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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농/단편 2015. 2. 21. 12:01[청흑] 공유감정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이번에 올리는 글은 작년초 서코에서 급하게 중철본으로 냈던 책이었습니다. 표지도 급하게 하는 바람에 그지같이 했구... 그래서 전혀 팔리지 않았던 책이었습니다. 사실 저라도 그런 책은 사지 않았을 거에요 ㅋㅋㅋㅋ 결국 이 책들은 바로 처분해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때 부족함이 많았던 책을 사주신 지인분들 정말 감사하고 죄송합니다ㅠㅠ 진짜 제가 더 맛난거 많이 사드릴게요ㅠㅠ
어째든 거의 1년동안 묵혀둔 글을 이제야 생각나서 올립니다. 아마 이 글은 현재 버려두고 있는 네이버블로그에도 올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재밌게 봐주세요.
그리고 맛점-입니다 헤헤헤
모든 게 재미없었다. 새 교복을 입고 새로운 학교로 들어가서 백넘버 5가 새겨진 검은색 유니폼을 받고, 새로운 녀석들을 만나도 아오미네 다이키의 흥미를 끌 수 없었다. 지루함에 하염없이 하품이 나오고 별 이유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같이 토오학원 고등학교로 진학한 소꼽친구인 모모이 사츠키가 아오미네에게 앞으로 같이 팀플레이할 농구부원들이랑 인사라도 하라고 닥달했지만 그는 그마저 귀찮았다.그런 아오미네에게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을 하면서 좋아하는 농구를 하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 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농구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흥미를 잃었다. 농구가 재미없기때문에 모든 게 재미없었다는 것이 맞았다. 아오미네는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는 게 괴로웠다.
모모이가 감독의 명령이라며 틈만 나면 옆에서 방과 후에 체육관에 오라고 떠드는 바람에 그녀에게 진 아오미네는 결국 처음으로 농구부원들이 연습하고 있는 체육관으로 갔다. 교복을 입고 있는 그와 달리 부원들은 체육복을 입고 열심히 패스 연습했다. 그런 그들에게 불쾌한 땀냄새가 나 아오미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감독이 아오미네에게 연습시간에 오라고 한 것은 그가 아무리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해 바로 레귤러선수가 되었어도 신입부원이면 적어도 알고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을 배우기 바람이었다. 감독의 말에 아오미네는 자기는 연습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으로 들어왔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감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연습과 부원으로서 해야하는 일은 다르다고 단정지었다. 아오미네는 감독이 보이는 앞에서 대놓고 열 받았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허나 혈기 왕성한 그보다 연륜이 있는 감독은 무시하고 모모이를 시켜 다른 사람을 불렸다.
감독의 명령대로 모모이는 체육관안을 돌아다니며 그 사람을 찾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름을 외치면서 찾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이름은 쿠로코이고 아오미네와 모모이보단 선배인 듯했다. 기껏 왔는데 하는 게 선배나 소개 받는 귀찮은 일이라고 하니 아오미네로선 점점 짜증이 밀려왔다. 중학교때부터 선배라는 건 그에게 부담이었다. 선배가 있어봤자 그는 그들에게서 배울 게 없었다. 실력으로만 인정을 받는 스포츠 계에서 어차피 아오미네를 농구 실력으로 이길 수 있는 선수는 고등학교 내에서 없었다.
꽤 오랫동안 아오미네는 쿠로코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 모모이를 말없이 보고 있는데 그 때 뒤에서 감독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옆에서 자료를 보고 있던 감독도 놀랐는지 조금 당황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쿠로코 군, 매번 뒤에서 나타나면 놀랍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다음부턴 주의하겠습니다.”
“뭐야, 전혀 검지 안잖아!”
감독이 부른 그 선배는 농구부원에 맞지 않는 작은 체구였고 쿠로코라는 이름과 달리 옅은 하늘색 머리와 피부가 다른 사람보다 하얀 남자였다. 피부가 하얗다고 해서 예쁘장하다는 게 아니라 피부색 때문에 존재감이 옅어보였다. 얼마든지 눈 앞에서 투명인간이 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감독은 아오미네에게 이 사람이 쿠로코 테츠야이며, 그 보다 선배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아오미네가 부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알려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오미네와 같이 그 말을 들은 쿠로코는 감독 옆에 있는 그를 빤히 보다가 다시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감독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아무 감정없이 빤히 보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부담스럽거나 싫다고 표현하면 이쪽에서도 알아서 맞받아칠텐데 오는 게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아오미네는 그렇다면 이쪽에선 제멋대로 할 거라고 다짐했다.
아오미네의 개별 교육 담당이 된 쿠로코는 연습은 잠시 멈추고 다른 부원들의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게 구석으로 그를 데려가 농구부 주장인 이마요시를 비롯해 현재 토오농구부 레귤러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체육관을 나와 부실이 어디에 있고, 앞으로 아오미네가 쓸 캐비넷이 어떤 건지 알려주었다.
