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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쿠농/장편 2015. 9. 19. 19:30[흑적] 나비처럼 날아 6
6편입니다.
미리 예약글을 써두고 있는 중인데 참 편한 걸 이제야 써보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에는 중반부의 마지막이자 우울함의 시작입니다.
우울하지만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연습 때 아카시가 나오지 않았다.
농구부에 가입한 후부터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성실한 사람이라서 다른 부원들은 마찬가지고 감독도 연락을 받지 않았는지 걱정했다. 연습이 끝날 때가 되도 오지를 않으니 그의 사정을 잘 아는 쿠로코는 불안해졌다. 그가 알기로 별 일이 없었다.
연습이 끝나자마자 아카시의 반부터 달려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아카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쉬는 시간이 되면 아카시의 반에 가서 그가 왔는지 확인했다. 1교시에도, 2교시에도 보지 않았던 그는 결국 3교시가 끝난 뒤에 볼 수 있었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의 뒷모습에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서 물어보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참고 꾹 참았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방과후 연습에는 다행히 아카시가 나왔다. 오자마자 완고한 벽을 세운 그는 입을 꽉 다문 채로 부원들과 인사도 하지 않았다. 바로 감독에게 가서 오늘 아침에 안 나온 것을 사과했고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감독이 다독여주었으나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할 일을 마치고 다시 입을 다문 아카시는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쿠로코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연습을 시작했다. 쿠로코는 그의 안색이 너무 창백한 것이 너무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벽 때문에 도저히 다가갈 수 없어서 안절부절 되었다.
그러다 한참 연습을 하고 있던 중, 아카시가 갑자기 쓰러졌다. 기절했는지 의식이 없는 그는 니지무라 부장에게 업혀서 양호실에 갔다. 아침연습에도 안 나오고 연습 중에 쓰러진 그 때문에 체육관 분위기는 한 순간에 가라 앉았다. 연습도 도중에 그만두고 서로 웅성거리는 부원들을 부부장인 미도리마가 진정시켰으나 당혹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반면에 쿠로코는 쓰러진 아카시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가 이 정도라면 분명 학대를 또 받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잘 버텼던 그였기에 오늘 일은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놀랐다.
충격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쿠로코는 어서 그에게 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옆에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키세에게 농구공을 던지고 입구로 달려갔다. 그러자 미도리마가 쿠로코를 발견하고 제지했다.
“어서 연습을 재개하라는 것이야.”
“미도리마 군, 저도 가보겠습니다.”
“부장이 갔으니 너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치만……!”
“돌아가. 쿠로코.”
미도리마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주위에 있는 부원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자신에 모인 시선이 부담스러운 쿠로코는 우선 포기했다. 당장 갈 수 없다면 나중에 몰래 가면 되었다. 지금은 그의 눈에 띄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함께 양호실에 간 니지무라가 혼자 돌아왔다. 그렇다면 아카시는 양호실에 혼자 남아 있을 것이다. 쿠로코는 쉬는 시간이 다가 올 때쯤 먼저 쉬고 있는 부원들 틈 사이에 숨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된 동시에 아무도 모르게 체육관 밖을 나갔다.
아카시가 눈을 뜰 땐 체육관이 아닌 아무도 없는 양호실이었다.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노을이 진 창문을 보다가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쿠로코가 눈 앞에서 나타났다.
“세이쥬로 군. 괜찮으세요?”
“쿠로코. 제발 갑자기 나타나지마.”
그는 쿠로코를 보자마자 타박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전혀 힘이 없어서 오히려 안쓰러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며칠 안 먹은 사람처럼 힘들어 보였다. 쿠로코가 그를 부축해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아카시는 그의 손을 쳐냈다. 붉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상해 보이는 그에게 쿠로코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도대체 무슨 일이었습니까?”
그러나 아카시는 대답하지 않고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입술을 꽉 깨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으로 이런 아카시를 본 쿠로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이에 관한 책을 보았는데 머리가 새하얘서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다가 하는 수 없이 아카시의 등을 쓸어 만졌다. 쿠로코의 손길에 아카시는 처음에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의 온기에 어느 정도 진정 되었는지 호흡부터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쿠로코는 아무 말없이 계속 등을 쓸어 만져 주었고 아카시는 크게 심호흡하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제, 그 애가 나오지 않았어.”
속삭이는 말에 쿠로코는 숨을 멈추었다. 어제 지켜주는 사람없이 홀로 당했을 그 아픔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괴로워하는 아카시를 위해 아무 것도 못해주는 자신의 무력함에 너무 화가 났다.
아카시는 괴로운 숨소리를 내면서 계속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이렇게 벌 받기 싫어. 난 아무 잘못 한 것도 없다고.”
쿠로코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그를 달래주었다.
“그렇죠. 세이쥬로 군은 죄가 없어요.”
“근데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돼.”
그 순간 아카시는 입을 꽉 다물고 쿠로코를 노려보았다. 새빨간 눈동자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 같아서 마주친 순간 뒤로 물러설 뻔 했다. 그의 망설임을 단번에 느낀 그는 더 날을 세웠다.
“이전까지 아무렇지 않았어. 아무렇지 않게 연기 할 수 있었다고. 근데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계속 이 걸 당해야 돼? 왜 나는 평범하게 사랑하지 못해! 그게 너무 토할 정도로 역겹고 더러워서 이 몸을 쥐어 뜯어버리고 싶어……!”
격정을 토하는 아카시는 쿠로코의 옷을 부여잡았다. 피가 통하지 않는 손은 슬픔으로 떨리고 있었다.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더라면 이런 감정 전혀 몰랐어.”
그 말에 쿠로코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더듬었다. 그를 위로해줘야 하는데 자신을 향한 비난에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지금의 아카시는 그에게 너무 버거웠다. 모든 에너지를 쏟았는지 아카시는 쿠로코의 옷을 잡은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고개마저 떨군 모습으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죽어버릴 거야.”
“그, 그래도 살아요.”
쿠로코는 아카시의 말에 목을 쥐어짜서 대답했다. 듣고 싶지 않는 고백에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그래도 한 단어씩 뱉는 느낌으로 말했다.
“죽고 싶어도 살라고요. 살고 싶어서 그까지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악착같이 사세요! 살아서 그 사람에게 네가 아무리 괴롭혀도 잘 산다고 보여줘야죠. 허무하게 포기하면 당신 부모님이 너무 슬퍼하실 거에요. 그리고 나도 있어요. 난 세이쥬로 군 없이는 절대 못 살아요.”
말이 끝나고 쿠로코는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울음을 참는데 그도 모든 에너지를 다 썼다. 농구할 때보다 더 힘들어서 서있기 힘들어서 아카시가 있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이마를 가리는 긴 앞머리가 아카시의 표정을 가렸다. 한동안 말이 없었던 아카시는 날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돼.”
“제가 옆에서 끝까지 너만 사랑할게요. 언제나 기댈 수 있게 할게요.”
그렇게 말한 쿠로코는 끝내 지쳐버려서 아카시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죽겠다는 말 하지 마세요. 그거 하나면 돼요.”
자신의 하늘색과 그의 붉은색이 엉킨 곳에서 느껴지는 온기로 맘을 달랬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사이 자리를 비운 양호선생님이 돌아왔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아카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이제 괜찮다며 귀가 조치 시켰다.
그와 함께 체육관으로 돌아가니 이미 부원들은 돌아 간 지 오래였다. 아카시를 제일 걱정한 감독에게 보고해야 걱정했는데 옆에 있는 아카시가 그럴 힘이 없어 보여서 그냥 부실로 가기로 했다.
샤워도 못하고 옷만 갈아 입고 나온 두 사람은 각자 집으로 가지 않고 편의점부터 들렸다. 집에 갈 기운도 없는 그에게 에너지 음료라도 먹여주고 보내려고 했다. 막상 음료 코너를 보니 추워진 날씨에 차가운 고 카페인 음료는 좋지 않을 거 같아서 결국 핫초코 하나 사왔다.
따뜻한 김이 나는 핫초코를 온기 없는 아카시의 손에 쥐어준 쿠로코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핫초코를 보고 있다가 입술만 댄 아카시는 뜨거워했다. 고양이 혀인 그가 핫초코를 다 마실 동안만 공원에 가서 앉았다 가기 위해 아카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놀란 그가 손을 떼자 다시 손을 잡고 말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잖아요. 잡고 가요.”
“코너만 돌면 사람들 많아.”
“그래도 잡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쿠로코는 아예 깍지를 끼고 단단하게 잡았다. 그는 뒤에서 따라오는 아카시를 뒤돌아 보지 않고 앞장섰다.
***
얼마 후 겨울 방학이 시작하자 바로 합숙에 들어갔다.
봄 대회를 대비하기 위한 합숙은 도쿄 근교에서 했다. 은퇴한 3학년을 제외하고 1,2학년은 시외 버스를 타고 떠났다. 오래된 버스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점점 녹지가 많은 곳으로 갈 때 쿠로코는 멍한 얼굴로 밖을 보다가 앞에 있는 아카시를 보았다. 옆에 있는 미도리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또 다른 아카시는 남들이 감쪽 속을 만큼 연기 잘하고 있었다. 또 다른 아카시가 나온 것을 보고 쿠로코가 불안해 하자 그는 메일로 학대를 받아서 나온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부쩍 또 다른 아카시가 나오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빌린 체육관에서 하루 종일 연습에만 매달렸다. 너무 힘들어서 식사시간에 숟가락 하나 들 힘이 없었던 쿠로코는 밥과 반찬이 가득히 넣은 식판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미 다 먹고 또 먹고 있는 아오미네랑 의외로 소식하는 키세가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전혀 입맛이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다른 부원들이 식당을 떠나고 있을 쯤에도 쿠로코는 여전히 밥을 먹고 있었다. 매니저들이 만들어 준 정성을 생각해서 한 입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옆에서 다 먹은 아오미네가 의리를 지킨다고 옆에서 지루했다.
그가 또 다시 재촉할 때 식사시간 동안 보이지 않았던 아카시가 그들에게 왔다. 밥 먹다 말고 올려보니 여전히 눈이 붉고 노랗게 빛나는 또 다른 아카시였다.
그는 쿠로코 옆에 앉아 있는 아오미네에게 자신이 있을 테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아오미네가 괜찮다고 했으나 또 다른 아카시는 그렇게 옆에서 재촉하면 쿠로코가 체할 거라고 반박했다. 그 말에 찔린 그는 어쩔 수 없이 식당을 나갔다. 그 자리를 또 다른 아카시가 앉았다.
제일 보고 싶지 않는 상대가 옆에 있으니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있을 때보다 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의 눈치 때문에 예상보다 좀 많이 먹은 쿠로코는 속이 부대낄 정도 배가 불렸다. 음식이 조금 남은 식판을 들고 일어나려고 하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아카시가 제지했다.
“음식이 남았어. 테츠야.”
“충분히 배부릅니다.”
“먹는 것도 훈련이야.”
이렇게 말한 그는 쿠로코의 팔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힘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을 쿠로코는 저항할 수 없었다. 본래의 아카시보다 지금의 아카시는 남을 찍어 누르려고 했다. 쿠로코는 그 것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만은 한 가득 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마저 먹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체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쿠로코는 결국 체하고 말았다. 배가 아픈 그를 위해 또 다른 아카시가 아무도 없는 식당에 앉혀놓고 소화제를 가지고 왔다.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물과 함께 약을 받아 먹을 동안 또 다른 아카시는 계속 그의 옆에 앉았다. 쿠로코와 단둘이 있기 위해 그를 일부러 방에 데려가지 않았다. 식탁에 엎드려서 또 다른 아카시를 올려다 보는 쿠로코는 그의 의중을 깨닫고 아침부터 꾹꾹 누르고 있던 말을 꺼냈다.
“얘기 들었습니다. 그 때 왜 나오지 않았습니까?”
“첫 마디가 그거야?”
또 다른 아카시는 쿠로코를 보지 않고 되물었다. 쿠로코가 아무 말도 안 하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라고 당하는 걸 매번 좋아하지 않아.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고……. 쉬고 싶었어.”
항상 웃는 얼굴로 가면을 쓰던 또 다른 아카시가 처음으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속마음을 말하는 게 힘들었는지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 날 양호실에서 있던 본래의 아카시가 겹쳐 보였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을 계속 지켜보면서 감정을 소모할 대로 소모한 쿠로코는 더 힘들었다. 자신이 기댈 곳은 또 다른 아카시 밖에 없었다. 쿠로코는 일어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에게 부탁했다.
“미안합니다. 너에게만 강요하는 거 같아서. 하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저는 당신에게 기댈 수 밖에 없어요. 당신만이 세이쥬로 군을 도와줄 수 있어요.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애원하는 쿠로코의 목소리에선 흐느낌이 섞여있었다. 또 다른 아카시는 부탁만 하는 그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크게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어?”
쿠로코는 더 이상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또 다른 아카시는 자리에 일어나 먼저 식당을 나갔다. 텅빈 식당에는 점점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만 있었다.
식당에서 늦게 나온 쿠로코는 씻는 것도 늦어져서 욕탕에 가지 못하고 샤워 만하고 나왔다. 이미 어두워진 복도에선 작은 창문에서 나오는 방의 불빛만이 길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배정 받은 방으로 들어가니 이미 같은 방 사람들이 이불을 깔아 놓고 누워있었다. 양쪽으로 있는 잠자리 중에서 빈 자리는 왼쪽 맨 끝 아카시 옆자리였다. 아카시는 이미 옆에 있는 미도리마에게 등을 돌린 채로 누워있었다.
쿠로코가 들어오고 나서 바로 코치가 부원들에게 어서 자라고 말했다. 그의 재촉에 쿠로코는 서둘러 자리에 갔고 그 즉시 불이 꺼졌다. 순식간에 방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방 안에 있는 부원들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지 코치가 문닫고 나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쿠로코도 같이 잠이 오지 않았으나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쿠로코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아카시가 있는 방향으로 누웠다.
잠시 후 눈이 어둠에 익숙할 때쯤 훈련 때문에 피곤했던 부원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쿠로코도 눈을 감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아카시가 쿠로코의 손을 톡톡 만졌다. 조금 놀라서 다시 눈을 뜨니 어두운 곳에서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눈빛을 보았다.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쿠로코의 손을 만졌다. 왠지 또 다른 아카시가 아니라 본래의 아카시 같았다.
쿠로코는 고개만 들어 아카시의 뒤에 있는 미도리마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다가가는 동안 이불이 비벼지는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깰 까봐 긴장되었다. 어느 정도 다가간 그는 아카시에게 귓속말 했다.
“세이쥬로 군인가요?”
그러자 아카시도 쿠로코에게 귓속말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치약의 상쾌한 냄새와 함께 뜨거운 숨소리가 가슴을 간질거렸다. 살짝 움찔거린 쿠로코는 아카시에게 또 다시 귓속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아카시의 귓속말을 들은 쿠로코는 그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 안심되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안 받을 수 있었다. 다시 누워서 마주보고 아카시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제법 굳은 살이 늘어난 손을 만지고 있는데 아카시가 먼저 다가와 귓속말했다.
“잠이 안 와.”
