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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2018. 12. 17. 01:38[유현유진] 조각
머리가 너무 어지럽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감각이 바로 전해지지 않았다.
정신과 몸이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첫 각성한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마치 다시 태어난 듯했다.
오래된 포장도로만 있는 미개발 지역이라서 땅이 많이 거칠었다. 유현은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붙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목적을 잊어버린 바람에 무작정 감각이 원하는 대로 가고 있을 뿐이었다. 버려진 농지를 지나 겨우 소도시 초입에 들어왔다. 주위 풍경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해연 근처였다. 길가에 얼마 없는 사람들이 한 명씩 유현을 알아보았다.
기억이 도중에 끊긴 느낌이 기분이 너무 잡쳤다. 자신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한 것 같다. 이런 식의 정신계 공격은 아무리 불세출의 해연길드장이라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형한테 가야 돼.
문득 이상한 생각이 떠올렸다. 유현은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이 상황에 왜 형을 찾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태로 가다간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해연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 힐러를 불러서 치료를 받고 차분하게 다시 기억을 상기시키로 했다. 그래야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하고 있으니 흩어졌던 감각이 돌아왔고 두통도 가시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무시하고 꿋꿋이 길드 건물까지 걸어갔다. 해연 옆에 있던 건물이 자신의 기억때보다 달라진 것 같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느껴질 때, 마침 길드 건물 앞에 있는 유진을 발견했다. 그는 혼자 있었다. 형이 해연길드에 무슨 일이 있어서 왔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두 다리로 서 있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안심되고 기분이 조금 좋았다.
이어 건물 입구에서 자신과 똑 닮은 괴인이 나오고 있었다. 그가 형을 보고 웃었다.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유진에게 친근하게 구는 가짜를 본 유현은 분노가 일었다.
유현이 유진을 낚아챈 것과 가짜가 스킬로 불길을 일으킨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짜의 불길은 유현을 상처를 입히기엔 너무 약했다. 별 거도 아닌 힘으로 감히 자신의 행세를 한 가짜가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는 유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동을 보고 우르르 나온 해연의 길드원들도 당황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현 앞에서 살기를 띠우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성한이 방패를 세우고 가장 먼저 앞섰다. 모두 가짜를 보호하고 있었다.
유현은 일반인과 가까운 형 뿐만 아니라 경험이 많은 헌터조차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탄식했다. 해연마저 믿을 수 없다.
“네가 어떻게...”
품에 안은 형이 자신을 불렸으나 눈길을 줄 수 없었다. 대답 대신 푸른 버들잎을 썼다. 시전자 눈에만 보이는 나뭇잎을 사뿐히 밟고 공중에 뛰어올랐다. 유현을 따라 가짜도 푸른 버들잎을 썼으나 유현의 것과 달리 나뭇잎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디로 움직일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유현은 가짜의 버들잎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태웠다. 가짜가 쉬지 않고 버들잎을 날렸으나 소용 없었다. 유현과 가짜의 격차는 점점 멀어졌다.
“형, 뛰어내려!”
가짜의 말에 품 안에 있는 유진이 버둥거렸으나 F급의 힘으로는 유현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현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잡힌 유진이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냈다. 안절부절한 눈으로 유진의 상태를 살피던 가짜가 자신의 검을 유현에게 던졌다.
‘기간트 실드’
검이 유현의 머리에 닿기 직전에 황금색 빛이 유현과 유진을 감쌌다. 실드에 막힌 검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함께 가짜도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유현은 가짜에게 비슷한 선물을 주기로 했다. 단검을 꺼내 유진을 잡고 있는 팔뚝을 찔렸다. 이내 피가 검은색 불꽃이 되어 단창이 되었다.
“그만해, 한유현!”
혈염으로 된 창을 잡은 유현을 유진이 붙잡고 막으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가짜와 자신의 감각이 잠깐 연결되었다가 막혔다. 아까 당한 정신계 스킬 때문에 기분이 내내 불쾌했던 유현은 바로 그 스킬을 거부했다. 스킬은 바로 풀어졌으나 그와 함께 품에 있는 유진이 괴로워하다가 기절했다.