쿠로코가 힘없는 목소리로 단조롭게 가르쳐주고 있는 동안 아오미네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어차피 연습에도 잘 안 나오는 것만큼 부실에도 잘 가지 않을 것 같아서 어디에 있는 지 자기가 쓸 캐비넷은 어떤 건지 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이라도 알았는지 부실 안에서 공동으로 쓰는 물건들이 무엇이 있고 어디에 있다고 말하던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아오미네도 표정을 굳히고 그를 내려다 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쿠로코였다. 그는 다시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물품에 대해 마저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오미네는 어떤 반응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어서 적잖이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아무튼 아오미네에게 쿠로코는 감독보다 더 부담스럽고 모모이보다 더 짜증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로부터 아오미네가 모모이의 닥달에 못 이겨 방과후에 체육관에 오면 어김없이 쿠로코는 그에게 다가가 부활동에 관한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가르쳐줬던 것 그대로 처음부터 주장이 누구이며, 부실은 어디에 있고, 아오미네의 캐비넷은 어디에 있고, 부실에 있는 물품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지를 반복적으로 가르쳐주었다. 같은 내용을 가르쳐주는 중간에 전체 토오 농구부원들, 부실을 사용할 때 주의점과 아침, 방과후, 주말 연습시간에 대한 정보를 추가해서 가르쳐주기도 했다.
대충 교육 받았던 아오미네는 계속해서 같은 걸 가르쳐준 쿠로코에게 버럭 화내며 그만하라고 했더니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도 그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교육 받는 태도가 불성실해서 한번 가지고는 못 알아 들을테니 계속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 때 만큼은 쿠로코가 후배인 자기에게 쓰는 경어조차 듣기 싫어졌다.
결국 쿠로코 때문에 그렇게 듣기 싫은 교육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록 반복해서 들은 아오미네는 억지로 알고 싶지 않아도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다 주말에 본가에서 늦잠을 자고 있다가 우연히 시계를 보고 주말 연습시간이구나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 했을 땐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나 싶어 자괴감과 함께 쿠로코에 대한 분노가 점점 쌓여갔다.
그래서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 교육을 하려 온 쿠로코를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옆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걸 알고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 들리도록 노래를 틀었다. 레귤러 선수이지만 후배 주제에 선배인 자신을 정말 대놓고 무시하는 걸 쿠로코가 모를리가 없었기에 그는 아오미네의 무례함을 보고 그제서야 무표정을 치우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처음으로 쿠로코가 보여준 감정의 표현이었다. 비록 좋지 못한 감정이라도 그것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왠지 아오미네를 즐겁게 만들었다.
토오학원은 전원 기숙생활을 해야하는 그런 학교는 아니었지만 1학년은 집이 어디에 있든 무조건 기숙생활을 해야했다. 그건 집이 이 근처인 아오미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주는 맛없는 저녁급식을 먹고 급식실에서 홀로 나온 아오미네는 소화도 시킬 겸 학교 안을 산책하기로 했다. 급식시간동안 산책하는 학생은 아오미네 말고도 제법 많았고, 출입구 쪽에는 당직 선생들이 학생들이 무단으로 학교밖으로 외출하지 않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과 같이 있는 게 어색한 아오미네는 그들이 자주 가지 않을 체육관 쪽으로 갔다.
토오학원에는 농구부만 있는 게 아니였다. 그래서 고시엔이 얼마 남지 않아 체육관 근처에서 야간 훈련을 하고 있는 야구부를 보면서 아오미네는 눈살을 찌푸리고 결국 농구부가 쓰는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무심코 오늘은 저녁 연습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 그는 체육관의 불이 반정도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그러면서 과연 누가 미련하게 연습하고 있는지 창문을 통해 살펴보니 쿠로코가 혼자서 드리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방과 후 체육관에 올때 마다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데리고 어떻게든 교육을 시키려고 했기때문에 아오미네로선 그가 연습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첫인상에서도 느꼈듯이 쿠로코의 농구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혼자서는 드리블을 곧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렇게 느린 속도로는 사람을 상대하는 건 어림도 없다. 그리고 드리블하다가 점프슛을 날리는 폼도 정확하지만 전혀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정도 실력이면 토오는 물론이거니와 중학교 때도 절대 레귤러가 될 수 없었을 터였다.
이렇게 실력이 형편없는데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건 그만큼 농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거지.
아오미네에겐 이제 사라진 그 마음을 저런 실력의 쿠로코가 가지고 있다는 느낌에 질투가 났다. 그래서 연습하고 있는 쿠로코를 방해하고 싶었다.
잠기지 않는 체육관 문을 힘주어서 큰소리가 나도록 열자 쿠로코는 드리블하다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투스텝을 하고 말았다. 아오미네는 그런 그를 보고 그래도 손에서 공을 놓치지 않는게 용하다 생각했다.
“네가 웬일로 체육관에 스스로 왔습니까.”