그 말을 들은 쿠로코는 그에게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양 팔을 그에게 벌렸다. 팔 배게 해주려고 바닥에 닿은 오른팔을 뻗자 아카시는 고개를 들고 조금씩 다가왔다. 얼굴이 닿을 정도 가까워지자 쿠로코는 그를 꽉 끌어 안았다. 심장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고른 숨결과 온기가 너무 좋아서 나른해진 고개를 아카시의 머리에 기댔다. 단단한 등을 토닥여 주며 아카시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이제 좀 괜찮아요?”
그러자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쿠로코의 가슴팍에서 속삭였다.
“으응, 편해. 고마워 쿠로코.”
그 말을 듣고 쿠로코는 그를 한번 더 끌어 앉았다. 이대로 그가 다치지 않게 가슴 속에 품어주고 싶었다. 계속 그러고 있자 이내 아카시도 새근새근 잠들었다.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하던 쿠로코도 천천히 잠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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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글
쿠농/장편 2015. 9. 18. 07:30[흑적] 나비처럼 날아 5
5편입니다.
벌써 중반까지 왔습니다. 아마 이번 이야기는 좀 꽁냥꽁냥한 흑적을 써봤어요.
근데 우울해서 과연.....
아무튼 이번화도 재밌게 봐주세요.
이틀 날이 지나고 아카시가 돌아왔다.
쿠로코는 분위기를 보고 단번에 또 다른 아카시가 아니라 원래 아카시인 것을 알아보았다. 이틀만인데도 오래만에 보는 것 같아서 어서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 연습의 쉬는 시간에 아카시 옆에 앉았다. 힘든 연습 때문에 힘이 다 바닥나서 고개를 세운 무릎에 기댄 상태로 봤다. 그러자 아카시는 곤란한 눈치로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했잖아.”
“오랜만이라서 그래요. 좀 더 보게 해주세요.”
“결석도 안 했고 부활동도 안 빠진 걸로 알고 있어.”
“그랑 너랑 같습니까?”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카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재빨리 표정을 바로 잡았다. 그는 쿠로코에게 시선을 떼고 물을 마셨다. 쿠로코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의 옆모습을 향해 말했다.
“저는 그보다 네가 더 좋아요.”
아카시는 쿠로코의 말에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색 머리카락에 가려진 귓가가 빨개졌다. 그 것을 보니 덩달아 쿠로코도 얼굴이 달아올라서 고개를 돌리고 화제를 돌렸다.
“어제는 그냥 갔으니 오늘은 남아서 연습할 거에요?”
“하고 싶어도 못해. 분명 오늘도 올 거야.”
“그럼 다른 곳에서 해요. 제가 잘 아는 데가 있는데 좀 숨겨져 있어요.”
숨겨져 있다는 말에 솔깃해 아카시는 쿠로코를 슬쩍 보았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고양이 눈을 보고 쿠로코는 무릎 위에 있는 팔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날부터 두 사람은 이번에는 아카시 가의 사람이 찾지 못하도록 학교 밖에 돌아다녔다. 농구 연습은 쿠로코가 말한 대로 동산의 산책길 옆에 있는 공터를 이용했다.
환한 체육관에 비해 하나 밖에 없는 가로등은 어두웠고 바닥은 고르지 못해서 공 표면이 빨리 닳고 부상의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도 두 사람은 도망자의 마음으로 작은 스릴을 즐기고 있었다.
오래된 골대를 향해 공을 던지던 쿠로코는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아카시에게 말했다.
“아카시 군, 이제부터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그 말에 아카시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또 다른 아카시 때문이냐고 물었다. 그 말에 쿠로코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헛갈리고, 이 참에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서요.”
“나는 계속 성으로 부를 건데 괜찮아?”
아카시가 그렇게 말해도 쿠로코는 그에게 웃었다.
“상관없어요. 세이쥬로 군.”
농구에 비해 공부는 어두운 곳에서 할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도서관으로 갔다. 쿠로코의 집으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미 집주소가 알려진 마당에 집은 절대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찾기 쉬운 도서관에 갔으나 두 사람은 책상이 아닌 서가 사이에 들어가 숨어서 공부하기로 한 묘수를 생각했다.
쿠로코가 자주 가는 도서관의 지하 서고에서 그와 아카시는 6류 산업의 640번대, 660번대 서가 사이에 들어갔다. 쿠로코가 장담하기로 그 곳은 오후에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큰 서가에 빛이 가려져서 어두운 곳이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안심이 되었다. 두 사람은 그 더운 곳에서도 서로 독서용 작은 전등을 가져와 공부했다. 두 사람이 서가에 숨어 있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왔으나 확실히 두 사람이 있는 서가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둘만 다른 세계로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쿠로코가 숙제를 하고 있는 사이 개인 공부를 끝낸 아카시는 앞에 있는 축산업 관련 서가에 있는 책을 꺼내보았다. 그가 무슨 책을 꺼냈나 싶어 고개를 들자 옆에 있는 아카시가 가벼운 감탄사를 발했다.
“쿠로코, 여기. 이 안에 책 있어.”
그의 말에 책이 꽂혀 있는 곳을 자세히 보니 아주 어두운 곳에서 희미하게 책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책을 숨겨놓은 모양이네요. 가끔 대출 못하는 사람이 혼자 읽겠다고 숨겨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쿠로코는 안에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해 다른 책도 꺼냈다. 안에 있는 책은 제법 커서 책을 다섯 권 정도 꺼내야 했다. 가득한 책 먼지 때문에 숨을 참고 서가 안 쪽으로 손을 뻗어서 잡았다. 무거운 책을 힘들게 꺼내보니 제목이 ‘에로티카’ 였다.
여자의 맨 등과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표지를 보고 당황했다. 옆에서 같이 본 아카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창 성에 관심이 있는 중학생 남자애로서 책 안에 있는 내용들이 매우 궁금했지만 혹시나 책 내용들 때문에 아카시의 상처를 건들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보지 않기로 했다.
어색한 동작으로 책을 다시 숨기려고 하자 옆에 있던 아카시가 먼저 보자고 했다. 놀라서 그를 보니 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분위기를 조금 어색해졌다. 쿠로코가 빤히 보자 그는 헛기침을 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 그럼 펴볼게요.”
경직된 손으로 두꺼운 책을 폈다. 하드커버 표지 안에는 그림과 사진 작품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문학에서 인용한 문구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얼굴을 달아 오를 만한 적나라한 표현에 주위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책에 집중했다. 천국을 배경으로 남녀가 같이 붙어 있는 사진에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옆에 있는 아카시가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그러다 누가 지하서고로 내려오는 소리에 황급히 책을 덮었다. 완전히 놀라서 마구 뛰는 심장을 쉽게 진정시키지 못해서 아플 정도였다. 숨을 죽이고 아카시를 보자 그도 눈을 크게 뜨고 쿠로코를 마주보았다. 동그란 붉은 눈동자에서 그의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지하서고에 내려 온 사람은 쿠로코와 아카시가 있는 곳까지 오지 않았다. 계단 근처에 있는 3류 사회과학 쪽 서가만 돌다가 바로 1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람이 완전히 올라가고 나서 쿠로코는 바짝 긴장해서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이렇게 간이 졸려서 더 이상 이 책은 보기 힘들었다.
“다시 넣을게요.”
“으응, 그래.”
어색한 마음에 다시 책을 숨겨두고 아카시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쿠로코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찡그린 미간을 풀고 흥분한 듯한 표정을 짓기를 반복했다. 성적인 자극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를 보니 미안해져서 그를 보지도 못하고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세이쥬로 군. 역시 괜히 봤죠? 이제 집으로 갈까요?”
“아니.”
대화가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선 전보다 더 무거운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 무게에 몸이 짓눌려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데 자꾸만 책에서 봤던 거랑 아카시가 당했던 모습이 겹쳐서 떠올랐다. 죄책감에 목이 막혀왔다. 그때 아카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 우리 나이 때 그런 호기심은 어쩔 수 없잖아.”
애써 침착하게 말하려는 그에게 쿠로코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런데 저는 보면서 너를 생각하고 말아서......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아카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의 얼굴 볼 용기가 없어서 쿠로코는 고개를 고정하고 앞만 보았다. 역시 털어놓지 말 것 그랬다. 이대로 아카시가 혐오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하고, 그의 상처를 건든 아닐까 하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쳐지 나갔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서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그의 예상과 달리 아카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 단어씩 꺼냈다.
“나라도 좋다면, 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너라면 괜찮을 거야. 아니 괜찮아.”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쿠로코는 황급히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카시는 잠시 시선을 돌리다가 바로 마주보았다. 깜박이지 않는 그의 눈에서 단단한 각오가 전해졌다. 그에게 정말로 괜찮나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 기회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턱밑까지 올라 온 그 말을 꾹 눌러 담았다. 그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그,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세이쥬로 군.”
그렇게 말하면서 아카시에게 다가갔다. 둘 다 무릎 세우고 앉아 있어서 어떤 자세를 해야 하는지 잠시 헛갈렸다. 결국 무릎 꿇는 자세로 바꾸었다. 그대로 앉아 있는 아카시에 비해 앉은 키가 상대적으로 높아져서 그를 내려보는 상태가 되었다.
쿠로코는 갈 곳 없는 두 손을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얼굴을 잡아도 되는 건지. 그러나 지금 그러기엔 너무 부끄러워서 그나마 만만한 팔뚝을 잡았다. 그리고 점점 아카시에게 다가갔다. 쿠로코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카시는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 두 눈을 꼭 감았다. 부끄러움이 가득한 그 얼굴이 너무 예뻐 보였다.
밖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신경 쓰면서 고개를 돌린 쿠로코는 입술을 맞추기 직전에 눈을 감았다.
어두컴컴한 검은색 속에서 쿠로코는 꾹 닿은 아카시의 입술을 느꼈다. 입술 가장 위에 각질이 조금 일어나서 조금 까끌했지만 상상보다 부드럽고 폭신해서 놀랬다. 부드러움에 취해 조금 비벼보니 아래에 있는 아카시가 움찔거렸다. 덩달아 쿠로코도 움찔거렸다. 아카시와 입만 맞추는 건데도 쿠로코는 아까보다 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온기와 냄새와 감촉이 검은색 일색인 시야를 형형색색으로 만들었다.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서 어찌할지도 모르는 채 입만 맞추고 있는 동안 밑에 있는 아카시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제야 쿠로코는 자신도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입술을 뗐다. 두 사람은 동시에 숨소리를 내면서 급하게 숨쉬었다.
첫 입맞춤이 끝나고 아카시의 얼굴을 보니 더 부끄러워졌다. 시선도 못 맞추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는 술에 취한 듯 어지러웠고 온몸은 한 여름처럼 더웠다.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이 아팠다. 그래도 너무 좋았다. 그냥 다 좋아서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과 기쁨이 가득한 지하서고에 누군가가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서가 사이를 살펴보는 것을 보아 그 사람은 사서였고 지금은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인 모양이었다. 기뻐하는 마음도 잠시 쿠로코와 아카시는 서둘러 짐을 챙기고 서가 사이를 나왔다. 자신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분을 뒤로하고 어서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그게 무척 재미있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날 밤,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 자기 직전에 쿠로코의 머릿속에선 도서관에서 본 그 책이 자꾸 떠올랐다. 눈을 뗄 수 없었던 적나라한 사진 작품이랑 급하게 읽었던 문학작품은 인용한 부분이 계속 맴돌아서 오히려 괴로웠다. 몸이 저절로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곤란해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두 눈을 감았던 아카시의 얼굴을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입술로 느꼈던 감촉에 심장이 다시 빠르게 두근거렸다. 하는 수 없이 손을 아래에 대면서 쿠로코는 머릿속에 있는 아카시에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사과하고 사과했다,
결국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바람에 쿠로코는 퀭한 눈으로 아침연습에 참여했다. 과연 오늘을 안 쓰러지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피곤하고 인사하기 귀찮아서 부원들 몰래 들어와 옷 갈아 입던 중 아카시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어디 가는 걸까 궁금해서 서둘러 갈아 입으니 옆에 있던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그를 내버려두고 황급히 부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체육관 뒤편으로 가는 아카시가 보여서 냉큼 따라갔다.
뒤편에는 방금 온 아카시 밖에 없었다. 그곳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로 뒤를 돌아봐 따라오는 쿠로코를 발견했다. 아카시는 살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따라 올 거라 믿었어. 쿠로코.”
“미끼였습니까? 좀 치사하…….”
쑥스러운 마음으로 대답하고 있었는데 ‘쿠로코’라고 말한 아카시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랐다. 장난이 가미 된 입 꼬리가 딱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잠깐, 설마 아카시 군 입니까?”
얼굴을 굳히고 물어보자 또 다른 아카시는 놀라다가 아쉬운 듯이 웃었다. 붉고 노란 눈동자를 반짝인 채로.
“테츠야, 벌써 알아버리면 어떡해. 좀 더 속이려고 했는데.”
“그래서 날 유인하러 여기까지 온 거라는 거죠? 안에서 하다간 제가 정체를 밝힐까 봐요.”
쿠로코가 나름 추리하자 또 다른 아카시는 대충 맞았다고 대답했다. 또다시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꼴이 되니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또 그가 나왔다는 사실에 불안해졌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또 다른 아카시는 걱정말라며 사정을 설명했다.
“걔가 아침에 일어나지 않길래 대신 일어나서 등교했어.”
“어제 세이쥬로 군이 뭐했는데요?”
“그건 비밀.”
비밀이라는 말에 쿠로코가 다시 의심하자 또 다른 아카시는 절대 생각하는 거 아니라고 못박아 두었다. 장난스러운 어투에서 정직함이 느껴져서 그를 믿기로 했다. 어떤 식이든 또 다른 아카시를 계속 만나니 그 또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다시 생각했다.
“그나저나, 어제 도서관에서 뽀뽀만 하는 건 뭐야. 어제 자위했을 테니 딱히 순진한 것도 아니잖아.”
어젯밤에 남몰래 했던 일을 알아챈 그의 말에 쿠로코는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혜안이 있다고 해도 보는 것만으로 그런 걸도 맞추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도서관에서 있던 둘 만의 일을 제3자가 끄집어 내는 건 반갑지 않았다.
“그건 너랑 상관없잖아요. 제가 하고 싶었던 대로 한 것뿐입니다.”
“할거면 적어도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렇게 말한 아카시는 한 손으로 쿠로코의 얼굴을 잡았다. 놀라서 얼굴을 잡은 그의 손에 눈이 돌아갈 때 또 다른 아카시는 쿠로코에게 입을 맞추었다. 갑자기 닿은 감촉에 놀란 쿠로코가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그는 다른 손으로 쿠로코의 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당황한 쿠로코가 소리 내려고 하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까지 집어넣었다. 그의 혀가 자신의 혀에 닿을때 소름이 돋아 온몸이 굳어졌다. 또 다른 아카시는 쿠로코의 반응을 즐기면서 혀를 움직여 그를 자극했다. 처음 겪은 아찔함에 다리의 힘마저 잃어버릴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질 찰나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고,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또 다른 아카시를 밀었다. 순순히 떨어져 간 그를 노려보면서 쿠로코는 팔로 입술을 닦았다.
“그만하세요! 여긴 학교에요.”
다른 사람들이 최대한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화냈으나 또 다른 아카시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얼굴이 빨개진 쿠로코와 달리 그는 태연한 얼굴로 오히려 타박했다.
“이렇게 못해서 만족 시킬 수 있겠어?”
