었지만. 다소 긴장한 모습의 심판은 점프볼을 할 아오미네와 카가미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공을 높이 던졌고 동시에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오미네가 호언 장담을 했듯이 그를 상대하기에 카가미와 쿠로코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경기는 아오미네와 카가미의 1대 1로 치우쳐진 바람에 두 사람보다 실력이 턱없이 부족한 쿠로코는 그 사이에 끼지도 못했다. 부원들은 코트에서 힘없이 돌아다니는 쿠로코를 보면서 왜 나섰는지 비난했다. 각오가 좋다 한 들 실력이 안 되면 결국 계란에 바위치기 밖에 되지 않았다.
경기가 진행 될 수록 카가미는 아오미네를 상대하기 버거워 했다. 전국을 뒤져봐도 흔치 않은 수퍼루키라고 해도 아오미네와의 나이 차만큼 실력이 차이나는 건 당연했다. 아오미네가 카가미의 디펜스를 무너트리고 한 골씩 넣어감에 따라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
아오미네도 그와 경기를 하면서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받은 도전에 심장이 두근거리긴 했었다. 자신을 즐겁게 해줄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지만 경기 시작부터 이미 저버렸다. 이제 경기를 끝내고 싶은 아오미네는 마지막 한 점을 위해 디펜스하러 온 카가미를 페인트로 제치고 골 대로 달려 갈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그 순간 아오미네 손에서 공이 사라졌다. 놀란 아오미네가 자신의 손을 보는 사이 그의 손에서 떠난 공을 받은 카가미가 프리스로 라인 안쪽에서 점프해 덩크슛을 때려넣었다. 그가 강한 힘으로 넣은 공은 세게 코트 바닥을 쳐서 천둥같은 소리를 냈다.
아오미네만 놀란 게 아니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다른 부원들도 다 같이 놀랐고 그제서야 그들은 아오미네 뒤에 쿠로코가 있었는 걸 보았다. 그가 뒤에서 아오미네의 공을 스틸해서 카가미에게 패스 했던 것이다. 근데 그랬던 걸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아오미네 옆에서 카가미와 쿠로코가 주먹을 맞댔다. 아직도 공이 사라진 느낌이 가시지 않는 손을 주먹 쥐면서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방심을 한 나머지 경기 하는 동안 제일 중요한 사람을 잊고 있었다. 그 장난같은 기술은 제법 얄궂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쿠로코와 눈이 마주친 아오미네는 그의 스틸에 조소를 날려주었다.
쿠로코에게 스틸을 당한 게 억울했는지 아오미네는 더욱 두 사람을 밀어 붙었다. 이번에는 카가미만 아니라 쿠로코도 나름 놓치지 않아서 아까와 같은 스틸은 할 수 없었다. 결국 카가미를 주축으로 그들은 아오미네를 마크했다. 아까의 덩크로 기세가 올라간 카가미가 더 밀착해서 마크하는 바람에 아오미네는 또 다시 쿠로코에게 공을 스틸 당했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아까처럼 멍하니 있지 않고 바로 쿠로코를 따라가 그의 앞에 섰다.
“아까는 멋있어. 하지만 그게 전부이겠지.”
“죄송합니다만, 하나 더 남았습니다.”
아오미네의 도발에 쿠로코는 단박에 받아쳤다. 더 보여 주겠다는 뭔지 짐작이 안 되는 이쪽으로 마크하러 온 카가미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았을 땐 이미 쿠로코는 그 자리에 없었다. 파악하기도 전에 뒤에서 공이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뒤 돌아보니 쿠로코가 골대를 향해 드리블하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쫓아갔지만 쿠로코가 3점 라인에서 슛을 던졌다. 아무래도 빠르게 자신에게 오는 아오미네에게 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 던진 모양이지만, 슛의 궤도와 폼으로 가늠하면 그의 슛을 성공하지 못한다.
이미 골대에서 멀어진 공을 보면 아오미네는 쿠로코도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카가미가 골밑에서 점프해 골대에서 멀어지는 공을 잡아 그대로 덩크했다.
앨리웁. 흔하게 나오지 않는 기술을 지켜 본 부원들은 환호했다. 깔끔하게 그물 안으로 들어 간 공을 보며 아오미네는 두 사람의 연계플레이에게 졌다고 인정했다. 그 연게 플레이의 시작은 존재감없는 쿠로코로부터 나왔다.