조금 톤이 높아진 쿠로코의 말에 단번에 대꾸하지 않는 아오미네는 체육관 입구에 몸을 기대어 결코 안으로 들어오려고 온 게 아님을 어필했다.그리고 그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보는 쿠로코에게 자신이 질문했다.
“뭐 하러 열심히 해. 완전 형편없던데.”
날이 선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가 시선을 살짝 내리고 보일듯 말듯하게 웃었다. 아마도 아오미네의 말대로 형편없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조적으로 웃고 있는 게 맞을 것이다.
“좋아하는 걸 더 잘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쿠로코의 대답을 들으니 아오미네는 목 안쪽이 꽉 막혔다. 마치 없애버리고 싶던 자신의 미련함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듯했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아오미네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자신을 향한 예리한 감각과 농구공이 마룻바닥을 튀는 짧은 소리가 들러서 다시 돌아보니 농구공이 빠른 속도로 정확히 자신에게 날려왔다. 아오미네는 무의식적으로 공을 잡았고 그런 그를 쿠로코가 흐뭇하게 보았다.
“아오미네 군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쿠로코의 말이 아오미네의 귓속에서 울리고 탄력을 받은 공으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공이 떨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자꾸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쿠로코가 짜증이 나서 체육관 입구에서 골대를 향해 공을 힘껏 던졌다. 그가 한 손으로 던진 공은 매끄러운 포물선을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힘들게 연습 같은 거 안 해도 누구보다 잘하니까 소용없어.”
“농구가 재미없습니까?”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가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미련없이 뒤돌아 체육관을 떠나는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한참을 체육관 입구를 보고 있던 쿠로코는 아무 표정 없이 아오미네가 던진 그 공을 주었다.
그날 이 후로 전혀 체육관을 들리지 않았던 아오미네에게 모모이가 이번 주 토요일에 연습 시합이 있으니 이번만이라도 참가하라고 애원했다. 귀찮으니까 따라붙지 말라는 그에게 모모이가 이번 연습 시합은 도쿄 3대 왕자 중에 하나인 센신칸이랑 할 거라고 말해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습경기 당일인 토요일이 되자 아오미네는 아예 집에도 가지 않고 남자기숙사에만 있었다. 남자 기숙사엔 여학생이 들어올 수 없어서 모모이도 들어올 수 없기에 아오미네가 스스로 기숙사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그녀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간간히 모모이의 부탁을 받은 사감이나 다른 녀석들이 대신 아오미네를 찾아왔지만 그들도 아오미네가 나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으면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그걸 노린 아오미네는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모모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쾌재를 불렸다.
한숨이라도 잘 생각에 한숨을 하고 있던 그는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이번에는 녀석인지 몰라도 금세 포기하게끔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방문을 세게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는 그와 안 어울리는 검은색 토오 농구부 저지를 입고 있는 쿠로코가 있었다. 쿠로코는 아오미네를 올려다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조금 늦어지면 연습 시합에서 아예 지각하고 맙니다. 서둘러 주세요.”
“사츠키가 시켰냐? 그럼 얘기도 들었겠지. 안 나간다고.”
“네 뒷바라지 하는 모모이 씨도 생각해주세요. 다른 팀원들이랑 같이 가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럼, 네가 나 대신 가서 하던가. 아무튼 난 안 가.”
아오미네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고 방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쿠로코가 손으로 방문을 잡고 그 사이에 몸을 집어 넣었다. 그 때문에 문이 닫혀지지 않자 아오미네의 짜증을 점점 극에 달했다.
“비켜.”
“나오지 않는 이상 여기에 계속 있을 겁니다.”
“2군 선수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결국 아오미네는 선배인 쿠로코를 밀치고 틈이 생긴 그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화가 난 상태에서 힘을 잔뜩 실린 주먹이었기에 쿠로코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명치가 아닌 복부에 맞았는데도 숨 쉬기 어려운지 쿠로코는 허리를 굽히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겨우 한 대 맞고 저렇게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그를 보니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약해 빠진 게 보여서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졌다. 주위에 있는 몇몇 애들이 그들을 보고 웅성거리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쯤이면 충분히 경고가 되었을 거라 생각한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내려다보다가 뒤돌았다. 그 때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 새 일어난 쿠로코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더니 순식간에 아오미네 배를 강하게 때렸다. 빌빌거리는 녀석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아오미네의 배를 때린 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복근을 찌릿하게 울리는 통증과 내장이 파열될 것 같은 고통에 아오미네도 한동안 숨쉬기 어려웠다. 게다가 다리 힘도 풀려서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않았다. 쿠로코는 아픈 배를 만지고 그를 내려다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에게 함부로 손찌검하지 마세요. 오늘은 이쯤에서 끝나지만 다음에는 기절해서 데려갑니다. 망할 개새끼야.”
그리고 쿠로코는 아직도 움직이지 못하는 아오미네를 버려두고 기숙사를 나가버렸다. 아오미네는 그의 조용한 발소리를 들으면서 저 자식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마 그때부터였다. 아오미네가 정말 못 말리는 망나니가 된 것이.