그 말을 들은 쿠로코는 황당해서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경험은 없어도 꼴에 자존심은 있는데 그걸 건드니 더욱 화가 나고 경쟁심도 생겼다. 그는 다음에는 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맞받아쳤다.
“나중에 내가 더 잘 할거니까 그때 가서 두고 봅시다. 반드시 가만히 안 둘 겁니다.”
쿠로코가 그렇게 말하자 또 다른 아카시가 소리를 죽이면서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기는지 그는 아예 허리까지 굽히고 있었다. 딱히 그가 이렇게 웃을 만한 얘기도 하지 않았다. 뭔가 나름 호기롭게 한 말을 비웃는 것 같아 거기에 동참할 마음이 없어졌다. 또 다른 아카시는 한동안 웃다가 겨우 진정시키고 뚱해진 쿠로코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근데, 테츠야 너 너무 재미있어.”
“재미있으라고 한 말 아닙니다.”
“알아. 아는데, 키스 가지고 두고 보자고 하는 게 이상하잖아. 정말 나한테도 할 생각인 거야?”
생각해보니 도발한 또 다른 아카시에게 키스로 갚아준다는 말이 되었다. 못한다는 말 때문에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동해서 무심코 나온 말이 부끄러워졌다. 또 다른 아카시는 체육관 안에서 나는 소리를 곰곰이 듣다가 자신을 찾는 소리에 먼저 입구로 갔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는 쿠로코를 지나치면서 넌지시 말했다.
“다음에 기대할게.”
그렇게 말한 또 다른 아카시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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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9. 17. 19:30[흑적] 나비처럼 날아 4
3편에 이어서 4편입니다.
4편도 재밌게 봐주세요.
방과후 연습이 쉬는 날에 쿠로코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혼자서 시립도서관을 찾아갔다. 3류 사회과학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거기에는 사람이 없었다. 조용하고 차가운 서고 안에서 그는 단번에 360번대를 찾았다. 그의 키보다 큰 서가 사이에 서서 눈으로 책을 찾았다. 사회 문제쪽으로 가니 단번에 성에 관한 책들이 있는 칸이 보였다. 그 끝에는 그가 찾고자 한 책들이 있었다.
제목들이 긴 책들은 대학 교재 같았다. 그 책들 중에 하나를 꺼내서 펼쳐 목차부터 살펴보았다. 그렇게 다른 책들도 살펴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책들로 골랐다. 그렇게 고른 책들이 대출 권수보다 많아서 읽은 다음에 골라야 했다.
두 팔 가득히 책 안은 쿠로코는 책상으로 가면서 1류 철학의 심리학 쪽이 눈에 띄었다. 서가에 붙어있는 분류표를 읽어보더니 이미 갖고 있는 책이 한 가득 인데도 그쪽으로 발길이 갔다.
심리학 중에서도 어떤 것을 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상 심리학 쪽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책이 너무 많아서 가방이 내려가도 추스르지 못하고 서둘러 책상으로 갔다.
넓은 책상의 한 구석에 앉은 그는 책을 내려놓고 가져온 책들을 살펴보았다. 이 책들 중에서 제발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 있기를 바랐다.
자리에 앉아 가져 온 책을 읽던 중 그의 앞에 누군가가 앉았다. 다른 자리도 많은데 굳이 여기에 앉나 싶어서 고개를 드니 쿠로코가 다니는 학교의 하복을 입고 있는 그는 쿠로코와 눈이 마주치자 붉고 노란 눈동자로 눈웃음을 쳤다. 또 다른 아카시였다.
그는 쿠로코의 앞에 앉더니 가져 온 책을 허락도 없이 가져가 살펴보았다. 붉은색 표지를 이리저리 보다가 쿠로코처럼 앞에 있는 목차를 읽어보았다. 붉고 노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 읽는 그를 보자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들었다. 아무리 아카시의 몸이라고 해도 또 다른 아카시와는 친해지기 힘들 것 같았다.
또 다른 아카시는 본문도 간단하게 살펴보다가 쿠로코에게 넘겨주었다.
“제법 좋은 책을 골랐네. 제목도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이라 상황에 잘 맞고 말이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롱이 담겨있는 말에 같이 조롱으로 받아 치고 쿠로코는 다시 책에 시선을 두었다. 또 다른 아카시는 턱을 괴고 예쁜 입을 열어 말을 걸었다.
“이런 책들 본다고 네가 뭘 할 수 있어? 넌 겨우 중학생이잖아. 그리고 성폭력 상담 책은 대학 교재라서 네 수준으로는 이해하기도 힘들 거고.”
또 다시 그는 사람을 무시하는 말투로 쿠로코를 건들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하나같이 맞는 말이라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반박 할 수 없는 거 아예 무시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책에 더 집중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책을 읽어서 이론을 섭렵한다고 해서 고통은 끝나지 않아. ‘아카시 세이쥬로’가 계속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대는 계속 돼. 걔는 나에게 몸을 맡기고 난 뒤에 흔적이 남은 몸을 보면서 괴로워해. 그런 녀석을 네가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자만하는 거야?”
끝까지 참을 수 없었던 쿠로코는 책을 확 덮었다. 제법 큰 소리가 서고 안에 울려 퍼졌다. 소리에 살짝 놀란 또 다른 아카시를 보면서 그는 이를 악물고 맘에 두었던 말을 꺼냈다.
”좋아하니까 하는 거에요. 아카시 군이 제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곁에 있기 위해서 노력할 겁니다. 당신이 보기에 하찮아 보여도 이렇게라도 할거에요.”
뜻하지 않게 마음을 고백하는 꼴이 되었지만 어째든 쿠로코의 말을 들은 또 다른 아카시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말했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인 줄은 몰랐어. 그래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가 막을 필요는 없지. 한 가지 팁을 준다면 걔한테 오히려 상처를 끄집어 내라고 하면 더 화낼 거야. 어떻게든 숨기려고 노력 중인데 남이 와서 깨부수려고 하면 자존심이 와장창 깨질걸?”
능글맞은 말에 쿠로코는 그에겐 말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또 다른 아카시는 쿠로코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자리에 일어났다.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그는 1층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혼자 남은 쿠로코는 마음을 가다듬고 책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그가 떠올라 실패했다.
***
다행히 다음 날부터는 아카시가 본래의 아카시로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크게 안심이 되었다. 아카시와 쿠로코 사이에는 여전히 어색함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항상 쿠로코만 일방적으로 바라봤던 것과 달리 아카시도 쿠로코를 보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고 준비하는데 유독 아카시만은 머뭇거렸다. 그의 모습에 쿠로코는 그가 집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찬스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남아서 같이 연습하실래요? 혼자 있는 것보단 둘이 있는 게 좋잖아요.”
그렇게 말하자 잠시 고민했던 그는 제안을 받아드렸다.
쿠로코는 그렇게 아카시를 따라 체육관에 남았다. 사람들로 꽉 찼던 체육관은 텅 비어서 매우 넓어 보였다.
멍하니 체육관을 보고 있는 쿠로코를 지나간 아카시가 공을 들고 코트 가운데로 들어갔다. 통통 박자에 맞춰서 공을 튀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등이 작아 보여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쿠로코는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빠지지 않도록 머리를 흔들고 농구공을 가져왔다. 먼저 골대 앞에서 서서 슛 연습을 하고 있은 아카시를 뒤로하고 쿠로코도 반대편 골대 앞에 섰다. 농구공을 튕기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3점 슛을 날렸다. 공은 골대에 맞아버렸다.
슛 연습을 끝내고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 드리블 연습을 시작했는데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온전히 등 뒤에 있는 아카시에게 가 있었다. 공소리, 발소리, 숨소리로 인해 눈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붉은색 환상을 저도 모르게 쫓게 되고 마는 것이다.
또 한 번 드리블하다가 공을 놓친 쿠로코는 너무 힘들어서 굴러가는 공을 쫓지 않았다. 상체를 숙이고 거친 숨을 골랐다. 떨리는 다리로 겨우 서있는데 뒤에서 아카시가 말을 걸었다.
“쿠로코, 드리블 할 때 몸을 더 낮춰. 그래야 중심도 유지하고 공을 바로 잡을 수 있지.”
“보고 있었습니까?”
쿠로코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한 그는 수건 대신 티셔츠 자락으로 얼굴 땀을 닦았다. 살짝 올라 온 티셔츠 안으로 그의 매끈한 배가 살짝, 아주 살짝 보였다.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더 내려보았지만 그렇다고 더 보여질까.
아카시가 이상하게 보자 머쓱한 마음에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그리고 벌써 체육관 끝까지 굴러 간 공을 주우러 갔다. 그는 그 곳에 잠시 서 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등 뒤에 있어서 그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던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했다. 공을 줍고 코트 가운데로 가면서 자신을 보는 그의 눈을 보고 싶었다.
정신 없이 드리블 연습을 하고 있으니 학교 수위아저씨가 체육관을 문을 두드리며 어서 집에 가라고 했다. 다시 어두컴컴한 밖으로 나간 그가 있는 문에 달린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다 되어 갔다. 시간을 보니 그제야 배가 고파졌다. 아카시도 시간을 확인했는지 쿠로코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의 표정은 포커페이스를 유지 못하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다른 곳에 가서 할래요? 이 근처에 아는 데가 있습니다.”
“아니야, 시간이 많이 늦었어. 그리고 배고프잖아. 소리 들었어.”
아카시의 말에 쿠로코는 황급히 배를 가렸다. 자기도 모르게 언제 소리를 냈던 걸까. 무표정한 쿠로코가 눈에 띄게 당황하니 아카시는 농담이었다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양이 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니 또 다른 아카시가 짓는 그 눈웃음과 다르게 그는 순수했다.
그 예쁜 웃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쿠로코는 체육관 입구로 가면서, 같이 가는 아카시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매일 남아서 연습했다. 항상 밤늦게까지 해서 집에 도착하면 잔뜩 굶주린 배를 채우기 바빴다. 입이 짧은 손자가 저녁밥을 많이 먹으니 할머니는 좋아하셨다. 과식 때문에 다음날에는 반드시 배탈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아카시는 가끔 연습 대신 단상에 앉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여러 가지 과외를 듣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평일마다 집에 늦게 가니 할 시간이 없었단다. 그래도 교실이나 도서관에 비해 체육관은 공부하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서 쿠로코가 도서관에 가도 된다고 했는데 그는 끝까지 체육관에 쿠로코와 같이 있었다. 걱정과 다르게 아카시는 체육관에서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쿠로코도 숙제나 책을 가져와 그와 같이 단상에 앉았다. 체육관에서 옷도 안 갈아입고 땀냄새 나는 상태에서 공부하는 건 우스운 꼴이었다. 그러나 아카시와 있으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이 들어서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더운 한 달을 보내고 나서 둘 만의 농구 연습을 시작할 참, 열린 문에서 긴 그림자가 체육관 바닥에 늘어졌다. 이질적인 그림자를 따라가니 붉은 노을 가운데에 정장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경계하고 있는 사이 같이 체육관에 있던 아카시가 인사했다,
“도련님, 차를 준비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학교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아카시가 말하자 정장 입은 사람은 목례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 외부인은 아카시 가 사람인 것 같았다. 불안감에 쿠로코는 그에게 달려갔다.
“가지 마세요.”
“아무 일도 아닐 거야.”
“하지만!”
눈동자가 떨릴 정도로 걱정하는 쿠로코에게 아카시는 어깨를 두드렸다. 상냥한 말투로 오히려 쿠로코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걱정 마.”
살며시 웃으면서 하는 말에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사람까지 온 마당에 쿠로코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카시는 먼저 체육관을 나가 부실로 갔다.
온통 노란색만 가득한 체육관에 혼자 남으니 너무 허무했다. 애써 마음을 다스려 보려고 공을 튕겨보아도 소리와 감촉으로는 마음의 빈 공간이 채워지지 않았다. 쿠로코는 오늘 연습은 집에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등교한 쿠로코는 서둘러 부실로 뛰어갔다. 오늘은 아카시가 부실 열쇠 담당이었다. 굳게 닫혀있는 부실 문을 열자 문은 열어 있었다. 부실 안에는 아카시 혼자만 있었고 막 옷을 갈아 입을 참이었는지 사물함이 열어져 있었다. 쿠로코는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제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로?”
“글세.”
그렇게 말한 아카시는 쿠로코를 마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재미있는 듯한 눈빛에 단번에 그가 또 다른 아카시인 것을 깨달았다. 그를 만날 때면 항상 안 좋은 일만 생겼다.
“또 당신입니까.”
“너는 제법 관찰력이 좋아. 다른 사람들은 구별 못하던데.”
웃는 얼굴로 칭찬했지만 쿠로코는 기쁘게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항상 조롱과 사람을 시험하는 오만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는 건 어제 아카시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침부터 기분이 팍 상해졌다. 답답한 마음을 한숨으로 달래며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그 사람들이 심하게 대하거나 하지 않고요?”
쿠로코는 걱정하는 눈으로 또 다른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또 다른 인격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도 같은 몸을 공유하는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쿠로코의 물음에 또 다른 아카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답 없는 그에게 다시 괜찮나고 물어보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응, 괜찮아”
“두 사람 다 괜찮다고만 하네요. 괜찮을리가 없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빨리 말하세요.”
미간을 꽉 찡그리고 대답을 원하는 쿠로코를 보고 또 다른 아카시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걱정하는 거야? 이게 ‘아카시 세이쥬로’의 몸이라서 그런 거지?”
그렇게 한 또 다른 아카시는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맞는 말이라서 마음이 찔린 쿠로코는 시선을 피했다.
“그건 부정 못하지만 당신도 ‘아카시 세이쥬로’이잖아요. 전에……. 얘기 들었으니까 다쳤을 까봐 걱정 되요.”
그의 말에 또 다른 아카시는 다시 웃었다. 순간 그와 다른 느낌의 미소라서 조금 놀랐다. 그는 쿠로코에게 바짝 고개를 내밀어 귓가에 속삭였다.
“어제 온 사람이 거칠어서 항문에 상처가 났어. 피가 좀 나왔으니 찢어졌을지도?”
또 다른 아카시의 대답이 너무 적나라해서 놀랐다. 쿠로코가 아무 말없이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 같이 눈을 반짝였다.
“거기에다가 연고라도 발라줄래?”
단번에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태도에 기분이 상하지만 그래도 가방에서 정말 튜브 형태의 연고를 꺼냈다. 혹시나 해서 집에서 비상 약을 챙겨왔었다.
“제가 직접 발라주는 건 그러니까 여기 연고 드릴게요.”
연고를 건내 주자 또 다른 아카시는 쿠로코 손에 있는 연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서 받으라고 더 내밀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잡았다. 그때 소매 자락에 가려졌던 손목이 드러났다. 그의 손목에서 멍 자국이 보여서 쿠로코는 그의 팔목을 잡아서 소매를 걷었다.
“이게 뭡니까. 왜 멍 들었어요? 이것도 어제 생긴 거에요?”
쿠로코의 말에 그도 이제 떠오른 모양이었다. 잡힌 손목을 보면서 곤란한 듯이 말했다.
“하면서 잡혔나 보네. 확실히 눈에 뜨겠는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말라니까요.”
또 그 태도에 화가 나서 또 다른 아카시에게 잔소리 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방에 있는 손목밴드를 그의 손목에 쓰여주었다.
“이거라면 가릴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쿠로코는 말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 그의 집에서 본 일이 트라우마처럼 떠올라서 말하기 힘들었지만 크게 심호흡 했다.