이윽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결과로 보면 초반에 골을 많이 넣은 아오미네의 승리이었지만 본인은 이번 경기를 졌다고 생각했다. 카가미와 쿠로코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두 사람은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원들은 그 경기를 보면서 아오미네가 실력이 월등하긴 월등하나 역시 그도 2대 1은 무리였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쿠로코의 파트너로 같이 나간 카가미는 본인 모르게 1학년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렇게 쿠로코는 잊혀졌지만 그는 평가절하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보는 아오미네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게 중요했다.
경기가 끝나자그는 잠깐 부실에 갔다오기 위해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어느 새 우중충했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뭉게구름 너머로 하늘색이 빛났다.
여름 방학을 앞둔 어느 날, 아침 일찍 온 아오미네가 와카마츠에게 갔다. 코치는 아오미네가 자신에게 시비라도 거는 줄 알고 만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에게서 훈련 계획표를 받아갔다. 그 검은 손에 잡힌 하얀 종이를 본 코치를 비롯한 그 곳에 있던 1군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아오미네는 스스로 2군 코치가 되었다.
쿠로코와 승부가 그 마음의 무언가를 자극했는지 아오미네는 그 날 이후로 달라졌다. 승부에서 한 점을 내준 게 엄청난 변화를 불려 일으킬만한 일이었나 싶었지만 그래도 그가 좋은 쪽으로 변한 건 농구부에게 다행이었다.
아오미네는 코치를 맡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지시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2군 선수들 앞에서 멀뚱하게 훈련 계획표를 쳐다보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쉽게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인지 결국 와카마츠 코치가 저쪽에서 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멋지게 농구 할 때와 달리 코치 하는 건 버벅거리는 모습에 2군 선수들은 못마땅하고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나 그 중에 쿠로코는 콩깍지가 단단히 쓰여서 그 모습도 좋았다. 뚱한 표정은 여전하지만 뭔가 머리를 긁적이고 매끈한 이마에 땀 한 방울이 맺힌 모습이 귀엽게만 보였다. 이왕이면 또 한번 같이 농구하고 싶었지만 아침 연습이니 오후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잠시 후 아오미네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호루라기를 불자, 2군 선수들은 대답하고 1군 선수들 보다 좀 늦게 연습을 시작했다. 어차피 대부분 체력 운동 뿐인 아침 연습의 레파토리는 매일 매일 비슷해서 아오미네가 이상하게 지시해도 다 들 알아서 맞는 순서로 연습을 진행했다.
연습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가자 다들 연습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쿠로코도 25m 번갈아 뛰기를 20번을 하는 동안 이 곳에 아오미네가 있었던 걸 잠시 깜박 했었다. 속으로 스스로 바보라고 한 그는 자리로 돌아가면서 슬쩍 아오미네를 보았다. 그는 목에 호루라기를 걸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손에 든 하얀 종이까지 보니 겉모습으로는 코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아오미네가 진지한 눈으로 2군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게 멋져 보여 쿠로코는 힘든 것도 잊었다.
그러다 아오미네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앞만 빤히 보았다. 왼쪽 뺨에서 아오미네의 시선이 느껴졌다. 꽤 강한 시선에 심장이 무척 두근거렸고, 볼에는 열기가 올라왔다. 아오미네는 계속 쿠로코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보고 있을 줄 몰랐던 터라 더 열이 오르고 머리 위에서 김이 폴폴 생겼다. 아오미네가 2군 코치로 와 준 건 하늘을 날아 갈 만큼 좋았지만 심장에는 좋지 못했다.
“너, 열 배출이 잘 안 되는 타입이냐?”
“네?”
오후 연습이 끝나고 또 개별 연습을 하고 있는 쿠로코에게 아오미네가 대뜸 물었다. 마침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어서 쿠로코는 대답하다가 하마터면 사래 걸릴 뻔 했다. 미쳐 삼키지 못한 이온 음료가 입가 흘려서 다급하게 닦은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있던 아오미네가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의아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근데, 아침 연습때 얼굴이 꽤 빨갰다고. 아마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곧 무더위가 올 거니까 조심해라.”