원래 성격이 개차판인 것은 알았지만 적어도 남들이 연습하는데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배가 아프다는 이유로 나오지 못한 연습 시합 이후부터는 1군이든, 2군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눈에 뜨이면 연습을 방해하면서 괴롭히고 있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건 일부러 체육관에 일찍 나와서 마찬가지로 일찍 나와서 연습하고 있는 부원들을 상대로 1대5 내기 농구였다. 물론 1대5라는 수적으로 불리한 핸디캡을 아오미네 본인이 스스로 만들었어도 그 부원들은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자신의 것들 모두 쏟아부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 차이에 그 부원들은 모두 농구에 대한 흥미를 잃고 그만 퇴부하고 말았다. 그 중에는 레귤러들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실력이 있고 미래도 밝았던 1군 2학년 선수들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계속되자 감독도 참지 않고 아오미네에게 직접 주의를 주었다. 그럴 때마다 아오미네는 그의 앞에선 알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악행은 감독이 없어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었다. 감독으로도 그를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도 감독이 학교 건물에 간 사이, 체육관 단상에 가만히 누워있던 아오미네가 슬슬 자리에 일어나더니 가까이 있는 부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히 아오미네랑 엮이고 싶지 않았던 부원들을 서로 눈을 맞추고 자리를 피했다. 자신을 대놓고 피하는 그들을 보니 화가 치밀고 했고 무서워하는 그들이 웃기도 해서 그는 따라가 엄청 괴롭혀 주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쿠로코가 나타나 그들에게 가고 있던 아오미네의 팔을 잡았다. 쿠로코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거칠게 잡힌 팔을 떼어 놓았다.
“이제 부원들을 괴롭히는 건 그만하세요.”
“그만 안 두면 어쩔 건데. 또 때리실 겁니까? 선배님?”
“아오미네!”
실실 약 올리면서 시비를 거는 아오미네가 정말 화가 난 쿠로코는 평소라면 나오지 않을 큰소리로 외쳤다. 전에 아오미네가 자신을 무시 했을 때 약간 미간을 찌푸리는 것과 달리 이번에는 온몸으로 분노했음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의 눈빛에 아오미네는 잠깐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지지 않기 위해 그에게 바짝 다가가 같이 노려봐주었다. 둘 중에 누구도 서로에게 지지 않았다.
“나에게 화났으면 나한테 푸세요! 왜 애꿎은 부원들만 괴롭히지 못해 안달입니까!”
“내가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지금 네 녀석이 하는 짓은 팀을 망치는 겁니다!”
“그럼 너는 이 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뭔데? 이 팀의 목표는 오로지 이기는 거야. 근데 넌 2군 시합도 못 나갈 정도 실력이 거지 같고 입만 살았지 하는 건 하나도 없잖아!”
“팀은 이기는 것만 다가 아닙니다. 팀은 모두가 같이 나아가야 그 의미가 있고, 그만큼 팀메이트는 소중해요!”
“순진하게 이상만 쫓고 싶으면 너나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이랑 잘 지지고 볶고 해봐! 굳이 나에게 강요하지말고!”
“나가!”
결국 쿠로코가 먼저 제 분에 못 이겨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다른 부원들이 말릴새도 없이 아오미네의 멱살을 잡았다.
“너 같이 팀메이트를 우습게 보는 녀석은 여기에 있을 필요 없어! 꺼져!”
자신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화내는 사람이 없었던 아오미네는 지금의 쿠로코를 보고 놀랐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도 종종 화냈지만 다들 그의 고집에 기가 꺾이고 피하면서 포기했다. 그런데 쿠로코는 다르다.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면서 끝까지 싸운다. 간만에 남자다운 녀석을 만났다고 생각한 아오미네는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쿠로코의 손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사악하게 웃으면서 이딴 거 거리낌 없이 나가주겠다고 말한 다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체육관을 나갔다. 곧 있으면 인터하이 본선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팀은 아오미네를 필요로 할테고 그러면 다시 찾아 올 터였다. 만약 그 때 자신에게 화낸 쿠로코가 와서 사과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서 소름이 돋았다. 반드시 자신 앞에서 그 자존심 강한 무릎을 꿇게 해서 그날의 복수를 이루겠다고 생각했다.
인터하이 본선이 시작되자 아오미네의 예상대로 모모이가 찾아와서 퇴부처리 안했으니 다시 돌아오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모모이만으로 되지 않자, 주장인 이마요시도 찾아오고 심지어 감독도 아오미네를 불려서 나오라고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오미네가 원하는 건 쿠로코 테츠야가 직접 찾아와서 자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알면 그렇게 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후, 토오학원이 인터하이 8강전에서 중학교 동창이자 같은 기적의 세대인 미도리마가 있는 슈토쿠에게 졌다는 얘기가 들리고 난 뒤 아오미네는 집에 찾아온 모모이에게 쿠로코가 퇴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 집에만 지내면서 쿠로코가 자신에게 사과하기만 기다리고 있던 그로선 적잖은 충격이었다.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정말 싫어했지만 그래도 농구를 좋아하고, 농구에 대한 진지한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퇴부했다고?