“다치지 마세요. 아니, 다치거나 힘들면 나한테 오세요.”
“어떻게 할 건데. 테츠야.”
또 다른 아카시는 처음으로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분위기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쿠로코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안아주기라도 할게요. 울고 싶으면 제 품에서 우세요.”
대답을 들은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쿠로코를 보기만 했다. 날카로운 그의 붉고 노란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쿠로코는 포커페이스 때문에 헤아릴 수 없었다.
잠시 후 아카시가 입을 열 때 누군가가 부실 문을 열다가 문틈에 머리를 박았다, 뒤에서 난 큰소리에 뒤돌아보니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는 무라사키바라였다. 그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먼저 온 쿠로코와 또 다른 아카시에게 아프다고 쿵쿵 다가왔다. 그의 뒤로 미도리마가 오면서 무라사키바라에게 잔소리했다.
그들이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해서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쿠로코는 드디어 자신의 사물함으로 갔다. 등 뒤로 또 다른 아카시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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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9. 16. 20:39[흑적] 나비처럼 날아 3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어제는 제가 깜박해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다음편들을 시간예약 걸어둘 걸 그랬네요.
왜 이제야 생각났는지
아무튼 3편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재밌게 봐주세요.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니 집중하라고 할 때 비로소 쿠로코는 정신을 차렸다. 순간 그는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학교에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학교에 왔다는 건 아침에 농구부 연습도 했다는 건데 그것마저 기억이 안나 당황스러웠다. 쿠로코는 우선 침착하게 책상 밑 서랍에서 교과서부터 꺼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 머리가 너무 아팠다.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어 고개를 숙이면 두통은 더 심해졌다. 도저히 참기 힘들어 쉬는 시간에 양호실에서 약이라도 받기로 했다.
1층에 있는 양호실로 가기 위해 천천히 내려갔다. 그의 옆으로 그를 발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스치며 서둘러 올라갔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계속 아래만 보고 갔다. 그런 그의 앞에 누군가가 섰다.
“인사도 안 하다니 서운한 걸.”
예비종을 울릴 때라 벌써 사람이 없는 계단에서 아카시의 목소리가 쿠로코를 불렸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붉은색 머리카락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분명 아카시가 맞는데 말하는 말투가 달라 순간 괴리감이 느껴졌다.
아카시는 쿠로코와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고양이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알고 있는 아카시의 분위기가 전혀 아니라서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정말 그가 맞나 싶었다.
기계적으로 웃고 있은 그는 쿠로코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놀란 눈이야?”
아카시가 그렇게 물어보자 쿠로코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정말 아카시 군, 맞으세요?”
그러자 아카시는 보는 사람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 마냥 흥미로운 눈빛을 하는 그의 앞에서 쿠로코는 자신이 먹이감이 된 것 같았다.
“몇 마디 나누는 걸로 알아챌 줄은 몰랐어. 이거 나도 연기 연습 좀 해야겠네.”
그렇게 말한 아카시는 당황하는 쿠로코에게 악수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테츠야. 나도 ‘아카시 세이쥬로’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같이 가지 않겠어?”
이미 수업시간이 되어버렸지만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는 거절하기 힘든 어떤 힘이 있었다.
그를 따라 간 부실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아카시는. 그러니까 또 다른 아카시는 원래 지금 시간이라면 감독이 가지고 있을 부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어째서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서 물어보지 않았다.
또 다른 아카시는 쿠로코에게 먼저 앉으라고 권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앉았다. 붉고 노란 눈동자를 마주보니 두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는 쿠로코를 보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 해줄게. 20년 전 아카시 가에는 두 형제가 있었어. 형 쪽은 명문가의 장남답게 능력도 뛰어났고 모든지 합리성을 따지는 냉정한 사람이었고 동생 쪽은 형보다 능력은 떨어지지만 사람이 참 착한 사람이었지. 성격도 사글사글해서 어느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었어. 서로 성격이 완전히 달랐지만 그래도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을 거야.
그런데 두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그 여자는 매우 현명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까 어느 남자라도 사랑할 수 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두 형제의 사랑을 받은 그 여자는 누굴 택했을까?
바로 다정한 동생을 택했어. 그녀는 독립적인 여성이라서 자신을 아카시 가의 며느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바라 볼 사람을 고른 거지. 그렇게 선남 선녀가 만났고 주위 사람들은 축복해주었어.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형은 자신을 택하지 않는 그 여자를 매우 증오했어. 그런데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그녀를 계속 사랑했어.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연애도 못했던 그에게 그 여자는 첫사랑이었거든. 물론 집안을 생각해서 마음을 접기로 노력했겠지. 그러나 그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못한 게 문제였어.
애증만 남은 형은 동생도 그 여자를 못 가지게 하려고 그녀를 강간해버렸어. 그렇게 하면 그녀가 자신이 더럽혔다고 생각하고 가해자인 자신이 있는 아카시 가로 오지 않을 거라고 자기 멋대로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는 당차고 강단 있는 여자였지. 그녀는 자신이 강간 당한 사실을 동생에 털어놓았고 동생은 그 즉시 형에게 달려가 불같이 화냈지. 경찰에도 신고하려고 했지만 다른 가족들이 막아서 거긴 까지 못했어. 그러나 동생은 그 여자와 함께 집을 나서면서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거라고 못 박아놨어. 그렇게 형은 그 이후도 동생도 그 여자도 볼 수 없었어.
그렇게 세월이 지나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 되었을 때쯤 집안과 연을 끊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서 잘살고 있는 동생 부부에게 그만 불행이 찾아왔어. 두 사람 모두 교통 사고 때문에 열한 살 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뜨게 된 거야.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된 어린 아들은 집안과 연을 끊은 부모님 때문에 맡아 줄 친척이 없어서 고아원에 가버렸지.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우던 어느 날, 마침내 맡아줄 사람이 찾아왔어. 바로 하나 밖에 없는 삼촌인 그 사람이었어. 형은 그 동안 결혼을 하지 않아서 슬하에 자식도 없었어. 그게 걱정이었던 아카시 가 사람들은 마침 조카가 고아 되었으니 그 아이를 그의 양자로 다시 들인 거야.
고아였다가 명문가 도련님이 된 아이는 모든 게 어리둥절했지.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에게 잘해주는 집안 사람들 덕분에 부모를 잃은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어.
이야기가 여기까지였다면 물론 해피엔딩이겠지? 아이에게 온 불행은 그 다음부터였어. 아이의 삼촌은 그 사람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그녀를 매우 닮은 것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어. 묵혀두었던 애증을 조카가 자극하고 만 거야.
그래, 어린 아이가 뭘 알겠어. 그저 아름다운 어머니와 닮았을 뿐인데.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자신을 버린 그 여자가 너무 미웠으니까, 그 여자를 차지한 동생에게 처음으로 질투했으니까 참을 수 없었겠지. 그래서 그 사람은 조카를 학대했어.
중학생이 되어 이제 막 2차 성징이 시작된 어린 조카를 사람을 시켜 강간했어, 아이는 몸이 너무 아팠고 남자로서 이런 일을 당한 것에 엄청난 치욕스러움을 느꼈어.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알몸으로 울고 있는 조카에게 그 사람이 찾아왔지. 조카는 삼촌에게 다가가 차마 말로 못할 일을 당했다고, 도와달라고 애원했어.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딱 한마디만 했어. 더러워.”
마지막의 한 마디에 쿠로코는 자신이 들은 것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깟 해묵은 감정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가족에 그런 식으로 상처를 줄 거라고는 감히 상상 할 수 없었다. 사연을 듣고 있는 쿠로코에게도 너무 버거웠다.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없고 머리가 너무 아픈 쿠로코 앞에서 또 다른 아카시는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의지했던 삼촌에게 배신 당한 아이는 이대로 있을 수 없어서 증거를 가져가 경찰로 갔어.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그들은 수사하지 않았어. 계속 해달라고 소리치고 있던 중에 그 사람이 아이를 데리러 경찰서에 왔어. 그러자 경찰서의 높은 사람이 찾아와 그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는 거야. 그제야 아이는 아무도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후 다시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을 당하고, 또 당한 아이는 치욕스러움에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었지. 소용없겠지만 유서를 남기고 커터칼로 손목을 그었어. 하지만 상처가 깊어서 동맥까지 자를 수 없었어. 그래서 칼을 세우고 쑤시려고……”
“이제 그만하세요!”
쿠로코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이 정신으로는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기에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부실 한 구석에서 남자들에게 당하는 아카시와 그 옆에서 자해하는 아카시가 아른거렸다.
또 다른 아카시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다며 쿠로코의 팔을 잡아 당겼다.
“제대로 들어. 그 순간, 내가 나왔어. 그 녀석의 몸을 차지해서 더 이상 자해하지 않도록 했지. 왜냐면 난 살고 싶었으니까.”
그에게 꽉 잡힌 팔은 아팠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두통이 줄어들어 진정할 수 있었다. 차분해진 머리로 그의 말을 듣던 중 의문점이 생겼다. 아카시가 작년 가을에 들어와서 그를 안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를 매일 관찰했던 쿠로코는 한 번도 그의 다른 이면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동안 한 번도 당신을 본 적이 없었는데.”
“당연하지. 나는 걔가 자살을 시도 했을 때랑 당했을 때만 나오니까. 평소에는 내가 나오는 게 싫어서 못 나오게 해.”
“그, 때도 당신이었습니까?”
처음으로 그의 집에 간 일에 대해 물어보자 또 다른 아카시는 흔쾌히 대답했다.
“응 맞아. 근데 그때는 녀석들이 약 같은 걸 가져와서 나도 정신을 잃었어.”
자기한테 일어난 엄청난 일을 남 일 인양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가 거북했다. 그래도 참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질문을 하는 동시에 쿠로코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가장 최근에 있던 일로, 쿠로코가 아카시가 당하는 것을 목격한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그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정도 꼭꼭 숨겨두었는데 백부에 의해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말았으니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게 뻔했다.
애초에 그의 백부가 쿠로코를 집으로 초대한 것은 아카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치졸한 방식에 치가 떨렸다. 또 다른 아카시에게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넘치는 분노를 어디에도 풀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또 다른 아카시는 온 몸으로 화내고 있는 쿠로코를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원래 아카시라면 되려 쿠로코를 위로해줄 테지만 또 다른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그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는 예쁘게 웃는 입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테츠야.”
“……어떻게 이라니요?”
무슨 말이냐며 다시 묻자 또 다른 아카시는 고개를 그에게 내밀었다. 당황해서 몸을 뒤로 빼며 피하니 그는 재미있어했다.
“그러니까, ‘아카시 세이쥬로’를 어떻게 할거냐는 거지. 너도 이 일로 충격 받았잖아. 그럼 마주 볼 때마다 트라우마처럼 다시 떠오를 텐데 견딜 수 있겠어? 게다가 이중인격이잖아? 눈 앞에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할 텐데 감당 할 수 있겠냐는 거지.”
확실히 앞으로 아카시를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했다. 분명 평소대로 대하는 건 무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쿠로코라도 힘들었다. 지금도 버겁다고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으니. 그렇지만 사람을 갖고 노는 듯이 실실 웃는 또 다른 아카시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부정했다.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네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알고 있어.”
또 다른 아카시는 쿠로코를 마주보는 상태로 빙그레 웃었다. 마음을 꿰뚫어보는 고양이 눈으로 친 눈웃음은 반할 정도로 예뻤지만 저 외모 안에 있는 사람이 하는 짓이 전혀 예쁘지 않아서 맘이 가지 않았다.
엄청난 이야기가 끝나니 부실 안에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하필이면 마주 앉아서 더 어색하던 중 부실에 있는 시계를 보니 곧 쉬는 시간이 될 때였다. 이때 싶은 마음에 쿠로코는 아카시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어떻게 할 지는 제가 알아서 생각할 테니 그쪽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자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아카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쿠로코를 보았다. 큰 눈을 여러 번 깜박이던 그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애를 만났구나. 쿠로코.”
“아, 아카시 군?”
그에게 말을 건 아카시는 아까 와 다른 분위기에, 자신과 쿠로코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진짜 아카시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했던 것이 방금 전인데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지 몰랐다.
“저기, 그러니까……. 원래대로 돌아 온 건가요?”
“그 애가 갑자기 나에게 넘겨줬어. 근데 지금 수업 시간인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아카시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지 이상한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았다. 자기의 의지와 다르게 수업 시간을 빼먹은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눈 앞에서 변한 아카시를 보고 당황한 쿠로코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아니 또 다른 아카시 군이 절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기억 안 나세요?”
“몸을 그 애에게 넘겨줄 때는 기억 못 해. 만약 무례를 범했다면 그 애를 대신해서 사과할게.”
다시 정중한 본래의 아카시를 보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대화가 끝나고 다시 어색해지자 쿠로코는 다시 쉬는 시간 벨소리를 기다렸다. 쉬는 시간이 되기까지 남은 1분이 어찌 이리도 길었던 걸까. 아무 말이 없는 진짜 아카시를 마주한 동안 그에게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쿠로코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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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9. 14. 23:11[흑적] 나비처럼 날아 2
1편에 이어 2편도 공개합니다.
이때부터 약속된 시리어스의 길이.....
아 그리고 보니 1편에 말씀 안드렸네요. 이 글에는 성적학대에 관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민하신 분은 참고해주세요.
그럼 2편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내일 3편으로 뵙겠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쿠로코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었다. 액정에 찍힌 모르는 번호에 불안감이 들었지만 우선 받아보았다. ‘여보세요’라고 먼저 말하자 수화기 너머로 나이 많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쥬로 도련님의 친구분 되는 쿠로코 군이 맞으십니까?]
다짜고짜 아카시의 친구냐고 묻는 전화에 그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네, 제가 쿠로코입니다만. 무슨 일인가요?”
[주인님께서 도련님 친구분을 초대하고 싶어하십니다. 내일 시간을 내줄 수 있습니까?]
쿠로코를 초대하는 사람이 아카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라는 점에 놀라서 다시 되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은 다시 한 번 그의 아버지가 쿠로코를 초대하는 것이 맞다고 확인해주었다. 어째서 그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었고 대신 전화하는 사람에게 작은 호의도 느낄 수 없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커졌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아카시에게 큰 잘못을 한 적이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고 있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은 쿠로코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바쁜 사람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한 번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갈게요. 내일 맞죠?”
[예. 시간과 집주소는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람은 용건만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핸드폰 폴더를 닫기도 전에 바로 그 번호로 메일이 날아왔다. 초대메시지는 간단하게 시간과 집주소와 함께 짧은 초대인사만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아카시 가의 초대를 받은 쿠로코는 생각이 복잡했다. 쉽게 응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부잣집 도련님인 아카시의 사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호기심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간다고 해도 별 일 없을 것이다. 그냥 아카시만 만나고 나오면 될 일이었다.
다음날 쿠로코는 메일로 받은 주소대로 아카시의 집에 찾아갔다. 가기 전에 아카시에게 오늘 그의 집에 간다고 메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주소만으로 찾기 힘들어서 쿠로코는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히 물어보았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그들은 길을 물어보는 쿠로코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극히 평범한 남자애가 이런 부자 동네를 찾아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어찌어찌해서 찾은 아카시의 집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대문에 들어가기 전부터 기가 질리기 시작했다.