아무래도 쿠로코가 아오미네의 시선을 느끼고 얼굴이 빨개지는 거 보고 그렇게 착각한 모양이었다. 눈치 못 챈 아오미네가 서운하면서 오해한 게 다행인 쿠로코는 시선을 살짝 내리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 한 파트가 끝나고 무의식적으로 아오미네를 보니 이번에는 와카마츠 코치가 준 훈련 계획표를 보고 있었다. 아침에는 한 장이었는데 나중에 다른 것도 받았는지 여러장이었고 파일에 철해 있었다. 다른 계획표를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오미네에게 쿠로코는 말 없이 곁으로 갔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끼약! 기척 좀 내고 다녀!”
“평범하게 왔을 뿐인데요.”
깜짝 놀란 아오미네가 못마땅한 쿠로코가 눈에 힘을 주고 대답하자 돌아 온 건,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잔소리였다.
“아무튼 잘 왔다. 이거 어떤 훈련이냐? 이렇게 쓰여서 전혀 알아보기 힘들다고.”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올려보며 훈련 계획표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잠깐 숨이 멈추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이 검은 남자가 하루가 다르게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동공도 작아서 삼백안인 그가 결코 선한 인상이 아닌데 왜 올려보는 그 눈동자가 달빛에 비춰보는 사파이어처럼 예뻐 보이는 걸까.
그에게 새삼 다시 반해서 멍하니 있는 쿠로코에게 아오미네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물어보았다. 짜증이 가득한 낮은 목소리에 정신 차린 쿠로코는 훈련 계획표를 보았다. 그가 단단한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는 약자를 보면서 이건 2대 1 속공 연습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그가 가리키는 약자들을 차례대로 쓰리맨 패스 연습, 쓰리포인트라인 디펜스 연습, 슛팅과 리바운드 연습이라고 알려주자 표정이 밝아졌다.
“오, 고마워. 어쩐지 너는 이것 저것 잘 알 거 같았다니까. 매니저 애들은 나보고 무서워 하는 데 넌 좀 편하다.”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향해 개구지게 웃어주었다. 그 모습은 정말 귀여워서 쿠로코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한 눈을 가렸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지 않으면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지도 모를 쿠로코는 다시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오미네가 빠른 걸음으로 가는 쿠로코 등을 향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동안 옆에 있었는데도 이름도 몰란 그에게 실망함이 들자 그나마 두근거리던 심장이 잦아 들었다. 그는 고개만 돌리고 이름을 말해주었다.
“몇 번이고 말했어요.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편한대로 쿠로코라고 불러주세요.”
“응 그래, 테츠.”
1분도 안 돼서 서운한 마음이 푸른 봄 바람을 맞는 눈처럼 녹아버렸다. 아오미네가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려주었다. 그것도 애칭으로. 말한 아오미네는 아무렇지 않아서 다시 훈련 계획표를 보고 있는데, 정작 불린 쿠로코는 머리에 열이 올라서 당황했다. 대답도 못하고 목이 꺾일 정도로 시선을 돌리고 코트로 뛰어갔다. 뛰어가는데 걸음마저 꼬였다. 쿠로코는 그에 불린 테츠라는 애칭이 그렇게 예뻤다는 걸 오늘이야 깨달았다.
여름 방학이 시작해도 훈련을 계속 되었다. 아오미네는 여전히 대충 하고 있으나 그 동안 코치 하는 실력도 제법 늘어나, 2군 선수들을 비롯한 모든 농구부원들도 이젠 아오미네를 코치로서 인정했다. 대학 농구 선수라서 실전 연습에는 진지하게 하다 보니 그에 대한 인상이 바뀌고 있는 애들도 늘었다. 아오미네가 어엿한 농구부의 일원이 된 건 쿠로코에게도 기쁘지만 그가 다른 애들에게 관심을 받고, 관심을 가지는 모습은 조금 질투심이 생기도 했다. 그 전에는 쿠로코만 그의 매력을 알았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도 알아버려서 더 이상 자신만의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질투심을 드러내지 않고 감출 수 있는 건, 아오미네가 궁금한 게 생기면 제일 먼저 쿠로코에게 물어보기 때문이었다. 농구부에 매니저가 없는 것도 아닌데 쿠로코가 더 편해서 그런지 웬만한 건 그에게 물어보고 확인했다.
하루는 와카마츠 코치가 훈련하고 있는 쿠로코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면서 귀찮게 하지 말라고 잔소리했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오히려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보면서 이렇게 대답해다.