아오미네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모모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인터하이에서 진 걸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가신 거니까, 쿠로코 선배님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돌아오란 말이야.”
그녀의 말에 아오미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후, 다시 농구부로 돌아오니 주장인 이마요시는 반가워 했지만 나머지 부원들은 탐탁치 않게 보았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아오미네에게 인터하이에 멋대로 나오지 않는 일에 대해 화내거나 따져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끼리 연습하고 있었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쿠로코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쿠로코가 여기에 있었다면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는 아오미네를 단단히 혼내주고 대드는 자신을 데리고 다시 기초교육부터 실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럴 사람은 이제 여기에 없었다.
아오미네가 천천히 노을을 등지고 걸어가는 골목에는 사람이 없어서 한적했다.
그는 모모이가 알려준 쿠로코의 집 앞에 도착했다. 학교에선 제법 떨어져 있는 그의 집은 어느 집과 다름이 없는 평범한 2층식 목조건물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집보다 좀 작다는 생각에 들어가기 전부터 답답하게 느껴졌다.
막상 집에 도착하고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니 망설어졌다. 안 그래도 마지막으로 봤던 그 때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진심으로 사라지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 마당에 얼굴 가죽을 철판으로 단단히 무장한 아오미네라고 해도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부담이 안 될 리가 없었다. 해가 지평선까지 져서 주위가 제법 어두워질때까지 그는 쿠로코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쿠로코의 집은 아직 전등을 켜지 않았다.
몸살에 걸려서 학교에 못 왔다고 들었기에 집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전등을 켜지 않는 건 아무래도 지금 집에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제발 집에 아무도 없길 바라면서 아오미네는 드디어 초인종을 눌렸다.
초인종 벨소리는 제법 오랫동안 울렸다. 그리고 반응이 없었다. 아오미네는 역시 집에 아무도 없는 게 맞다고 단정지었다. 그래서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집에서 시선을 돌리고 뒤돌았는데 그때 쿠로코의 집 거실 전등이 켜지고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즈막한 기침소리와 함께 쿠로코가 집에서 나왔다.
몸살이 단단히 걸렸는지 쿠로코는 잠옷 위에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나왔다. 아오미네는 그런 모습에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던 쿠로코는 현관문 앞에 있는 아오미네를 보고 입을 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아오미네가 말없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기만 하는데도 쿠로코는 그를 내쫓지 않았다.
자신보다 큰 아오미네를 올려다 보던 쿠로코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기침이 나와버렸다. 기침이 쉽게 멈추지 않는지 그는 허리를 숙이면서까지 기침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한 아오미네는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려 했다. 하지만 쿠로코가 다가오는 아오미네의 손을 쳐내고 괜찮다면서 거부했다. 그렇게 그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아오미네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스스로 기침을 진정시킨 쿠로코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왜 여기까지 왔냐고 물어보았다.
“왜, 그만 둔 거야. 농구 좋아하잖아.”
“2군 선수가 그만두는 이유를 직접 들어서 자위하려고 왔습니까? 좋아하는 것과 팀에 공헌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걸 알려 준 게 아오미네 군이고요.”
“그동안 포기 하지 않았다며! 근데 나 때문에 그 노력 다 물거품 만들 거냐고!”
“악어의 눈물이라니 정말 잔인하시네요.”
쿠로코의 말은 하나하나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는 그의 말에 오히려 아오미네가 괴로워졌다. 이유는 다르지만 더 이상 농구를 즐길 수 없어서 괴로워했던 중3때 자신의 모습과 쿠로코가 자꾸 겹쳐졌다.
“아오미네 군은 나 같은 게 어떤 마음으로 농구를 그만 둔 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 오만과 이기심으로 다른 부원을 무시했던 것처럼 나도 무시하세요.”
“그래, 나는 엄청 이기적이라서 몰라. 그러니까 그 감정이 어떤 건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줘.”
괴로운 표정으로 애원하는 아오미네의 말에 쿠로코는 되려 화가 났는지 두르고 있던 담요도 던져버리고 주먹으로 아오미네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몸살 때문에 힘이 없어서 아프지 않았다. 쿠로코 본인도 자신이 힘이 없어서 만족스럽게 때리지 못한 걸 아는지 이를 꽉 다물고 잇새 사이로 욕했다. 몸살 때문에 몸이 약한 상태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워 잠시 비틀거렸다. 그래도 쿠로코는 멈추지 않고 주먹으로 아오미네의 가슴팍을 마구 때렸다.
“미쳤어? 나한테 왜 그래. 널 보는 걸로 괴로워하는 날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몰라! 그저 당신을 다시 농구부에 데려오고 싶었어!”