망설이는 마음을 겨우 누르고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문이 열렸다. 대문을 열고 맨 처음 보인 집 안 정원은 정말 아름답게 꾸며졌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대해놓고 아무도 맞이해주지 않으니 쿠로코는 자신 정말 제대로 왔는지 헛갈렸다.
화강암으로 잘 포장 된 길을 따라 화려한 현관문으로 가자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이에 쿠로코는 조금 놀랐다. 타이밍 좋게 문을 연 사람은 제법 더워진 날씨에도 정장을 입은 늙은 신사이었다. 흰머리가 더 많은 회색머리를 포마드로 잘 정돈한 신사는 쿠로코보다 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내려보았다.
“쿠로코 군입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카시 가의 집사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신사의 목소리는 어제 전화를 나누었던 그 목소리이었다. 익숙하지 않는 장소에서 그나마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쿠로코가 허리를 숙여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하니 그도 목례하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시원한 집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거실로 들어가는 넓은 복도가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쿠로코를 초대한 사람은 없었다. 만약 그가 나오지 못한다면 적어도 쿠로코가 오기 전에 보낸 메일을 받았을 아카시라도 나올 줄 알았다.
집사는 당황하든 말든 자기보다 훨씬 어린 쿠로코를 정중하게 안내했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가면서 천장이 높고 넓은 거실을 슬쩍 보았는데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미려하면서도 절제된 장식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아름다움이 가득한 것치고 텅 빈 느낌이 든 곳이었다. 거실 뿐만 아니라 이 집 안 전체가 눈에 보이는 것과 피부로 느끼는 분위기가 달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집안 어디에도 아카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집사는 쿠로코를 데리고 곡선형 계단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남향에 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예쁘게 빛나고 있는 짧은 복도 너머에는 여러 개의 방문들이 굳게 닫혀있었다.
“이쪽으로 가서 오른쪽 마지막 방이 도련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여기부터 저 혼자 가는 건가요?”
집사를 올려다보며 물어보자 이미 몸을 튼 집사는 쿠로코를 마주보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째서냐고 물어보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아무 표정이 없는 그의 앞에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제부터 애써 무시하고 있는 불안감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할 일이 끝난 집사는 쿠로코를 내버려두고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괜히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카시가 저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음을 다 잡았다.
그가 말하는 대로 복도를 지나 오른쪽 마지막 방으로 갔다. 호화로운 저택답게 닫혀 있는 방문의 장식도 멋졌다. 문을 열려고 광을 낸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문 너머에서 심상치 않는 기운을 느꼈다.
이상함에 쿠로코는 괜히 숨소리를 죽이고 방 안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카시 혼자 있을 방에서 여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그 기척들은 어느 한 점을 기준으로 엉켜있었다. 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방문 앞에 있는 쿠로코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심장은 어서 여기서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쿵 쿵. 귓가를 두드리는 경고음에도 잡고 있는 문고리를 돌렸다. 꽤 무거운 문을 힘들게 열자 그 틈으로 밝은 햇빛이 거친 숨소리들과 함께 뭉쳐 나왔다. 빛이 잘 반사되는 모노톤으로 꾸민 방에는 살색을 드러낸 남자들이 모여있었다. 그 광경에 충격 받은 쿠로코는 아무 말도 못하고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러다 그의 눈에 저 이상한 남자들 틈 사이에서 누워있는 아카시가 보였다.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마른 다리가 한 남자의 허벅지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쿠로코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누워있는 그의 주위에 있는 저들을 없애야 한다는 한 가지 본능으로 움직였다. 쿠로코는 분노가 가득 실은 두 손으로 간이 테이블 옆에 있는 나무의자를 들어 아카시에게 하반신을 내밀고 있는 사람의 등에 내리쳤다.
그가 달려와도 하는 일에 몰두해 눈치채지 못했던 그들은 의자에 연달아 맞고 나서야 쿠로코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가 괴성을 지르며 의자를 휘두르니 그들은 후다닥 아카시에게 떨어졌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몸집이 작은 어린애인 것을 보고 제압하려고 했지만 계속 의자로 공격하는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 기세를 이길 수 없었던 그들은 욕하면서 아카시 방에 나갔다. 쿠로코는 도망가는 그들이 다시 오지 못하도록 도망치는 뒷모습을 향해 의자를 던졌다. 의자는 큰 소리를 내면서 다리가 완전히 부셔졌다. 그들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서둘러 방문을 걸어 잠갔다.
제정신으로 돌아 온 쿠로코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체력도 거의 바닥 나서 고개를 숙이고 멈추었던 숨을 몰아 쉬었다. 충격을 받아서 마구 뛰는 심장은 아무리 해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침대에 널브러진 아카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몸 여기저기에 이상한 것들이 잔뜩 묻어있었다. 남자인 쿠로코는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속이 뒤집어 지기 시작하자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는 동안 그는 아카시를 데리고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울렁거리는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떨리는 다리로 다리에 일어나 아카시에게 갔다. 그는 기절했는지 눈감고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처참한 그의 몸을 밑에서 떨어져있는 이불로 가리고 그를 깨워보았다. 아까 전에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카시 군, 일어나세요. 어서요. 어서 빨리!”
쿠로코가 그나마 깨끗한 어깨를 잡고 흔들어보았지만 기절한 아카시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힘없이 흔들리는 그의 고개를 보니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아카시를 깨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순간적으로 손까지 들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아카시의 뺨을 때리기 직전 그의 창백한 안색이 보였다. 힘들고 아픈 기색이 역력한 저 얼굴을 차마 때릴 수 없었다. 힘없이 손을 내린 쿠로코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
그 때 누군가가 두 사람이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쿠로코가 본능적으로 아카시 앞을 막아섰다. 손에 어떠한 무기도 없다는 것이 불안했다. 쿠로코가 대답하지 않으니 문 밖에 있는 사람은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나 아까 쿠로코가 문을 잠가서 열리지 않았다. 밖에 있는 사람은 다시 노크했다.
“안에 계십니까? 대답이 없으면 마스터 키로 열겠습니다.”
문 밖에 있는 사람은 쿠로코에게 전화하고 여기까지 안내한 집사였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지극히 차분했다. 그렇다면 분명 그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저 사람에게 철저히 농락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쿠로코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세요! 그쪽도 가만히 안 둘 테니까!”
쿠로코의 위협에 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몇 시간처럼 흘려 간 뒤 드디어 그는 방에서 멀어졌다. 그가 간 틈에 쿠로코는 문을 아예 막기 위해 방 안에 있는 가구들 중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문 앞에 옮겼다. 하지만 이런 건 잠시 뿐이고 스스로 아카시를 이 곳으로 갇히게 만드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엉성한 바리게이트만으로 안심 할 수 없었던 그는 침대 위에 올라가 아카시를 이불 채로 껴안았다. 이렇게 품에 안아야만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늪처럼 서서히 잠식시키는 것처럼 푹신하고 새하얗게 깨끗한 고급 매트리스 위에서 쿠로코는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아카시를.
힘없이 안겨있는 아카시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면서 아무나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시간이 한참이 지나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에 앉아있는 쿠로코는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이불을 덮어준 아카시가 천천히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떴다. 쿠로코와 마주친 붉은 눈동자에는 순간 당혹감이 비쳤다.
놀란 아카시는 쿠로코를 빤히 보고 있다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이불로 몸을 감추는 것은 잊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한 가득인 쿠로코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카시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었는지 아카시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한번도 남에게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던 아카시는 쿠로코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못 볼 것 보게 해서 미안해.”
그 말을 들은 쿠로코는 화가 나 그에게 소리쳤다.
“왜 네가 사과해요! 아무 잘못도 없는 네가 사과해서 어쩌자는 거에요. 사과하려면 다른 사람이 와서 해야지!”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터트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입에선 평소엔 쓰지도 않는 욕이 나왔다. 반면에 아카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욕하고 있는데도 그는 막을 기운이 없어 보였다. 기가 죽은 아카시가 너무 안쓰러웠다. 애초에 그에게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는 건 없는데.
쿠로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찾아 놓은 옷들은 그 앞에 두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 입으세요. 그 다음에는 저와 함께 경찰서로 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카시가 옷을 갈아 입을 동안 자신이 세운 바리게이트를 치웠다. 경찰에 신고하려면 우선 이 집에서 나가는 게 중요했다.
묵묵히 바리게이트를 치우고 있던 중 옷을 갈아입은 아카시가 쿠로코를 막았다.
“경찰에 가도 소용없어. 포기해.”
그의 말에 발끈한 쿠로코는 아카시 앞에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 내밀었다.
“네가 기절하고 있던 사이 모든 증거를 핸드폰으로 찍어두었습니다. 이거라면 그 놈들을 충분히 잡을 수 있어요.”
그러나 쿠로코가 기대한 반응과 달리 아카시는 완전히 굳은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쿠로코. 그거 당장 내놔.”
그 말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경계했다. 그러자 그는 더 단호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그거 있어도 소용없어. 모조리 지우는 게 더 안전해.”
“왜 지우려고 합니까. 이런 일을 당했는데 신고 안 할 거에요?”
피해자인 아카시가 이렇게 나오니 더 화가 났다. 이게 다 아카시를 위해서 하는 건데 본인이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아카시는 쿠로코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한번도 안 해봤을 거라 생각해!”
날카롭게 내뱉는 그 말에 쿠로코는 당황했다. 그래도 그를 설득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가 목격했으니까 분명…….”
“백부님은,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그의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분노와 울음을 최대한 참으려고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이 일에 제일 상처받은 사람은 아카시였다. 아카시는 다시 한 번 쿠로코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순순히 자신의 핸드폰을 그에게 넘겼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노란 햇빛을 등지고 핸드폰에 있는 증거 사진들을 지우고 있는 아카시에게 쿠로코는 깊은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며칠 동안, 아니 하루 만이라도 우리 집에 가요.”
핸드폰 액정을 보고 있던 아카시가 고개를 돌려 쿠로코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증거를 마저 지우기 위해 다시 시선을 내려 핸드폰을 보았다. 그는 자기 일을 남 일 인 마냥 말했다.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해.”
그가 자꾸 단호하게 말하니 자꾸 할 말이 없었다. 아카시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그래도……. 그래도요. 지금은 여기에서 너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아요. 평생 후회할 지도 모릅니다.”
쿠로코의 진심 어린 말에 아카시는 아주 잠시 사진을 지우는 손을 멈추었다. 이내 다시 지우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잠시 후 쿠로코의 핸드폰에 있는 모든 증거들을 지운 아카시는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알겠어. 하지만 그걸로 소용이 없다는 건 알아둬.”
아카시는 쿠로코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허락을 받은 쿠로코는 바로 그의 손을 잡고 바리게이트를 치운 방문으로 앞장섰다. 아카시가 손 안 잡아도 갈 거라고 말했지만 쿠로코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에게 나가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카시가 알려 준 대로 뒷문으로 나갔다. 최대한 기척을 감추었으나 아카시 가의 저택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결국 한 명한테 들키고 말았다.
그러나 50이 넘어 보이는 그녀는 뒷문으로 나가는 아카시와 쿠로코를 보고도 모르는 척 다른 곳으로 갔다. 그녀의 행동이 눈 감아주는 것인지 보고하러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 덕분에 무사히 나갈 수 있었다.
끝까지 쿠로코는 아카시의 손을 끝까지 잡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주말이라서 집에 있는 가족들은 친구 집에 놀러 간 아들이 되려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온 것을 의아했다. 쿠로코가 아침과 달리 심각한 얼굴로 있는 것도 이상하게 보였다.
쿠로코가 집안에 들어와도 아무 말이 없자 마중 나온 어머니가 먼저 아카시에게 말을 걸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아카시 세이쥬로입니다.”
“아, 테츠야 군과 같은 부원이군요. 아마 학년이죠?”
아카시와 어머니는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집에서 있던 일 때문에 받은 충격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쿠로코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런 그를 옆에서 보고 있자니 부모님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어서 잠기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머니, 아카시 군이 오늘 자고 갈 건데 괜찮은가요?”
완전히 잠긴 아들의 목소리에 부모님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마지못해 허락해주었다. 아카시가 옆에 있어서 이유까지는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목욕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친구니까 같이 씻을 거지?”
“아, 저희는…….”
“네, 같이 씻을게요.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카시는 당황하는 쿠로코의 말을 재빨리 끊고 먼저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웃으면서 쿠로코보다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와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카시를 거실에 있는 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소개하는 동안 그저 옆에 서있었다.
목욕물을 준비하려 어미니가 욕실로 간 사이 쿠로코는 드디어 가족들에서 벗어나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사이가 뒤에 있는 아카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쿠로코, 정신차려. 이상하게 행동을 하면 더 의심해.”
냉정하게 말하는 아카시를 보자니 화가 났다.
“자기 일을 남 일처럼 말하지 마세요.”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한 표정에서 쿠로코는 억지스러움을 발견했다. 억지로 감춰야 하는 그의 삶에 연민이 느껴졌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쿠로코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쿠로코의 방은 계단 바로 옆에 있었다. 아카시의 방보다 훨씬 작고 촌스러운 푸른색이 가득한 방으로 먼저 들어간 그는 서랍을 열어 아카시가 갈아 입을 옷부터 찾았다. 아카시가 쿠로코와 체격이 비슷하게 보여도 미묘하게 커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그나마 큰 셔츠로 골랐다. 바지는 큰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허리춤은 맞으니까 괜찮았다.
침대에 앉은 아카시에 옷을 주는 사이 어머니가 노크 했다. 목욕물을 준비했다는 말에 뻘쭘한 기분으로 아카시를 욕실로 데려갔다. 가족들의 눈치가 있어서 어찌어찌 탈의실까지 같이 들어갔지만 아카시 앞에서 선뜻 옷을 벗기가 쉽지 않았다. 괴한들에게 겁탈을 당한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건 아닐까 걱정 되었다.
들고 온 옷을 잡고 머뭇거리는 그와 달리 아카시는 옷을 들고 먼저 들어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쿠로코에게 말했다.
“너는 거기에 있어. 내가 먼저 씻고 나올게. 그 다음에는 네가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야.”
“……네.”
쿠로코는 마지못해 제안을 받아드렸다. 직접적으로 당한 아카시도 있는데 본 것 가지고 충격 먹어서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어서 자괴감 마저 들었다. 아카시가 욕실 문을 닫자 그는 벽에 기대어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앉았다.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있는 문에 얼굴을 기대어 그 안에서 나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아카시가 옷을 벗는 소리에 다시 그 일이 떠올랐다. 알몸으로 누워있는 아카시 주위에 있는 그 남자들이 너무 징그러웠다. 사진처럼 생생한 기억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괴로운 쿠로코는 무릎에 고개를 묻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는 동안 욕실 안에 있는 아카시가 말을 걸었다.
“쿠로코, 고마워.”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울 수 없어서 헛기침으로 애써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스렸다.
“저는 해준 게 없어요.”
쿠로코는 눈물이 나오려는 눈을 옷으로 꾹 누르면서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아카시 쪽에서는 대답은 없었다. 대화가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쿠로코는 반복적인 소리에 슬슬 눈을 감았다.
목욕을 끝내고 쿠로코와 아카시는 바로 저녁을 먹었다. 짙은 갈색의 월넛 식탁에는 의자가 네 개 밖에 없어서 쿠로코가 안방에 있는 어머니의 화장대 의자를 가져와서 앉았다. 별거 없는 소박한 서민의 식사였지만 아카시는 잘 먹어주었다. 외할머니가 해준 미역무침은 입에 대지 않아도 다른 반찬은 가리지 않았다.