“그야 이 녀석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그리고 테츠가 훈련하는 데 전혀 방해 되지 않으니까 그쪽 애들이나 신경 쓰시지.”
그런 아오미네의 태도에 결국 와카마츠 코치가 그와 1군과 2군의 자존심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작은 소동에도 쿠로코는 계속 자신을 애칭으로 불려주는 아오미네 덕분에 세상을 다 가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농구부 중에서 아오미네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은 쿠로코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바닐라 쉐이크 맛이 나는 하늘색 세상은 매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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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4. 6. 11. 21:54[청흑] MAN IN THE EYES 1
[이 글은 '2014.06.15 청흑배포전'에 발행될 책의 일부입니다. 엔딩을 제외한 다른 본문은 공개합니다.]
2014.06.11
간만에 내보는 청흑책입니다. 표지를 스루님께서 그려주셔서 저는 이미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스...
실제 책과 조금 다들 수 있습니다.
조금 뜨거워진 햇빛에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쿠로코는 고개를 돌려 알람시계를 보았다.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을 5시. 지금 다시 자면 앞으로 약 20분은 더 잘 수 있지만 그는 그 대신 시계 옆에서 충전하고 있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불을 조금 얼굴 위까지 끌어올린 다음, 그는 이불 속에서 핸드폰 버튼은 여러번 눌러서 사진 폴더에 들어갔다. 핸드폰 사진 폴더 안에는 약 두 달 전에 새로 부임된 코치인 아오미네 다이키의 사진이 꼭꼭 숨겨져 있었다.
멀리서 몰래 찍은 거라 그가 작게 보이는 사진에는 잘 빚은 팔근육과 매끈한 목덜미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피부도 까만데가 인상도 험악하지만 찬찬히 보면 이목구비가 잘생긴 그의 얼굴도 작게 보여서 애간장을 타게 만들었다.
시간은 5시 5분.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으나 쿠로코는 자리에 일어나 알람을 미리 꺼두었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면실에 들어갔다. 그가 이렇게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일어나게 된 건 벌써 한 달 전부터였다.
농구부활동 때문에 일찍 등교하는 쿠로코 주위에는 다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골목은 조용했고 탁 트이는 그 곳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꽤 더워진 아침에 부는 이 달콤한 바람은 자유롭게 농구하던 새 코치와 닮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쿠로코는 아침부터 기분이 하늘색 속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조금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에 맞춰 그는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농구부가 쓰는 체육관에 제일 먼저 도착한 쿠로코는 당번들이 근처 화단에 숨겨둔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옷 갈아입고 나오니 그제야 다른 부원들이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대부분의 부원들은 존재감이 옅은 쿠로코가 체육관 한 가운데에 있어도 거기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다. 그래서 매번 그 특기를 이용해 부실로 가는 그들 뒤에서 스윽 나타나 갑자기 인사해 놀래키면 그때부터 아침 연습이 시작되었다.
쿠로코가 다니는 S고등학교의 남자 농구부는 다른 유명한 학교들에 비하면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그래도 1군과 2군이 나누어져 있긴 한데 아침 연습은 주로 체력을 기르고 몸을 만들기 위한 훈련들이 많아서 1, 2군 모두 같은 훈련을 했다.
2군 선수인 쿠로코가 같은 반 친구이자 1군 선수인 카가미와 같이 훈련하고 있다 보면, 연습이 끝날 무렵에 어슬렁어슬렁거리면서 새 코치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나타나자 시끄러웠던 부원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내 다시 훈련에 집중했지만 어느 부원도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를 맞이하는 건 원래 있던 코치인 와카마츠의 잔소리뿐이었고 아오미네는 언제나 그를 무시했다.
부원들이 떠들고 공을 튀기는 소리에 시끄러운 체육관 안에서 아오미네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무심한 눈으로 애들을 바라보았다. 그 의자는 항상 그가 앉는 의자였다. 그래서 미리 그 근처에 있던 쿠로코는 카가미와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그에게 다가갔다. 카가미는 남들이 알아주는 바보라서 쿠로코가 원하는 대로 잘 따라 유인 당해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코치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카가미의 시선을 느낀 코치가 눈을 마주보자 그는 서둘러 다른 애들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카가미에게 버려져 홀로 남은 쿠로코는 들고 있는 공을 안고 아오미네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개를 돌린 코치에게 천천히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오미네 씨.”