아오미네는 자신을 때리는 쿠로코의 두 팔을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올려보았다. 눈물로 글썽이고, 빨갛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만 가득했다. 아오미네는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는 쿠로코의 어깨가 전보다 작아 보여 제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쿠로코의 팔을 잡고 있는 손으로 그를 끌어 당겨보았지만, 쿠로코는 아오미네의 가슴팍을 때리고 있던 두 손을 그의 어깨에 대고 안기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서글퍼졌다.
한참을 현관 앞에서 그러고 있던 쿠로코는 아오미네에게 떨어졌고 아오미네도 그를 잡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 어색한 분위기에 핸드폰을 확인하던 아오미네가 이제 가야겠다고 말했지만 쿠로코는 떨어진 담요를 주우면서 시간이 늦었고 오늘 부모님도 늦게 오신다고 했으니 자고 가라고 했다. 선배인 자신이 기숙사 사감과 아오미네의 부모님에게 그가 여기서 자고 갈 거라고 전화해주겠다고 후배를 안심 시키는 쿠로코의 배려를 아오미네는 거부하지 않았다.
아오미네가 집에 들어오고 현관문을 닫은 쿠로코는 몸살 때문에 저녁을 못 챙겨주니 알아서 우유에 시리얼을 먹으라고 했지만 아오미네가 식욕이 없다고 하자 그는 주방에서 컵과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챙기고 그와 같이 2층으로 올라갔다.
처음으로 들어간 쿠로코의 방은 작아서 책장이 붙어있는 책상과 서랍, 싱글 침대만 들어가도 방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쿠로코가 아오미네에게 음료수를 따라 줄 때까지 두 사람을 계속 말이 없었다. 아마도 현관문 앞에서 서로에게 있던 감정을 모두 소진한 탓일지도 모른다.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마시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몸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푸른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쿠로코의 눈가는 빨갰다. 남은 음료수도 다 마시고 고개를 살짝 숙여서 보니 빨갛게 충혈되었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었다. 아직도 쿠로코에게 분노와 슬픔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보였다. 아오미네는 그런 그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다 옆에 아무렇게 내려둔 외투를 집었다. 작은 먼지라도 있을지도 모르니 손으로 탈탈 털어내고 그의 머리위에 얹어주자 쿠로코가 놀란 눈으로 아오미네를 보았다. 아오미네는 말없이 쿠로코의 눈이 보이지 않도록 외투를 깊숙히 쓸 수 있게 잡아 당겼다. 의도대로 외투에 가려 쿠로코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어 우는소리가 나지 않게 참았고 흐느낌을 참기 위해 어깨에 힘주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윽고 살짝 보이는 볼과 턱에 눈물 한 방울이 흘려 내렸다. 그렇게 눈물은 계속 나와서 입꼬리에 살짝 고이고, 이내 다시 아래로 흘렸다.
“너 같은 거 정말 싫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쿠로코는 덮고 있는 아오미네의 외투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더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고 자기 앞에 있는 외투 주인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오미네는 그런 그를 내치지 않았다. 그저 억누른 흐느낌을 들으면서 쿠로코 어깨에 손을 차분히 올려두었다.
울다가 지친 쿠로코를 차마 차가운 방바닥에 둘 수 없었던 아오미네는 그를 깨워봤지만 정말 깊게 잤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결국 쿠로코를 겨우 들어서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역시 그도 남자라서 보통 무게가 아니었기에 침대에 내려줄 때 거의 던지다시피 내려준 것 같은데도 쿠로코는 얕은 숨을 내쉬면서 그대로 잤다.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오미네는 침대 옆에 앉아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가도록 보고 있자니 아까 외투를 덮어쓰고 눈물 흘렸던 쿠로코의 볼과 턱이 떠올랐다. 눈물이 잠깐 고였던 입술도 떠 올랐다. 그는 여자들보다 옅은 입술을 깨물고 있어서 살짝 핏기가 돌았었다. 아까의 입술과 비교하면 지금 자고 있는 쿠로코의 입술은 핏기도 없고 각질도 일어났다. 여자의 것에 비하면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을 터. 하지만 아오미네는 무릎을 꿇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났다. 그리고는 침대에 올려준 대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려 제 입술을 쿠로코의 입술에 댔다. 자신의 심장이 귓가에서 뛰고 있었다.
쿠로코의 작은 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던 그 날 밤. 아오미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농구 코트가 있는 체육관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중학교에 있던 체육관이나,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의 체육관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 낯선 곳 가운데에는 교실에 흔하게 있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자 두개가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들 중 하나에 쿠로코가 앉아있었다. 아오미네는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 쪽으로 걸어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앞만 보고 있던 쿠로코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눈이었다. 쿠로코는 다가온 아오미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아오미네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 만지면서 느리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농구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남들 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그쪽처럼 밤이 늦도록 연습하고. 그렇게 농구를 잘하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랑 농구 하기 싫어하더라. 나를 보고 절망하는 그 눈을 마주 보는 게 너무 무섭고 남들 말처럼 내가 정말 괴물처럼 보였어.”
그때를 떠올리는지 아오미네는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무표정한 쿠로코에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가 신부님께 처음으로 말하는 고해성사 같았다.