창은 유현의 손에 벗어나 가짜에게 날아갔다. 솜씨 좋게 몸을 비틀었으나 완전히 피할 수 없어서 날이 옆구리를 스쳤다. 그것만으로 혈염은 가짜를 삼키기 시작했다.
유현은 가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시선을 돌리고 높이 올라갔다. 기절한 형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숨 쉬고 심장박동까지 느껴지는데도 형이 이상하게 됐을까봐 무서웠다.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야 된다. 그런데 어디로?
커튼을 살짝 걷어서 창 밖을 보고 있던 중에 뒤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낡고 버려진 매트리스 위에 코트를 깔아 눕혀 둔 유진이 뒤척이고 있었다. 형을 이렇게 더러운 곳에 데려오고 싶지 않았으나, 무작정 병원으로 갔다가 세뇌된 해연 길드원들이 들어닥칠까봐 하는 수 없이 버려진 건물로 숨었다.
유현은 형에게 다가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나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형과 가까이 있는 것이 얼마만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유진이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있다가 살며시 눈을 떴다. 바로 인기척을 느끼고 자신을 보는 유현을 바라보았다. 형의 눈빛은 한없이 평온했다.
형이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다시 불안해졌다. 이제 멀리할 수 없으니 안전한 곳에 데려가 보호해야 할까.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을 잠긴 유현을 유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굴러가는 것을 보니 동생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언가를 알아챘는지 입술을 깨물고 참고 있는 듯했다. 감정을 감추려고 노력해도 다 드러나는 형의 슬픈 얼굴에 가슴이 쓰라렸다.
“유현아.”
유진이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정하게 부르면서 손을 올렸다. 유현은 형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차가운 손이 금세 온기에 따뜻해짐에 따라 쓰라린 마음도 편안해졌다.
“형, 미안해. 내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어.”
“그게 어떻게 네 탓이야. 다 내가 못나서 그렇지.”
유진은 옆으로 누워 빈 손으로 유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형의 팔이 편할 수 있게 고개를 좀 더 숙였다. 정돈이 되지 않아 곱슬거리는 머리를 다듬어주는 손길이 너무 좋았다. 유현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잡은 형을 손에 볼을 대고 살며시 기댔다. 다 큰 동생이 그러고 있는데도 유진은 유현을 내치지 않았다.
잠시 후,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현은 재빨리 형의 오금 아래에 팔을 넣어 가볍게 들어올렸다. 당황한 형이 괜찮다고 말해도 절대로 내려주지 않았다.
“그 다리로 어떻게 걸으려고 그래. 얌전히 있어.”
“무슨 소리야. 다리는...”
유진이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유현을 올려다 보았다.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이내 유진은 다친 한쪽 다리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자, 봐. 아주 멀쩡하지? 그러니까 어서 내려줘.”
형의 말을 믿기 힘들었는지 유현은 유진을 자신의 어깨에 올려서 안 떨어지게 고쳐 안았다. 자유로운 손으로 형의 바지 자락을 걷었다. 상처로 가득할 다리가 티 하나 없이 깔끔했다. 매끈한 다리를 보고 당황한 유현에게 유진은 주먹으로 등을 치며 내려달라고 말했다.
그제야 형을 내려준 유현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다리를 계속 살폈다.
“형, 다리는 이제 괜찮은거야?”
“너, 어디까지 기억나?”
형의 말에 따라 유현은 자리에 일어나면서 찬찬히 기억을 맞추어봤다. 공략팀과 던전에 들어가서 조금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를 만나서 고전 했었다. 힘이 부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형의 다리 생각에 정신이 없었던 유현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팀원들과 합이 맞지 않았다. 결국 그 단단한 검이 부러졌다. 그 이후부턴 기억이 끊겨져 있었다.