쿠로코의 가족들도 차분한 사람들이라서 식사시간은 조용했다. 허나 어머니는 아카시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그에게 계속 말을 걸고 물어보았다. 그 질문들이 귀찮을 법한데 아카시는 웃으면서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밥을 먹으면서 오늘 밤은 어떻게 잘지 고민 하던 중,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른 저녁 시간이라도 주말이라서 이 시간에 찾아 올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다른 가족들이 미리 연락을 받았을 텐데 다른 가족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순간 쿠로코는 불안해졌다.
가족을 대표해서 아버지가 자리에 일어나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기 전에 인터폰을 확인하자마자 놀라셨다. 문을 서둘러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에게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주방까지 들릴 정도 크게 대답했다.
“○○경찰서입니다. 여기에 가출 청소년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경찰의 말에 쿠로코의 몸은 완전히 굳어졌다. 아카시의 집에서 쿠로코의 집주소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경찰까지 오다니.
집에 경찰이 오자 가족들은 당황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아카시만 침착하게 자리에 일어났다. 그는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저녁 감사했습니다. 다 먹지 못하고 먼저 자리에 일어나야 해서 죄송합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현관으로 가려는 아카시를 쿠로코는 따라가 붙잡았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지 마세요. 지금 가면 안됩니다.”
아카시는 대답하지 않고 쿠로코의 손을 풀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계속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가족들은 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현관에 있던 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테츠야, 지금 이 게 무슨 일이냐.”
그제야 아버지가 보였다. 지금 자신들을 도와 줄 사람은 그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카시의 손을 꼭 잡고 아버지에게 사정을 설명하려고 하는 차에 경찰 뒤에서 누군가가 나와 집안으로 들어왔다. 늘씬한 키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아카시 가의 집사였다.
“도련님, 모시려 왔습니다. 어서 가시죠.”
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카시는 쿠로코의 손을 쳐냈다. 그가 현관으로 가자 집사는 신발을 신은 아카시를 서둘러 밖으로 내보냈다. 집사가 형식적으로 쿠로코의 가족에게 인사하고 나가고 위압적으로 들어온 경찰도 별 말 없이 따라나갔다. 폭풍처럼 찾아온 그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집 안에는 적막함이 감돌았다.
할말을 잃은 아버지는 고개 숙이고 있는 아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어서 설명하라고 다그쳤다. 어이 없는 일에 화가 난 아버지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도 쿠로코는 아카시를 구해줄 수 없는 지금, 입이 열 개라도 말 할 수 없었다.
“어서 대답 안 해?”
“애비야 그만해라. 테츠야는 어서 방으로 돌아가라.”
결국 집안의 큰 어른인 외할머니가 나셨다. 아버지는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말에 어미니가 있는 식탁으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아직 서있는 쿠로코를 다독여주었다. 할머니 말대로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눈물에 점점 막혀지고 있었다. 쿠로코는 그제야 아카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뼈져리게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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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9. 14. 23:08[흑적] 나비처럼 날아 1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흑좌온 3회를 무사히 끝내고 왔습니다.
여러분.... 마감은 빨리 끝내야 합니다... 데드라인에 아슬아슬하게 하면 몸이 축나요..
암튼 그래도 백수라서 남아 도는 게 시간이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약속대로 흑좌온에서 낸 흑적소설본을 올리겠습니다.
1편은 맛보기로 공개한 분량을 올릴 거라 양이 좀 많습니다. 다음편 부터는 양이 이보다 많지 않을 겁니다...
공개를 하루에 한 편 씩 올릴 것이며 언제나 그랬듯이 책을 사주신 분들을 위해 결말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번 이야기도 재밌게 즐겨주세요.
쿠로코와 아카시는 같은 날에, 같은 중학교로 입학했다.
처음부터 같은 반이 아니었기에 농구부 활동이 아니라면 두 사람은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맞이한 가을은 유독 봄처럼 오후가 따뜻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농구부 연습을 위해 체육관에 갔을 때, 노란색이 가득한 그 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붉은색을 처음 보았다. 쿠로코는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두 번째 쉬는 시간. 쿠로코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벽으로 갔다. 아직 봄인데도 무척 더워서 더 힘들었다. 달아오른 몸을 차가운 벽에 기대고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T중학교의 농구부 훈련은 특히 1군 훈련은 중학생 레벨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에 비해 쿠로코의 체력은 같은 학년에도 못 미치는 레벨이라서 그 간극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2학년이 된 지금은 구토를 안하나 죽을 만큼 힘든 건 여전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야 때문에 속이 어지러웠지만 눈은 감지 않았다. 그의 시야 앞에 있는 농구부원들은 재능이 넘쳐서 하나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모이면 은하수 같은 그들 사이에서도 적색왜성처럼 붉고 차가운 이성으로 빛나는 아카시가 있었다.
거구들이 가득한 농구부에서 아카시는 쿠로코처럼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이었다. 그래서 더 그의 시선을 앗아가지만 단지 그 것 뿐은 아니었다.
수건을 가져오지 않아서 티셔츠 자락으로 얼굴 땀을 닦은 쿠로코는 멍해 보이는 눈으로 아카시를 관찰했다. 아카시는 상단에 가지런히 놓은 개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부장인 니지무라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꾸준한 관찰을 통해 쿠로코는 아카시가 말을 걸기 전 그 사람을 빤히 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전투기 측정기로 상대를 확인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니지무라와 간단하게 대화하던 아카시는 자신을 부르는 무라사키바라를 보았다. 이번에는 무라사키바라가 어미를 길게 늘이면서 말하는 것을 빤히 보고 있다. 압도적으로 키가 큰 그를 올려다 보는 거라서 고개를 많이 든 모습에 동안인 아카시의 외모가 더해져 귀여워 보였다.
그를 관찰하는 사이 쉬는 시간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카시에 정신이 팔려 물을 마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쿠로코는 속으로 기합을 주면서 벌떡 일어나 자리에 돌아갔다. 아무렇지 않게 아카시 옆에 가자 그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쿠로코에게 속삭였다.
“그만 좀 봐.”
“알고 있었습니까?”
“그런 눈빛이라면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채.”
그렇게 말한 그는 손등으로 쿠로코의 이마를 가볍게 치고 앞서갔다. 동급생에게 머리를 맞은 건데도 살짝 붉어진 아카시의 목덜미를 봐서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닿은 이마를 만지는 동안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렸고 그에 맞춰 연습을 위해 아카시의 반대편에 섰다.
***
그전부터 몇 번이고 아카시가 주의를 주었지만 이미 버릇이 된 나머지, 쿠로코의 시선은 언제나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몇 달 넘게 그를 관찰하다보니 그는 차가우면서 상냥했다. 서로 상반된 두 단어가 어울리기 힘든데 아카시는 정말 그랬다. 몸에 상냥함이 배어 있는데 선은 확실하게 그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를 계속 관찰하다가 딱 한번 봤던 건데 이틀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는 수다가 많은 사람이 아니지만 리더십이 있어서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에 따라 대화도 많이 나누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정말 필요한 말한 했다. 그 외 나머지 시간에는 입을 다물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주위로 평소보다 더 견고한 벽을 세웠다.
그래서 두 번째로 아카시의 이상한 모습을 본 오늘, 쿠로코는 아침부터 그를 관찰하기 바빴다. 여전히 노란색이 가득한 체육관에서 견고한 벽을 세운 아카시만은 화려한 색채를 잃은 것 같았다.
자신이 지금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아카시를 관찰하던 중 쿠로코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검은 바지를 입고 있는 그의 뒷부분에 작은 원모양으로 마치 먹물이 퍼진 것 같은 얼룩이 있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는 오후라서 어두운 체육관 불빛 때문에 아직 다른 사람들은 보지 않은 것 같았다.
혼자서 그 것을 발견하고 당황한 쿠로코와 달리 입을 꽉 다문 아카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러다가 다른 사람이 알아챌 까봐 걱정되어서 그에게 빨리 다가갔다.
자기에게 가까이 온 쿠로코를 발견한 아카시는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다. 눈꼬리가 올라간 고양이형 얼굴로 노려보니 꽤나 무서워 순간 움찔거렸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노려보고 있어도 쿠로코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아카시 군. 뒤에 뭐가 묻었습니다. 확인해보세요.”
쿠로코의 말에 드디어 바지에 이상한 것이 묻을 것을 눈치챘는지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몸이 완전히 경직되어서 손에 든 농구공이 없었더라면 사시나무 떨듯이 온 몸을 떨었을 지도 몰랐다.
평소와 다르게 침착하지 못한 아카시를 눈 앞에서 본 쿠로코도 덩달아 당황했다. 괜찮냐고 어깨를 잡자 그는 부장에게 말하지 않고 재빠른 걸음으로 체육관을 나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부원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쿠로코도 서둘러 뒤를 쫓았다.
같이 체육관을 나간 쿠로코는 달려가서 제 몸으로 아카시의 뒤를 가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모르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당장 돌아가.”
꽉 다물고 있던 입을 드디어 열어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쿠로코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저라도 뒤를 가려줘야 할 것 같아요. 분명 햇빛에선 잘 보일 겁니다.”
쿠로코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니 아카시는 노려보기만 했다. 하는 수 없지 그는 더 이상 쿠로코를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후 아무 대화 없이 따라가고 있는데 아카시가 여벌의 옷이 있는 부실이 아니라 화장실로 향했다. 뒤에서 쫓아가는 쿠로코가 옷부터 가져가야지 않냐고 말해보았지만 대답도 없이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런지 이해 할 수 없어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문을 약하게 노크해보았다.
“아카시 군, 왜 그러세요? 어디라도 아프십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당혹감을 감추고 말을 걸었지만 계속 대답이 없었다. 계속 불러도 반응이 없으니 슬슬 답답해졌다. 쿠로코는 아카시가 안에 있는 화장실 칸에 이마를 대보았다. 이러면 그의 마음이 들리지 않을까.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는 문 앞에서 쿠로코는 한숨을 쉬고 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쿠로코는 체육관이 아닌 부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아카시를 대신해서 여벌의 속옷과 바지를 챙겼다. 혹시나 몰라 자신의 가방에서 일회용 휴지도 챙겨서 다시 화장실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칸의 문만 굳게 닫혀 있었다. 아카시는 아직도 이 곳에 있었다.
그가 있는 칸에 가서 쿠로코는 다시 천천히 노크했다.
“아카시 군. 접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쿠로코는 자신이 뭐하는 건가 싶어서 작게 한숨을 쉬고 그의 옆 칸으로 갔다. 그 곳이라면 변기 위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카시에게 쉽게 속옷과 바지를 전할 수 있었다.
“함부로 너의 가방과 사물함을 뒤져서 죄송합니다만 여벌의 옷을 가져왔어요. 여기 밑으로 건네 줄게요.”
자신의 말대로 그는 벽 밑의 틈으로 가져 온 것을 밀어 넣었다. 다 밀어 넣었으나 바로 가져가지 않았다. 반응이 없는 그가 혹시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쓰러진 것은 아닌가 싶어서 엎드려 안을 보려고 할 참에 그 안에서 아카시가 드디어 대답했다.
“고마워,”
그의 목소리에 계속 말이 없었던 그에게 서운하면서도 그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생각해보니 그에게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옆에서 쿠로코의 얼굴이 달아오르던 말던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맨 위에 올려둔 일회용 휴지부터 챙겼다. 그 때 엎드리고 있던 쿠로코는 그의 하얀 손에 피가 조금 묻은 것을 보았다. 아카시의 머리카락보다 붉은 피를 본 순간 너무 놀라나 비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재빨리 들었다. 바로 머릿속에서 아까 봤던 아카시의 바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게 정말 피라는 말인가.
놀라서 뛰는 심장을 쉽게 진정하기 힘들었던 쿠로코는 서둘러 화장실을 나갔다.
***
그 일이 있은 뒤 쿠로코는 나흘 동안 아카시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이틀 정도는 아카시가 아무 말 없이 철저하게 벽을 세우고 있어서 다가가지 못했는데 그 후부터는 둘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어색함이 가로막았다. 그래서 쿠로코는 멀리서 아카시를 관찰할 때마다 기도 어딘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조금 삐친 마음으로 오후연습을 끝내고 하교 할 때 학교 정문에서 아카시가 귀에 속 들어오는 목소리로 그를 불렸다. 정문 옆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는 웬일로 혼자 있었다. 밤도 삼키는 그늘에 그의 얼굴이 보지 않아 쿠로코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 전에 그를 빤히 보고 있던 아카시가 먼저 말했다.
“기다렸어 쿠로코. 시간 되지?”
전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에 쿠로코는 복잡한 심정과 빠르게 뛰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 나온 아오미네가 그늘 속에 있는 쿠로코를 발견하지 못하고 모모이와 그냥 가버리는 동안 아카시와 쿠로코는 반대 방향으로 같이 걸었다.
학교 근처에서 벗어나 주택가로 들어가기까지 같이 가자고 한 아카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쿠로코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라서 이 침묵을 스스로 깨지 않았다.
차도 다니지 못하는 골목길 앞까지 오니 별말 없이 따라 온 쿠로코는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중학생 된 애들이 뭘 하겠냐마는 뭐든지 해내는 아카시라면 상상보다 더 위험한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머리에 스쳤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들어가자 아카시가 말했다.
“고마웠어.”
주어 없이 말했지만 쿠로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닙니다. 단지…….같은 부원으로써 도와준 것 밖에 안됩니다.”
쿠로코가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말하니 그를 빤히 보고 있던 아카시는 살짝 웃었다. 어두운 골목이 그의 미소에 보랏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비밀로 해준 것도 고마워.”
“그 동안 저한테 말 걸지 않은 건 그 것 때문인가요?”
그렇게 물어보니 아카시가 그렇다고 인정했다. 말을 걸지 않는 이유가 자신을 믿지 않아서 그랬다는 말에 쿠로코는 조금 질렸다. 그의 반응을 읽었는지 덧붙어 말했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아.”
그렇게 말한 그의 낮은 목소리는 괴롭다고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에게 미안해졌다.
반 발자국 앞서 가는 아카시를 따라 골목길에서 나와 다른 골목길로 가자 쿠로코 집으로 향하는 상가가 나왔다. 상가 근처에서 주택가랑 이런 길로 이어지지는 몰랐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쿠로코에게 그가 말했다.
“이 일에 대해 보답해 줄 테니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막상 원하는 거라고 하니 잠시 고민이 되었다. 자신이 과연 아카시에게 어떤 것까지 바랄 수 있는 지도 잘 몰랐다. 고민에 빠져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아카시는 생각나면 메일로 보내라고 말했다. 그리고 쿠로코와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가볼게.”
“내일 봐요. 아카시 군.”
인사를 나누고 그는 미련 없이 갔다. 두 사람 사이에 난 틈으로 사람들이 메워졌다. 쿠로코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보이는 아카시의 뒷모습을 한동안 보고 있다가 자신도 갔다.