“그래.”
쿠로코가 수줍은 마음을 감추고 건넨 인사에 그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약간 호흡이 들어간 낮은 목소리가 소름이 돋았다. 목소리가 섹시한 그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이마요시 감독이 집합하라고 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렇듯 매일 아오미네에게 짧은 인사밖에 건네지 못했다. 그거라도 좋다고 하면 좋은 거지만.
부원들이 수업을 위해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고 체육관을 나가는 동안 아오미네는 계속 그 의자에 앉아있었다. 자기가 가르쳐야 할 애들한테 눈길도 주지 않는 그는 그저 공을 튀기고 있었다. 쿠로코 주위에 있는 다른 부원들이 시끌시끌 떠들었지만 그에겐 아오미네가 튕기는 공 소리만 들렸다. 그의 바닐라 쉐이크맛이 날 것은 하늘색 세상에는 오직 아오미네만 있었다.
아오미네 다이키는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에 부코치로 부임 되었다. 이미 농구부에는 와카마츠라는 코치가 있었으나 감독의 권유로 잠깐 코치직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첫인상은 무척 강렬했다. 시커먼한 피부색에 엄청난 큰 키는 일본인보단 흑인처럼 보여서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농구 최강자라고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관심 없다는 눈을 하고 있는 채 자기가 가르칠 어린 제자들을 보지도 않는 심드렁한 표정까지. 쿨 한 매력을 동경할 사춘기인 부원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감독의 후배라는 아오미네는 정말 자신이 가르쳐야할 애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예 의지도 없어서 애들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농구를 하는 것도 싫어했다. 어차피 그 말고도 와카마츠 코치가 따로 있으니까 도대회를 준비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 온 코치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던 애들은 만만치 않게 실망했다. 한창 피가 끓는 남자부원들은 그가 체육관에서 빈둥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실력보단 감독의 고등학교 후배라서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실망을 넘어 분노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부원들은 아오미네를 상대로 일대일 승부를 걸었다.
맨 처음은 가장 코치를 싫어했던 아이가, 그 다음은 가장 승부욕이 강한 아이. 그렇게 여러 명의 열혈남아들이 그와 승부했지만 어느 한 명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농구부 에이스도 승부했지만 그 또한 이길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아오미네는 농구에 있어 위압적인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게 코치에게 바락바락했던 부원들의 의지는 결국 꺾여서 더 이상 그와 승부하겠다는 애들은 없었다.
부원들 중에서 가장 농구를 못하지만 가장 성실한 쿠로코 또한 처음에는 자신과 반대로 불성실한 아오미네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다른 부원들과 일대일 승부를 하는 코치의 플레이를 보고는 마음이 점점 달라졌다. 함부로 따라갈 수 없는 빠른 스피드와 멋지게 발달된 육체에서 발산하는 압도적인 파워. 그럼에도 유연한 움직임이 보여주는 화려한 플레이에 쿠로코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다 주전 센터와 일대일 승부에서 센터의 블록을 힘으로 밀어붙여서 기여코 덩크슛을 성공시킬 땐 그는 쿠로코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 되었고, 쿠웅하고 코트를 울릴 정도로 강하게 착지한 아오미네의 넓은 등을 보는 순간 쿠로코는 애석하게도 사랑에 빠진 가여운 남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짝사랑은 한 달 째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침 연습때처럼 겨우 인사를 먼저 건네는 정도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그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 아니고 오히려 마이페이스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아예 관심도 안주고 마음을 닫고 있으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럴수록 감질났다. 설령 좋아한다는 마음을 고백할 수 없을지라도 친해지고 싶은 쿠로코는 아오미네와 소소한 대화라도 하고 싶었다.
***
얼마 안 남은 도대회를 위해 1군 선수들은 체력을 비축하고 있어야 해서 요즘에는 오후 연습만 하고, 개별 연습은 하지 않도록 했다. 그 덕분에 쿠로코는 큰 체육관 하나를 혼자서 독차지 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오후 연습이 끝나도 남아있는 1군 선수들 때문에 2군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체육관에서 개별 연습하지 않는 게 부원끼리의 약속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이고 속마음은 어차피 취미로 하는 거니까 다들 적당히 하자는 게 암묵적인 이유였다. 그런 약속 때문에 체육관에 남아서 연습하고 싶었던 쿠로코는 아쉽지만 그동안 체육관이 아닌 동네 안에 있는 야외 농구 코트에서 혼자 연습했었다.