유현의 말을 들은 유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하는 유진의 눈치를 보는 유현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분명 형이 맞는데 얼핏보면 아닌 것 같았다.
유현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느낀 유진은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동생의 팔뚝을 가볍게 쳤다.
“우선, 나가자. 계속 여기에 있을 순 없잖아.”
유진이 먼저 나가기 전에 유현은 형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최대한 힘을 조절했으나 형은 균형을 잃을 뻔 했다. 형은 그런 동생을 살짝 흘겨보았다.
“형 다리 누가 고쳐준거야?”
동생의 취조에 형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어, 그냥 아는 사람한테 부탁했어.”
“설마 이상한 종교의 맹신자, 그런 사람은 아니지?”
“절대 아니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과보호냐. 네 형 멀쩡하다니까.”
유진은 질린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이 일일히 참견하지 말라며 화냈던 형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유현이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짓고 있으니 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동생을 무시하지 않고 그의 큰 손을 잡아당겼다.
“뭐 해. 어서 가자.”
형은 겨우 머리가 목덜미에 닿을 정도로 작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았다. 죄 많은 동생을 품어도 넉넉할 정도로 여전히 넓었다. 왜 그동안 이걸 애써 모르는 척 했을까. 유현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겨우 참으며 형의 손을 꼭 잡았다. 제법 세게 잡아서 아플 법한데 유진은 투정부리지 않았다.
폐건물 밖으로 나가마자 유진이 작은 편의점에 있는 ATM기에서 돈부터 뽑았다. 큰 키를 이용해 슬쩍 보니 형에겐 제법 큰 액수였다. 그런 돈이 어디서 났는지 낱낱이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러면 유진이 정말로 화낼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유현은 유진을 따라 마스크를 쓰고, 근처 헌옷 가게에 갔다. 남이 입었던 옷을 별로 입고 싶지 않았지만 이 근방에서 남자옷을 파는 곳은 이 곳 밖에 없었다. 유진은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후드티, 모자, 청바지, 운동화를 유현에게 쥐어주었다. 매일 슈트만 입었던 터라 이렇게 캐주얼하게 입은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커튼으로 겨우 가린 탈의실에서 옷을 입고 나오니 형도 이미 옷을 갈아 입은 상태였다. 그가 입은 옷도 유현과 비슷했다. 다만 베이지색 후드를 입은 것과 달리 연한 분홍색 후드티를 입었다. 형이 원래 분홍색을 입었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주인이 잘 어울린다고 적극 추천해서 입은 것이었다. 유진은 부끄러워했지만 확실히 화사해서 잘 어울렸다. 유현은 형이랑 비슷한 옷을 입은 것부터 기분이 좋아 저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가 나왔다.
그런 유현을 보고 주인과 유진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주인이 볼을 살짝 때리고 있는 사이, 유진이 서둘러 유현에게 안경을 씌웠다.
입고 있던 옷은 가게에 두고 나온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택시기사가 뒷자석에 탄 유현을 빤히 보았으나 옷차림 때문에 훨씬 젊어보여서 그런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평일 낮이라서 터미널에는 얼마 없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텔레비전에서 해연 길드 관련 뉴스가 나왔다. 유진은 손을 잡아 당겨 유현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형의 행동에 동생도 몸가짐을 조심했다.
터미널에 있는 버스 중에서 가장 빨리 출발 하는 건 김해/양산행 버스였다. 그 버스의 표 두장을 산 유진은 유현을 이끌고 바로 승차장으로 갔다. 이 시간에 버스를 타는 사람은 유현과 유진, 노인과 중년 여성 뿐이었다. 타는 사람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버스기사도 젊은 두 사람을 빤히 보았으나 별 다른 반응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설마 해연길드장이 이런 낡은 버스를 탈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테다.
유현은 유진이 하라는 대로 창가 자리에 앉았다. 형이 창문 커튼을 치면서 불편한 건 없는지 물어보았다.
“응, 이 정도는 괜찮아.”