“그렇게 농구가 재미없어지고나서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내가 너무 슬퍼 보였거든. 그런데 며칠 전에 본 그쪽 표정이 그때 나와 닮아서 그냥 무시할 수 가 없었어. 그 다음에 어떻게 될 지 아니까.”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오미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까 현관문에선 그가 쿠로코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이유는 다를지언정 결국 그 마음은 똑같으니까. 그러니까 그쪽과 똑같은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진짜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 있는 아오미네에게 이번에는 쿠로코가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 네가 농구 하던 모습을 본 적이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벤치에도 못 들어가는 2군 선수였고 너는 레귤러선수에다가 테이코의 기적의 세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을 기반으로 자유롭게 농구 하는 너의 모습에 반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게 질투도 나지만 그래도 동경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죠. 그래서 제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말에 좋아했는데 전과 달리 너무 변해버린 네 모습에 실망했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길 바랐습니다.”
어쩌면 이기적인 마음이었죠.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흘린 뒤 쿠로코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후부터 두 사람이 있는 코트 안은 계속 조용했다. 그렇게 꿈이 끝났다.
쿠로코가 다시 돌아왔다. 토오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에이스를 나가게 한 원인인 된 책임으로 퇴부했던 그를 다시 복귀할 수 있게 한 것은 그 때문에 퇴부소동을 벌였던 토오의 에이스 아오미네였다. 감독에게 쿠로코의 복귀를 허락해달라고 부탁한 아오미네는 결국 그것을 빌미로 부원들이 하고 있는 모든 연습에 비롯해 당번이나 청소 같은 자잘한 일까지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감독의 조항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선배하나 때문에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려야 하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쿠로코는 아오미네가 보기엔 누구보다 남자다운 남자였고 그런 그의 마음을 따라가고 싶었다.
다시 농구부로 복귀한 쿠로코는 다른 부원들이 모여있을때 그 앞에 서서 부원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음부턴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좀 더 팀을 위해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아오미네는 과연 여기서 쿠로코가 사과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일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오미네의 악행이었고 그것을 막고자 하는 건 쿠로코이다. 어느새 쿠로코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있던 아오미네는 문득 자기 옆에 있는 부원들을 보게 되었다. 부원들은 쿠로코를 보면서 경멸하거나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이 쿠로코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지 그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을 괴롭혔던 아오미네였지 쿠로코가 아니었다. 단지 인터하이에 졌다는 이유로 악당과 히어로가 뒤 바뀐 상황은 당사자로선 입맛이 씁쓸했다.
인사를 마친 쿠로코는 연습을 재개하겠다는 감독의 말과 함께 다른 부원들과 같이 연습에 들어갔다. 토오 농구부는 다른 강호 학교들에 비해 인원수가 적은 편이라서 1군, 2군이 나누어 있어도 둘 다 같은 체육관을 사용했다. 그래서 아오미네는 대충 연습하면서 옆에 2군 라인에서 연습하고 있는 쿠로코를 볼 수 있었다. 새삼 이렇게 보니 쿠로코는 2군 중에서도 체력도 좋지 못해서 연습하는 도중에 뒤쳐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쿠로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분량을 빠짐없이 수행했다. 다른 부원들이 가끔씩하는 요행도 그는 하지 않았다. 시선을 잠깐 돌리면서 다시 찾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데 정말 누구보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에이스가 팀의 히어로면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오미네는 점프슛을 날리면서 생각했다.
10분간 휴식시간은 1군이나 2군이나 똑같이 주었다. 흔히 쉬는 시간이 되면 저절로 1군은 1군끼리, 2군은 2군끼리 모여서 서로의 영역을 건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오미네는 2군 라인 근처까지 가 거기에서 혼자 벽에 기대서 앉아있는 쿠로코 옆에 라인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누가 다가왔나 싶어 고개를 들어 살펴본 그는 아오미네인 걸 보고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이, 쿠로코.”
“뒤에 선배라고 붙으세요.”
“엉. 쿠로코 선배.”
“무슨 일 입니까.”
막상 무슨 일 때문이냐는 말에 아오미네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딱히 이유가 있어서 쿠로코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옆에 있고 싶어서 몸이 저절로 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오미네가 우물거리면서 아무 말을 못하자 쿠로코는 한숨을 쉬면서 아오미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키가 부쩍 큰 중학교 때 이후로 그동안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걸 당해 본 적이 없는 아오미네는 당황해서 쿠로코의 손을 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오히려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이상하게 봤다.
“너, 뭐 하는 거야?!”
“선배한테 너라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선배가 후배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게 뭐 어때서요? 동생 같아서 그러는 건데요.”
며칠 전에 쿠로코가 자신에게 마구 화냈던 게 아직도 떠오르는 아오미네는 그가 그 때와 달라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먼저 친근하게 다가오는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있었다.
“나, 미워하는 거 아니였어?”
“맞아요. 지금도 아오미네 군에게 한 방 먹이고 싶습니다만 그러지 않을 겁니다.”