그러니 1군이 없는 체육관에서 연습할 수 있는 지금이야 말로 일년에 몇 번 오지 않을 기회였다. 끝까지 가기 싫었던 카가미를 포함해서 모든 부원들이 집으로 돌아 간 텅 빈 체육관에 혼자 남은 쿠로코는 신난 걸음으로 드리블 연습할 때 세우는 빨간색 트래픽 콘을 군데군데 세워두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하프라인 위에 서서 여러 번 공을 튕겼다. 통- 통- 메아리치는 소리를 들으며 쿠로코는 여기서 골대까지 드리블하는 것을 상상했다. 바로 앞에서 마크하는 녀석을 페이크로 속이고, 수비 도움으로 뒤 이어서 온 적팀 선수를 드라이브 인으로 제친다. 그리고 프리스로 라인으로 들어갔는데 적팀 수비가 거세다면 포스트 업을 하는 척하다가 투스텝으로 뒤로 돌아가 점프 슛을 날린다. 이 기술들은 전에 아오미네가 부원들과의 1대 1에서 보여줬던 기술들이었다.
사실은 그가 워낙 스피드가 빠른 바람에 정확한 스텝이랑 자잘한 기술은 보지 못해서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도 쿠로코에겐 충분했다. 다시 한 번 아오미네의 움직임을 재생해 본 쿠로코는 심호흡 후 첫 번째 트래픽 콘을 향해 드리블 했다.
네 번째 트래픽 콘 앞에서 레이업 슛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와카마츠 코치가 항상 말하는 대로 공을 그물 안에 놓고 오려고 해도 농구하기엔 키가 작고 점프력도 약한 쿠로코에겐 그게 어려웠다. 그래서 억지로 손목에 힘을 주어 밀어 넣어보려고 하면 항상 링에 맞아서 튕겨지기 일 수이었다.
그것 말고도 아까는 세 번째 트래픽 콘에서 드라이브 인 할때는 몸의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쏠려서 앞에 있던 트래픽 콘을 넘어트리기까지 했다. 최대한 아오미네의 움직임에 가깝게 해본 건데 역시 유연한 몸이 아니면 따라 하기 힘들었다. 다섯 번 시도했지만 다섯 번 다 슛을 실패하니 안 그래도 없던 힘이 한꺼번에 빠지는 듯했다. 쿠로코는 더 기운이 빠지기 전에 갈증부터 해소하려고 가방이 있는 단상으로 갔다.
그가 가방에서 이온음료를 찾을 동안 체육관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힘 있는 느린 걸음에 고개를 돌리니 웬일로 아오미네가 입구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 생겼지만 아침 연습 때 말고는 체육관에 오지 않는 그가 왜 바깥이 무척 어두워진 늦은 시간에 여기에 왔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겼다. 불 켜진 체육관을 찡그린 얼굴로 둘러보는 아오미네는 아직 쿠로코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쿠로코가 세운 트래픽 콘 쪽으로 걸어갔다.
“요즘 녀석들은 정신이 빠졌구만.”
“무슨 일이세요?”
쿠로코가 등 뒤로 다가가 아오미네를 부르자, 이상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렸다. 섹시한 저음을 가진 그가 애 낳을거 같은 고음으로 비명을 지를거라 생각 못했던 쿠로코도 덩달아 같이 놀랐다. 엄청 놀란 아오미네는 순식간에 쿠로코에게 떨어지고 홱하고 뒤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아오미네 씨.”
“너 뭐야?!”
“저는 쿠로코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냐고! 아까만해도 없었잖아!”
“계속 있었습니다만.”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아까 이상한 비명을 질렸던 걸 떠올랐는지 까만 얼굴을 붉히고 조금씩조금씩 입구 쪽으로 뒷걸음쳤다.
“대충하고 가라. 정리 똑바로 하고.”
“잠깐만요, 같이 농구 하실래요!”