“다행이다. 우등 버스라서 공간이 넉넉하네. 배고프지? 밥은 휴게소에서 대충 때울거니까 좀만 참아.”
형은 다 큰 동생을 세심하게 챙겼다. 이 순간 만큼은 해연의 길드장 자리도, S급 헌터의 의무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볼살이 올라와서 조금 앳된 형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단 둘 밖에 없었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가만히 얼굴만 보고 있으니, 형이 살짝 눈웃음 지었다.
“졸리면 자. 나중에 깨워줄게.”
“아니야, 안 졸려.”
동생의 안전벨트까지 매 준 형은 안심한 듯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조금 불만이었으나 이렇게 옆에 앉아 어깨를 맞대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윽고, 버스 엔진이 그르릉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움직이는 느낌은 유현에게 생소했다. 그럼에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곁에 형이 있기 때문이었다. 떨림에 몸을 맡기면서 유현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버스의 공기가 포근했다.
김해에 도착하니 까만 밤이 되었다. 저녁 시간도 훨씬 지나버렸다. 유진은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동생을 붙잡고 재빠르게 넓은 터미널을 벗어났다.
두 사람이 간 곳은 택시로 30분 남짓 걸리는 공항 근처 호텔이었다. 높은 건물을 보던 유현은 이 근방에 던전이 하나 발견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해연에서 관리하는 곳이 아니다보니 김해에 던전이 있었던 걸 잠시 잊었다. 그런데 근처에 던전이 있는 것치고 근처에는 제법 사람이 있고 차도 다녔다. 아무렇지 않은 주위 풍경을 보던 중 괴리감이 느껴졌다. 다시 유진이 유현의 손을 잡고 끌었다.
“뭐해. 들어가자.”
형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다고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괜히 형을 걱정시키지고 싶지 않았다. 유현은 마주보며 따라갔다. 이제 복잡한 건 더 이상 떠오르고 싶지 않았다.
유진이 체크인한 방은 작은 거실 같은 공간과 더블 침대 하나 있는 공간이 가벽으로 나누어져 있는 방이었다. 수중에 있는 현금이 얼마 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작은 방을 잡았다고 했으나 유현이 봐도 결코 작은 방은 아니었다. 그는 소파에 앉은 형에게 나중에 갚겠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돼. 너 만큼은 아니라도 나름 돈 많습니다.”
형의 재정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냥 가만히 들었다.
유현은 형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얼굴 좋아 보여. 다행이야.”
“걱정 하지 말라니까. 내가 누구 형인데 이 정도도 못하겠냐.”
“그래도... 내가 더 잘해주고 싶었어.”
“그럼 진작에 잘해주던가.”
유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유진이 벌떡 일어나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 배고파. 내려가서 밥 먹으러 가자. 넌 배 안고파? 가서 내가 사줄게.”
분위기를 띄우려는 형을 따라 자리에 일어날 참에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이고, 드디어 찾았다!”
재빠르게 형의 어깨를 한 팔로 껴안아 품에 감추고 단검을 꺼냈다. 실내이지만 여차하면 혈염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눈 앞에 있는 하얀 긴 생머리를 하고 둥둥 떠있는 낯선 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기가 떨어졌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이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감히 그를 공격할 수 없다.
“윤윤!”
유현의 힘이 풀리자 유진이 품에서 벗어나 오히려 동생의 앞에 섰다. 보호하듯이 두 팔을 벌리고 윤윤이라는 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잠깐만! 저녁만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줘.”
“내가 아무리 대장 김서방의 부하이지만 이번 건 못 들어줘. 쟤는 내 부하니까 데리고 갈거야. 태어난 지 얼마 안되서 어서 빨리 안정화시켜야 한다구.”
유현은 윤윤의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왜 저 사람의 부하인 건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었다고 하는 건지 도통 그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분명 해연의 길드장이고 한유진의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인데.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할게. 내 동생이란 말이야.”