집에 가면서 쿠로코는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것을 써서 보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카시에겐 아무렇지 않은 거겠지만 쿠로코는 이 기회를 쉽게 쓰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고민으로 가득 차 자신을 치고 가는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 목 스트레칭을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 지나가고 있는 전자상가 쇼윈도에서 번쩍이는 TV가 보였다. TV안에서는 영화 광고가 나왔다. 어두운 거리를 하얗게 빛내는 광고를 계속 보고 있는 쿠로코는 광고가 끝나기 무섭게 손에 든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 메일을 보냈다.
***
주말의 번화가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쿠로코는 동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카시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갔으나 아카시는 그의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뒤에서 말을 걸자 그가 조금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아카시 군. 많이 기다렸죠?”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 좋은 버릇 아니야. 다음엔 주의해줘.”
“저는 평범하게 왔습니다만.”
쿠로코는 조금 서운한 마음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았다. 그래도 아카시가 놀라는 모습은 흔치 않았으니까 그런대로 좋았다.
아카시는 자신이 먼저 영화표를 예매했다며 번화가 안쪽에 있는 극장으로 앞서갔다. 반 발자국 쫓아가면서 그를 흘끗 보았다. 요즘 들어 그와 단둘이 있게 되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보상으로 본 영화는 생각보다 별로이었다. 작품성이 좋다고 해도 쿠로코에겐 그 점이 와 닿지 않았다. 영화보단 옆에 앉아있던 아카시가 자신이 잠시 졸았던 것을 알았을지 신경 쓰였다.
사람이 많이 몰려온 극장을 나오니 그 앞에 커다란 게임센터가 있었다. 1층에 있는 크레인 게임 안에 있는 인형을 멍하니 보던 쿠로코는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아카시에게 말했다.
“아카시 군, 잠깐 저기에 가지 않으실래요?”
쿠로코가 말하면서 게임센터를 가리키자 그는 조금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면 저라도 상처 받습니다. 나름대로 인형 뽑기에는 자신 있어요.”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야?”
자신 있는 말에 아카시는 호기심이라도 생겼는지 고양이 눈을 반짝였다. 쿠로코는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팔을 살짝 잡고 게임센터로 데려갔다. 아카시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눈치였으나 내치지 않았다.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크레인 게임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쿠로코는 드디어 가게 안쪽에 있는 큰 게임기 앞에 섰다. 투명한 유리박스 안에는 제법 큰 돌고래 인형이 있었다. 귀여운 얼굴을 한 돌고래 인형에 비해 인형을 뽑을 크레인은 집게가 두 개 밖에 없어서 약해 보였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카시가 팔짱을 끼고 크레인 게임기를 관찰하고 있는 사이 쿠로코는 동전지갑에 있는 동전을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게임기 안에 동전을 넣었다.
잠시 후, 크레인 게임기의 커다란 출구에서 돌고래 인형이 나왔다. 그 것을 동전 하나로 뽑은 쿠로코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카시에게 인형을 보여주었다. 아카시는 새삼 처음 안 그의 능력이 신기해서 칭찬 해달라는 눈빛을 마구 보내는 쿠로코에게 천천히 박수 쳐주었다.
“잘했어. 이런 것도 흔치 않는 능력이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건 원리만 알면 아카시 군도 쉽게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쿠로코는 아카시에게 한 수 가르쳐 줄 마음으로 다시 동전을 꺼냈다. 하지만 그가 이제 집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서 아쉽지만 인형 뽑기는 한 번으로 끝났다.
먼저 가는 아카시를 따라 게임센터를 나가면서 쿠로코는 그에게 방금 뽑은 돌고래 인형을 주었다. 인형의 귀여운 얼굴을 본 아카시는 조금 당황했다.
“나한테 주겠다고?”
“기념입니다. 영화 보여주신 것도 있고 또 집에 뽑은 인형들이 좀 많아서요. 이거까지 가져가면 처치곤란입니다.”
“그렇다면 왜 뽑았어. 나도 가져가는 건 곤란해.”
아카시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쿠로코가 고집을 끝까지 피워서 그의 품에 돌고래 인형을 안기게 했다. 그는 자신의 품에 안은 인형을 보고 계속 곤란해 했지만 그래도 선물을 받았다고 표정은 점점 환해졌다.
“분명 집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야.”
“그렇다면 몰래 가져가세요. 아무도 못 보게 닌자처럼 스윽-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큰 인형을 들고?”
나름 진지하게 한 말에 아카시는 그만 웃어버렸다. 미소를짓는 것 말고 크게 웃는 그는 처음 보았다. 그는 자신이 크게 웃은 것도 잊은 채 인형을 꼭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쿠로코도 집으로 돌아가면서 만나면 만날수록 아카시의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것 깨달았다.
다음주 월요일 아침에 연습이 시작하기 전 쿠로코는 아카시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인형은 안 들키고 잘 가져갔나요?”
그러자 아카시는 평소에 짓지 않았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성공했다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인형 때문에 웃음이 나왔는지 그는 미소로 무용담은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들키는 건 곧 시간 문제일거야.”
“들키면 어느 닌자가 선물로 줬다고 하세요. 간단하네요.”
그의 농담에 아카시는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이렇게 둘 만의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카시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 연습이 시작되어서 쿠로코는 그만 제 자리로 갔다. 웃고 있었던 아카시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갔다. 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표정을 바꿀 수 있는 그가 신기했다. 아까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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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2. 23. 09:44[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8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인어를 위한 소야곡도 이제 마지막입니다.
흑녹도 못쓰면서까지 붙잡고 있었던 이 글을 탈고했을때 정말 후련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치명적인 오타가 여기에 있었네요ㅠㅠㅠ 고치고 싶지만 책에도 이렇게 인쇄 되었을테니 그냥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놈의 글은 몇년을 써도 늘지 않네요ㅠ
아무튼 차원이동물이었으니 이런 결말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맨처음 이 것을 구상할때도 이 결말을 염두하고 썼거든요. 아마 이 글만 읽으면 이게 뭔가 하실겁니다.
그래도 앞서 낸 책에는 이 뒤까지 있습니다. 거기서는 서로 해피엔딩이 아니였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보네요. (에필로그는 책을 사주신 분들을 위해 비공개합니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PS. 인어를 위한 소야곡은 재고가 남아서 통판 중입니닼ㅋㅋ큐ㅠㅠㅠㅠㅠ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ㅇ
통판주소 - http://me2.do/xrBWoXc3
당연히 19금이므로 미성년자분들은 안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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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2. 21. 11:44[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7 [수정]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이번 설날을 잘 보내셨나요? 제법 긴 연휴입니다. 물론 저는 토요일에 나와 일하는 처지만요...
아무튼 이 말 하러는 게 아니라, 월요일에 7편을 올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ㅠ
잊고있다고 번뜩 생각하지만 이미 때는 이틀이나 지난 수요일이었고, 저는 시골에 있었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올려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올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 드릴게 있는데 이번에 올리는 7화까지 사실상 6화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인데 제가 깜박하고 이부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부득이하게 7화로 올리지만 다른 편보다 분량이 적어졌습니다... 게다가 이 페이지는 19금적 내용을 통채로 들어내서 더 분량이...
그래도 이틀만 참으시면 다음화를 볼 수 있으니 믿고 기다려주심이..헤헤헤
아무튼 적은 분량이지만 재밌게 봐주세요!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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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장편 2015. 2. 9. 09:39[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6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청흑온이 끝난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좋은 건 제 손에 존잘님들 회지가 있어서.. 후후후후 읽고 또 읽어도 좋으네요ㅠ 어서 6월달에 할 청흑온도 기다려봅니다ㅠ
이번 화는 나름 정치적 대화가 오고가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거라 이 화를 제일 신경쓰면서 써봤는데 잘 표현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ㅎㅎㅎ
아 그리고 이 화에도 조금 15금적 분위기가 풍기는 장면이 있는데 제 기준으로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비밀글을 따로 올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괜찮겠죠? ㅎㄷㄷ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길 바라며 이어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주에도 만나요~
하릴없이 궁녀가 서고에서 가져 온 책을 읽던 중에 오랜만에 누군가가 쿠로코를 찾아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인어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그동안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온다는 말에 벌써부터 긴장되었다. 게다가 이부상서이라면 일본에서는 총리 아니면 장관급 되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 앞에서 실수하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지나자 약속대로 이부상서 대감이 찾아왔다. 궁녀가 입혀준 대로 격식 있게 덧옷에 두건같이 생긴 모자까지 챙겨 입은 쿠로코는 1층에 있는 접견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원탁에 마주보며 앉은 두 사람은 궁녀들이 차와 다식을 차려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대감이 궁녀가 따라 준 차를 마시자, 쿠로코도 그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따라 차를 마셨다.
향기로운 차향이 이번만큼은 숨이 막혀서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신 쿠로코가 찻잔을 내려놓자 그는 쿠로코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두 번째 만나 뵙는 건데 전보다 좋아보여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별거 없는 소인에게 이렇게 좋은 차도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설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상냥하십니다.”
두 번째 봤다고 했지만 쿠로코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는 워낙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만났고 처음에 여기에 적응하기 전이라 정신이 없었기에 잘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그에게 미안해진 쿠로코는 이번에야 말로 얼굴을 확실히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쿠로코가 마른 침을 삼키며 감사하다고 하자 대감이 푸근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주었다. 안심이 되었다.
“전설과 달리 인어님이 자애로운 분이시라는 소문이 이미 온 나라에 퍼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 인어님의 그림이 어떤 미인도보다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전하와 둘도 없는 친우가 되었다는 소식도 같이 전해지고 있지요. 이는 이 나라의 큰 복 입니다. 인어님 덕분에 백성들이 이 왕실을 더욱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와서 한 것이 없습니다. 다 전하와 대감님들 덕분입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쿠로코도 왕실 사람들을 칭송해주자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펴 본 쿠로코는 그의 앞에서 실수하지 않은 것 같아 안심되어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조금 긴장한 몸을 풀어도 될 것 같았다.
다시 차를 마시는 그를 따라 찻잔을 들어 마시고 나니 쿠로코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한순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저희들은 인어님이 전하와 더 이상 가까워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당황한 쿠로코는 그가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달리 대감은 쿠로코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쩐지 불안해졌다.
“인어님은 전하의 연동으로 온 것이 아니잖습니까. 더 이상 전하의 순진한 마음을 흔들지 마십시오. 전하가 인어님에게만 매달리다가 정무를 보시는데 소홀해지시는 건 신하로서 더더욱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그날 밤에 아오미네와 있었던 일을 꺼내자 충격을 받아 그 말에 차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아오미네에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마음이 부정한 것이라고 인정받자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물론 인어님께서 인간 세상에 대해 몰상식하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왕실의 법도를 존중해주셔야지요.”
대놓고 자신을 비난하는 그의 말에 쿠로코는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였다. 연륜으로 무장한 박력 앞에 자꾸만 작아졌다.
“인어님은 그저 여기에 앉아 전설로만 남으시면 됩니다. 그 외의 일은 저희들의 몫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대감은 바로 자리에 일어났다. 그가 평안재를 나가는 동안 쿠로코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 배웅해주지 못했다.
대감이 말한 대로 아무 것도 없는 쿠로코가 이 왕실에서 가지는 위치는 그저 선전용일 뿐이었다. 아오미네가 아무리 자신에게 애틋하게 대해주어도 연인으로서 그 옆에 설 수 없었다. 그리고 과연 이쪽 아오미네를 사랑하게 된 쿠로코의 마음은 올바른 것일까.
원래 세계에 있는 아오미네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닮은 그에게 짝사랑을 보상 받고 싶어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자신도 속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쿠로코의 마음은 부정한 것이었다. 그 마음으로는 아오미네에게 미안해서 절대 그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쿠로코는 아직도 접견실에 앉아있으면서 이제 떠나야 할 때라고 느껴졌다. 어서 동료들과 가족이 기다리는 원래 세계로 가 농구를 하면서 이 심란한 마음을 위로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차마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건 이쪽의 아오미네는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아오미네에게 달려가 다시 안기고 싶었다.
**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자주 자신의 침실로 초대했지만 쿠로코는 산책 갔다 와서 몸이 피곤하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저녁을 먹고 체해서 속이 좋지 않다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아오미네가 저녁시간에 맞춰서 순수 쿠로코가 있는 평안재로 행차했다. 쿠로코가 애초에 방문을 거절하기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많은 궁녀들을 대동해 온갖 음식을 가져왔다.
대문에 나온 쿠로코 앞에 위압적인 얼굴로 노려보는 그를 보니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했다. 만약에 방문마저 거절하면 그의 뒤에서 무거운 음식을 들고 있는 궁녀들이 먼저 쿠로코를 찢어 죽일 것이다.
1층에 있는 큰 테이블에 그들이 가져 온 음식들이 차려지고 어색한 저녁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그동안 초대를 거절한 것 때문에 단단히 삐쳤는지 평소와 다르게 아무 말이 없었다. 별로 그를 달래줄 말이 없었던 쿠로코도 말없이 식사했다.
대화가 없었던 식사는 순식간에 끝났고 아오미네는 형식적으로 평안재의 주인인 쿠로코의 허락도 없이 바로 2층에 올라가버렸다. 단단히 각오하고 온 듯 한 그의 뒷모습을 보던 쿠로코는 한숨을 쉬고 뒤따라 올라갔다.
2층에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전혀 도망 갈 틈을 주지 않는 것을 보니 기가 질렸다. 어쩔 수 없이 아오미네가 앉은 테이블에 앉자, 궁녀들은 아오미네의 명령에 따라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 넓은 곳에 아오미네와 단둘이 있으니 너무 어색해 낯설었다. 쿠로코가 여기에 있는 동안 그와 아오미네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같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 사이를 다시 어색하게 만든 쿠로코이었다.
하지만 이 어색함이 전에 찾아 온 대신(이름이나 직책언급)의 말대로 쿠로코와 아오미네가 지켜야 하는 거리이었다. 그동안 아오미네가 쿠로코에게 애정을 주어서 자신의 위치를 잊고 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 가야하는 쿠로코는 지금이라도 아오미네에게 떨어지기로 다짐했다.
스스로 술잔에 술을 채운 아오미네는 안주도 없이 마셨다.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그 답지 않게 더 마시지 않고 쿠로코에게 다가왔다. 단단히 화가 난 그 눈빛을 보니 쿠로코는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쿠로코의 팔을 잡아 당겨서 그가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게 했다.
“피하지마. 왜 갑자기 그래.”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하는 그의 얼굴에 쿠로코는 미안해져서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래도 속으로 여러 번 연습했던 말을 잊지 않고 그에게 해주었다.
“저는 전하의 노리개가 아닐 뿐더러…….”
“네가 왜 노리개야!”
노리개라는 단어에 아오미네가 말을 끊으면서 발끈했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더 세게 잡아당기는 그가 쿠로코를 결코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고 알려주는 거 같아 고마웠다. 하지만 고마움을 느끼기 전에 그에게 해줄 말이 아직 많았다.
“말 끊지 마세요. 아무튼 우리는 이렇게 단둘이 있을 만한 사이가 아닙니다. 어쩌다 한번은 실수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이제 저에게 이러지 마세요.”
말을 끝내면서 쿠로코는 팔을 잡은 아오미네의 손을 떼어냈다.
대화가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엔 전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오미네는 그 침묵 속에서 쿠로코가 놓아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묘한 그의 표정을 보니 쿠로코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냐.”