쿠로코는 나가려는 그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그와 좀 더 말을 섞었다는 기쁨과 긴장감에 그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쿠로코가 당황해서 헛기침을 하고 마른 침을 삼키고 있을 때 아오미네는 굳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싫어.”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체육관을 나가버렸다. 제안을 거절한 아오미네에게 쿠로코는 실망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연습에 들어갔다. 만약 실력이 좀 더 늘면 아오미네가 자신을 다시 돌아 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쿠로코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혼자 연습하면서 일부러 입구를 살펴보았다. 만약에 창문에서 몰래 보고 있는 것 아닐까해 연습 한 파트가 끝나고 괜히 바람 쐬려 바깥에 나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불이 켜진 체육관으로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닷새 후 저녁, 쿠로코가 기다리던 아오미네가 드디어 체육관에 찾아왔다. 어슬렁거리는 발소리가 반가워 쿠로코는 연습하다 말고 입구에 있는 아오미네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이번에는 다행이도 그가 쿠로코를 먼저 찾아서 다시 놀래 키는 건 할 수 없었다.
“와주셨네요.”
“농구하러 온 거 아니야. 자취방이 이 근처라서 산책하러 온 것뿐이다.”
쿠로코는 그의 말에 싫어하는 척하지 말고 같이 농구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가 나가 버릴까봐 턱 밑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가라 앉혔다. 그저 느린 걸음으로 체육관 구석으로 의자에 앉는 아오미네를 바랄 볼 뿐이었다. 오늘도 바리게이크를 친 그에게 쿠로코는 다시 말을 걸지 못했다. 그래도 코치가 자신을 보려 와주었다는 희망에 기분은 좋았다.
다시 코트 안으로 들어간 쿠로코는 그의 앞에서 연습을 다시 하려고 하니 긴장되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공을 호기롭게 튕겼다.
하지만 각오와 다르게 아오미네 앞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연습하는 데 더 힘이 들어갔다. 그 앞에서 좀 더 빨리 달리고 싶었고, 높이 점프해 슛을 성공하고 싶었는데 결국 둘 다 실패해서 꼴불견만 되어버렸다.
슛을 성공하지 못한 쿠로코가 골대 앞에 주어 앉고 거친 숨을 겨우 고르고 있자, 의자에 앉아있던 아오미네가 바닥을 내리 누르는 듯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공을 집어 통통 천천히 튕겼다. 아오미네를 올려 본 쿠로코는 허연 천장등이 너무 밝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불빛을 등지고 있는 아오미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체력도 없는 녀석이 그만큼 무리했는데 멀쩡할 리가 있냐.”
“오늘, 저녁을 안 먹어서 그런 거뿐입니다. 저녁 먹으면 이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농구도 더럽게 못 해. 이대로면 2군 주전도 못하겠어.”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듣자 무척 서운해져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항상 그 앞에서 멋져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중에 주전이 되어 시합에 나가게 된다면 아오미네가 먼저 자신을 봐주리라 상상했었다.
하지만 상대방 쪽에서 현실을 말해주니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건 당연지사. 한없이 잘난 사람에게 자신 같은 건 바닥에 돌아다니다가 밝히는 일개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지도 모른다.
“못하는 사람에게 언젠간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기회는 찾아오게 되어있어.”
좌절하던 중에 아오미네가 해준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쿠로코 옆에 앉아 하던 말을 계속했다.
“못하는 걸 알면서도 연습을 멈추지 않는 건 그만큼 농구를 좋아하는 거지? 그러면 계속 좋아해줘. 농구를 좋아하는 녀석 중에 나쁜 녀석은 없어.”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마주 보면서 웃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 말이었는지 그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 웃음은 좋아하는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소년의 웃음이었다.
“아오미네 씨도 좋은 사람이겠네요.”
“난 아니지. 이제 농구 같은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오미네는 자신의 말이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쿠로코는 아까 그렇게 웃었으면서 그가 왜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착각일지 몰라도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아직도 농구를 좋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에요. 아오미네 씨는 농구를 좋아하세요. 그래서 아침 연습에 나오시고 지금도 체육관에 찾아오셨잖아요.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아요.”
“……그만 하자.”
결국 아오미네는 오늘도 쿠로코의 말을 밀어냈다. 심각한 얼굴로 쿠로코를 보지도 않고 체육관을 나가 버렸다. 쿠로코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쫓아가지 않고 어두운 체육관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쿠로코가 농구 얘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곳에 계속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 후에도 쿠로코가 연습하고 있을 때마다 체육관을 찾아 와 줄 것이다. 계속 농구를 좋아하지 않는 척하면서.
하지만 아오미네가 그러는 건 쿠로코가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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