유진의 말에 윤윤은 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위압감에 유현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유현은 윤윤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내 윤윤은 노기를 감추고 작게 한숨 쉬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대장의 진짜 동생은 조금 있다가 올거니까 그때까지만이야.”
그렇게 말한 윤윤은 창가로 날아가 등을 돌렸다. 두 사람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당혹스러운 눈으로 윤윤을 바라보고 있는 유현에게 유진이 동생의 두 손을 잡았다. 유현은 형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유현아, 우선 진정하고.”
“형, 지금 속고 있는거야. 내가 어떻게 진짜가 아니야? 그게 말이 돼. 정신차려!”
유현이 닥달하자 유진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갑자기 머리 속에 있는 기억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유현은 한유현과 함께 있었다. 해연길드장의 검으로서.
유진이 힘겹게 눈을 떴다. 울음을 견디는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 괴로워하는 형의 얼굴을 마주보자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유현의 상태를 느낀 윤윤이 서둘러 두 사람을 바라보았으나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네가 누구라도 넌 내 동생이야. 그것만은 절대로 잊지마.”
형의 목소리도 떨렸다. 유진의 말에 유현은 자신의 정체와 이 상황에 대해 직감했다. 너무 허무했다. 자신으로 인해 하루하루 힘들어 했던 형을 또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체념한 유현은 작은 목소리로 형에게 속삭였다.
“차라리 내가 진짜였으면 좋겠어. 이렇게 좋은 형인데...”
“미안해. 그래도 꼭 데리러 갈거니까 외로워도 잠시만 기다려줘.”
유진의 말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의 몸 주위로 안개 같은 기운이 감싸돌았다. 안개는 유현의 몸에 스며들어 모래로 만들기 시작했다. 유진은 서서히 무너지는 유현을 다급하게 껴안았다.
“내 동생, 한유현. 정말 사랑해.”
유현이었던 것은 모래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그 밑에는 모래 더미만 남았다.
유진이 모래 더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안을 파헤치자 가장 안쪽에 낡은 검조각이 있었다.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보니 이름에 ‘흑혈염제의 검조각’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지금은 흑혈염제라는 호칭이 없으니 이건 유진이 회귀하기 전에 유현이 썼던 검의 일부일 것이다. 어째서 회귀 전의 물건이 지금에서야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 관리자에게 물어보면 또 공간이 뒤틀렸다. 오류였다. 이렇게 말하겠지. 유진은 그 낡은 조각을 두 손에 조심스럽게 들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윤윤은 왜 그 검조각에서 유현의 모습을 한 도깨비가 나온 건지, 그 모습이 지금의 한유현과 왜 다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손으로 유진의 등을 쓸어내렸다.
“대장 김서방, 이제 그만 울어.”
“...안 울었어.”
유진은 자리에 일어나 유현이 있었던 소파에 앉았다. 그의 기운이 남아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윤윤은 둥둥 떠 있는 상태로 유진을 마주보았다.
“곧, 대장 동생이 올 것 같은데 다른 데로 옮겨줄까?”
“그냥 여기 있을 게.”
“그럼, 난 간다.”
“잠깐만.”
사라지려는 윤윤에게 유진이 붙잡았다. 그의 앞에 두 손을 내밀어 낡은 검조각을 보여주었다.
“그럼, 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나중에라도...”
“걔는 죽었어. 도깨비는 심장이 찢어질 정도로 슬픔을 느끼면 죽어버려. 다신 도깨비가 되지 않을거야.”
윤윤의 단호한 말에 유진은 고개를 숙여졌다. 긴 한숨을 쉬던 유진은 검조각을 윤윤에게 줬다. 동생의 물건인데 줘도 되나는 윤윤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데 흘려가서 이상한 곳에 쓰이면 안되니까 네가 처분해줘.”
“괜찮아?”
“응.”
윤윤은 자신이 도깨비로 만든 검조각을 소중히 들고 곧바로 사라졌다.
호텔방에 홀로 남은 유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동생이 방문을 부수고 들어올 때까지 계속 얼굴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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