“그럼 무슨 사이인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아오미네는 당황하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역시 아오미네는 쿠로코와 몸을 섞었으면서도 그와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왠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왕의 입장에서 섹스라는 건 후사를 도모하기 위해서이거나 그냥 아무 감정 없이 욕구대로 밤을 보내며 즐기는 일 둘 중 하나 일 터. 그런 아오미네에게 쿠로코는 후자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밤이 늦었으니 여기에서 주무세요. 저는 아래로 내려가 자겠습니다.”
“아니, 돌아가겠다.”
덤덤하게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 아오미네는 별 말하지 않았다. 왔을 때와 달리 조용하게 떠나는 아오미네를 배웅해주면서 그의 등을 보는데 가슴 한쪽이 시렸다.
아오미네에게 미움을 받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이게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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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쿠로코를 깨웠다. 야심한 시간에는 평안재에 절대 누구도 들어 올 일이 없었기에 쿠로코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황급히 뒤로 몸을 빼고 옆을 돌아보자 어두운 방, 자신의 앞에 아오미네가 있었다.
“무슨 일 입니까.”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서 입술이 떨리는 쿠로코는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아오미네는 대답대신 쿠로코의 팔목을 잡고 침대 밖으로 꺼냈다.
그는 말도 없이 얇고 부드러운 이불을 챙겨 쿠로코 머리에 덮어주고 1층으로 끌고 갔다. 아래로 내려가니 오늘 불침번인 궁녀 두 명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라고 물어보았지만 아오미네가 대답도 듣지 못하게 끌고 가버렸다.
궁전 안은 아직도 어두웠고 멀리서 초롱 안에 붙여둔 불빛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달이 반달이라서 어둠에 익숙해지면 발밑 정도는 보였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건물 뒤로 가는 아오미네에게 쿠로코는 다시 한 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쿠로코에게 조용하라고 속삭였다. 뭔지도 알려주지 않는 그에게 짜증이 났지만 전에 그를 돌려보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잠자코 따라갔다.
그렇게 궁 외곽으로 가는 아오미네는 야간 순찰을 도는 금군 병사들이 보이면 왕이면서도 그들을 피해 숨었다. 쿠로코는 점점 아오미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이끄는 아오미네를 따라 궁을 보호하는 궁벽 구석에 도착하니 흙을 덮은 판자로 가린 개구멍이 있었다. 금군 병사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는 궁 안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개구멍이 있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아오미네는 판자를 치우고 제법 큰 개구멍에 고개를 넣어 밖을 살펴보았다. 밖에는 어떤 위험요소도 없는 걸 확인한 아오미네는 다시 나와 머리에 묻은 흙을 털면서 쿠로코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다.
“좀 있으면 무사들이 여기 지나가니 어서 들어가.”
“도대체 뭐하는 건데요.”
“산책이야. 산책.”
또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자, 쿠로코는 조금 화가 나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굴하지 않고 직접 쿠로코의 등을 밀어 개구멍으로 집어넣었다.
어쩔 수 없이 어두컴컴하고 좁은 땅굴을 지나가는데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흙덩이들이 들어와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뒤에서 아오미네가 세게 엉덩이를 밀고 있어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이윽고 아오미네까지 어찌어찌 순찰하고 있는 금군 병사들에게 걸리지 않고 잘 빠져나왔다. 궁 밖은 나무가 빽빽이 자란 숲 속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이파리들 때문에 숲 안에는 달빛조차 들지 않아, 여름인데도 숲은 싸늘해 보였다.
숲을 보고 있는 쿠로코에게 묻은 흙을 털어주던 아오미네는 그에게 따라오라는 식으로 먼저 앞으로 나갔다. 쿠로코는 그런 아오미네를 급하게 불렸다.
“숲 안으로 들어가시게요? 너무 어두워서 위험합니다.”
“걱정 마. 이미 여긴 수백 번 넘게 돌아다녔어.”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자신의 뒤에 있는 쿠로코의 손을 덥썩 잡아 자신에게 오게 했다. 어느새 쿠로코의 어깨에 팔을 올린 그는 곧장 숲 안으로 들어갔다.
아오미네는 초행인 쿠로코를 위해 한 발짝 조심히 걸었는데 그런 그의 배려심보다, 그의 품에서 나는 살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시원한 나무 냄새와 남자의 땀 냄새가 온몸을 흠뻑 적시듯이 풍겨와 쿠로코는 정신이 없었다.
두 번 다시 이렇게 붙어있지 말자고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고작 냄새에 허벅지가 떨리도록 반응하다니 그도 별 수 없는 남자였다.
그렇게 아오미네를 따라 한참 숲 속을 걸어가자 드디어 숲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어두운 숲 속에 있어서 그런지 바다에 반사된 달빛이 밝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나온 곳은 작은 모래사장에 이어진 곳이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바다는 바람도 불지 않아 잔잔했다. 자장가 같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모래사장 위를 걸어갔다.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쿠로코는 아오미네와 붙어 있는 것이 어색했다. 자신의 어깨에 올린 아오미네의 팔을 내리고 그에게 떨어지려고 했지만 아오미네는 강한 힘으로 쿠로코를 더 끌어 당겼다.
사람 맘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그가 미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다를 볼 수 있어서 나쁜 기분이 파도에 깨끗이 씻겨갔다.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는지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보고 좋냐고 물었다.
“네, 바다도 예쁘고 밤에 파도소리 듣는 것도 좋네요. 전하가 절 납치 한 것만 빼면요.”
“네가 사람 맘을 몰라주니까 그런 거야. 순순히 따라와.”
이기적인 그의 대답에 쿠로코는 기가 찼다. 그래도 심호흡을 하면서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어색한 상태에서 모래사장의 끝까지 걸어가니 큰 절벽 밖에 없었다. 궁이 있는 절벽에 비하면 크기는 작아도 제법 큰 절벽을 본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왜 이 곳으로 왔는지 더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쿠로코의 어깨에 두르던 팔을 내리고 대신 손을 잡고 절벽을 끼면서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쪽으로 가나 싶었는데 마침 썰물 때라 바닷물이 어느새 멀리 있었고 절벽 앞에는 잠겨 있는 바위들이 드러났다.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데리고 그 쪽으로 올라갔다. 아직 물기가 있어서 미끄러운데 그는 겁 없이 성큼성큼 갔다. 그래도 자기 페이스에 맞춰 가지 않고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쿠로코가 넘어지지 않도록 중간에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바위 위를 얼마 가지 않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절벽 가운데에 동굴을 있었다. 달빛이 살랑살랑 들어가는 동굴을 본 쿠로코가 아오미네에게 가자고 한데가 여기냐고 물어보자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자기에게 한 번 대들었다고 여기다 사람을 묻어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왜 동굴을 낮에 안가고 이렇게 어두울 때 다른 사람들 모르게 왔냐고 물어볼 게 많았지만 아오미네가 무작정 동굴 안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차마 말하지 못했다.
동굴 안은 달빛을 가린 두 사람의 실루엣 주위에 비추는 빛 말고는 칠흑같이 어두워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싸늘한 바람도 안에서 불어와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손을 꽉 잡았다.
“음, 아직 달이 기울기를 더 기다려야하나.”
“여기에 뭐라도 있습니까.”
“없으면 굳이 올 필요가 없지.”
동굴 안에 들어가는 게 다가 아닌 모양인데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자신에게 뭘 보여주고 싶어 하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동굴에서 달이나 보려는 건 아닐 것이고.
동굴 안과 밖에 있는 달을 번갈아 보던 아오미네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동굴 안으로 더 들어가려고 했다. 달빛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가려는 그가 위태로워 쿠로코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가지 말라고 버텼다.
아오미네는 오히려 걱정 말라며 쿠로코도 동굴 안으로 끌어 당겼다. 그때, 달빛이 가리던 두 사람이 옆으로 가자 달빛은 더 동굴 안으로 들어 동굴 바닥에 있는 웅덩이를 비추었다. 웅덩이에 반사된 달빛들은 동굴 벽을 비추었다. 거기에 동굴 벽에는 수정같이 반짝이는 돌들이 박혀 있어서 또다시 달빛을 반사했다.
순식간에 밝아진 동굴을 본 쿠로코는 홍휘궁과 다른 별세계에 온 것 같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옆에 아오미네가 손 잡아주는 것도 잊은 채 주위를 돌아보는 데 정신을 팔렸다. 그러다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잡아 당겨 짧게 입맞춤했다.
“어때?”
“아름답습니다. 이런 데도 있다니…….”
“내가 왜 여기 온 지 알아?”
“네?”
쿠로코가 얼떨결에 대답하는 사이 아오미네가 허리띠에 달아두었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가락에 집은 걸 조심스럽게 보여주었는데 그건 얇은 한 쌍의 옥 가락지였다.
가락지를 보고 놀란 쿠로코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그는 잡은 쿠로코의 손에다가 가락지 중 한 개를 껴주었다. 약지에 끼어진 가락지는 딱 맞았다.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자신의 새끼손가락에도 낀 같은 가락지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썰물 때만 나타나는 동굴에 달빛이 가득 찰 때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같은 가락지를 나누어 끼면 그 둘은 영원한 연인이 된다.’”
“……전하.”
“이제 우리 연인 사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게 아니라.”
쿠로코는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자꾸 울컥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이 파르르 떨리는 쿠로코의 손을 꼭 잡아 준 아오미네는 그런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가락지를 보던 쿠로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오미네와 눈을 마주보자 아오미네는 강한 두 팔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이젠 날 피하지마. 이대로 우리 평생 함께하는 거야,”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는 기뻤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미안했다. 자신은 혼자 힘들어지기 싫어서 남의 말에 휩쓸리고 그를 피하려고 만했는데 아오미네는 그런 쿠로코를 잡아주고 사랑해주었다. 겁쟁이인 자기를 사랑해주는 그가 고마운 쿠로코는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덮고 온 이불을 동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쿠로코를 앉혔다. 그리고 그는 쿠로코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쿠로코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왼쪽 어깨를 잡고 점점 가까이 왔다.
반사된 달빛에 빛나는 아오미네는 누구보다 멋졌다. 아오미네의 입술만 보이던 쿠로코는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닿은 건 입술이 아니라 두 사람의 이마였다.
“쿠로코, 심장이 엄청 뛰는 데.”
심장소리를 들키자 입맞춤을 기대했던 속마음도 들킨 것 같아서 쿠로코는 최대한 철면피를 깔고 변명했다.
“그거 제 꺼 아닙니다.”
“아, 그럼 이것도 내 거네.”
쿠로코의 어깨를 잡던 아오미네의 손이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심장이 있을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크고 뜨거운 손바닥으로 쿵쾅쿵쾅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그에게 전해졌다.
아오미네는 가슴팍에 손바닥을 대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손을 쿠로코의 옷깃 안으로 넣었다. 아오미네의 두터운 손끝이 닿은 맨살에서 아찔한 느낌이 전해졌다.
안으로 들어간 아오미네의 손 때문에 쿠로코의 옷은 점점 옷깃이 벌어졌다. 그의 손이 더 밑으로 내려가 쿠로코의 허리를 감싸는 동시에 다른 손이 옷고름을 풀었다. 파도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쿠로코의 옆구리를 타고 밑에 떨어졌다.
아오미네는 천천히 쿠로코를 눕혔다. 동굴 바닥은 울퉁불퉁했으나 이불을 깔아서 누울 만했다. 바닥에 누운 쿠로코는 잊지 않고 아오미네의 허리띠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더 뻗어 옷고름을 풀어주는 동안 아오미네는 자신의 허락 없이 옷을 벗기는 쿠로코에게 책망하지 않았다.
옷자락에 숨겨놓은 그의 근육이 잘 발달되어 탄탄한 몸에 쿠로코는 저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좀 더 가까이 와주세요. 저도 만져보고 싶습니다.”
아오미네는 군말 없이 쿠로코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 상체를 굽히고 점점 가까이 왔다. 아오미네의 맨살이 쿠로코의 맨살에 닿으니 온기가 은근한 무게감과 함께 느껴졌다.
아오미네는 자신의 품속에 있는 쿠로코의 앞머리를 만져주다가 천천히 입술을 맞추었다. 거칠게 혀를 놀리지도 않고 입술을 깨물지도 않는 부드러운 입맞춤인데 술김에 급하게 했던 때보다 더 부끄럽고 발끝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입술과 함께 맞닿은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감을 깨닫고 흥분하고 있었다. 딱딱해지는 아오미네의 것을 느끼며 쿠로코는 오늘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더라도 순순하게 이 아오미네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떠오르는 해로 인해 어스름이 완전히 걷혀지기 전에 아오미네와 쿠로코는 재빨리 궁을 향해 뛰어갔다. 동굴에서 이것저것 하다보니까 어느새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왔고 그제야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오미네조차 궁 안에 있는 그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서 아무도 그가 궁에서 나온 걸 모르는 상태다. 이럴 때 그가 궁에 없다는 것을 알아채면 분명 큰 난리가 날 게 뻔했다. 오해해서 쓸데없이 주위를 들쑤시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아오미네가 자신보다 뜀이 느린 쿠로코의 손을 꼭 붙잡고 어떻게든 뛰어가니 결국 해가 뜨기 전에 개구멍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이번에도 쿠로코가 먼저 개구멍에 들어가고 곧 뒤이어 아오미네가 들어갔다. 흙먼지 다 묻어가며 지나가고 있는 데 어째선지 쿠로코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맘이 급했던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엉덩이를 밀어가며 땅굴을 나갔다.
그리고 아오미네는 개구멍 근처에서 쿠로코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마요시와 금군 병사들을 보았다.
“이번에는 여기였군요. 전하를 위해 흔적도 없이 메꾸어두겠습니다.”
실눈으로 호를 그리면서 빙그레 웃는 이마요시의 말에 아오미네는 표정을 구겼다. 이번에 만든 개구멍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오래 밖에 있어서 들킨 모양이었다.
“인어님도 너무 전하께서 하자는 대로 다 따라하시면 안되십니다. 그러다 나쁜 것만 배우세요.”
“아, 알겠습니다.”
이마요시의 말에 인정한 쿠로코의 말에 아오미네는 발끈했다.
하지만 장난 같은 대화도 잠시, 아오미네는 같이 온 궁녀들에 의해 자리에 일어나 은의궁로 갈 채비를 했다. 아오미네에 끌려왔던 쿠로코는 그 대신 금군 병사들 평안재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조심히 들어가고. 피곤할 테니 한 숨 푹 자고 있어. 쿠로코.”
“전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아오미네가 먼저 가자, 쿠로코도 금군 병사들과 같이 반대편으로 갔다. 그때까지 자리에 있던 이마요시는 어쩐지 아오미네를 따라가지 않고 쿠로코를 따라왔다. 쿠로코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는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쿠로코에게 말했다.
“전하가 먼저 인어님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에는 돌멩이에도 눈이 달렸고 소문은 궁녀의 걸음보다 빠릅니다. 그리고 제일 무서운 건 일식보다 사람의 마음입니다.”
한 마디로 조심히 행동하라는 말이었다. 쿠로코는 이마요시가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에 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이부상서가 생각났다.
두 사람만 있는 동굴에서 은밀한 사랑을 나누다가 갑자기 현실로 오자 숨이 막혀왔다.
잠시 쿠로코와 걷던 이마요시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대언사으로 가야겠다며 헤어졌다. 그가 멀어지자 쿠로코는 길게 한 숨을 쉬었다. 이제야 답답함이 가시고 숨이 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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