“왜?”
“비밀입니다.”
쿠로코의 말에 아오미네는 우리 둘 사이에 비밀이 어디에 있냐고 따졌지만 휴식시간이 끝났다는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쿠로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하러 가버리고 말았다. 아오미네도 라인을 넘어 그를 따라갔지만 이마요시가 어느새 뒤에 바짝 다가와서는 그를 잡고 1군 구역으로 데려가고 말았다.
“마, 아우하고 싶으믄 싶다하제 그랬나. 내도 있는디.”
“싫어, 필요없어.”
“남사시럽게 생각치 말고.”
아오미네는 자꾸 어깨를 치는 이마요시의 손길을 쳐냈다. 아무리 형이 필요한다고 해도 이마요시 같이 성격이 나쁜 남자는 질색이었다. 역시 형이라면 듬직한 쿠로코가 제격이리라.
인터하이가 끝나자마자 합숙을 한 바람에 남은 여름방학이 금세 끝나버렸다. 하필 합숙을 1군과 2군이 따로 간 바람에 아오미네는 그동안 쿠로코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합숙 뒤에는 잠깐 연습을 쉬기로 해서 합숙을 끝나고도 보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지 못하니 더 보고 싶은 맘이 쌓이고 있었다. 전에는 그렇게 보기 싫어했는데 왜 지금 보고 싶어서 안달일까. 하루는 합숙 도중에 너무 보고싶어서 모모이가 그녀의 핸드폰에 저장한 쿠로코의 사진을 몰래 보기도 했다. 그렇게 개학이 되고나서야 겨우 만났다.
개학 첫 날에도 부원들은 방과 후에 연습을 했다. 이제 곧 있으면 윈터컵 예선이 시작하니 지금부터 시간을 허투루 사용할 수 없었다. 그건 다른 부원들 이야기였고 아오미네는 아직까지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예선이야 토오라면 간단하게 올라 갈 테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연습을 대충하고 있던 아오미네는 휴식시간이 되자마자 2군 구역에 있는 쿠로코를 불러냈다. 휴식 시간이라도 손에 공을 놓지 않고 있던 쿠로코는 자신을 불려낸 후배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무시했지만 무시한다고 포기할 아오미네가 아니었다. 결국 아오미네에 끌려서 나온 쿠로코는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어이없는 것이었다.
“쿠로코…… 선배, 내 캐비넷이 몇 번인지 모르겠어.”
“제가 너에게 그걸 얼마나 가르쳐 주었는데 그사이에 까먹었습니까? 당신은 아오미네가 아니라 멍청미네죠?”
“이름 함부로 바꿔 부르지마. 아무튼, 같이 부실 좀 가줘. 부실도 기억 안나.”
“조만간 네 몸에서 쓸모없는 머리를 뜯어 버리겠습니다.”
쿠로코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면서 먼저 부실로 가버렸다. 그 뒤를 아오미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껄렁하게 가고 있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엄마 오리를 따라가는 다 큰 흑조를 보는 꼴이라서 그걸 멍하니 보고 있는 부원들은 이걸 보고 당황했다. 그러다 그들 사이에서 이마요시가 그걸 보고 낄낄대며 웃고나서야 다른 사람들도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아오미네가 쿠로코랑 친하게(?) 지나고부터 토오 농구부 부원들은 하루하루 그 두 사람을 볼 때마다 심정이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1군 부원들은 무자비했던 폭군을 잠재운 쿠로코를 향해 몰래 절했다.
아무도 없는 부실에 들어온 쿠로코는 뒤따라 들어온 아오미네의 캐비넷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이거라고 가르쳐 주었다. 짜증을 손에 담았는지 캐비넷을 때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캐비넷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던 우유맛 사탕하나를 캐비넷을 때렸던 쿠로코의 손에 쥐어주었다. 갑자기 그에게 우유맛 사탕을 받은 쿠로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탕과 아오미네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학교에서 어떤 여자애가 줬어. 하나 먹어보니까 그 마지바의 바닐라쉐이크 맛이랑 비슷해서 주는 거야.”
“여자애가 준 걸 왜 저한테 주는 겁니까. 다음부턴 그녀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쿠로코는 잘 먹겠다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정확히 그 바닐라쉐이크 맛이랑은 달랐으나 그래도 주는 정성을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줬다. 달달한 맛이 입에 들어오자 짜증났던 쿠로코의 기분도 어느 정도 풀어졌다.
쿠로코는 의외로 표정이 많은 편이었다. 성격도 무덤덤해서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긴 한데 눈썹이나 눈동자, 미간, 입꼬리를 자세히 보면 그가 어떤 기분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특히 기분이 좋아지면 쿠로코의 눈썹이 살짝 내려가고, 입꼬리는 정말 살짝 올라간다. 그래서 아오미네는 지금 쿠로코가 사탕을 먹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게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감정을 하나씩 알아갔다. 아직은 짜증, 귀찮음, 남아있는 분노만 주로 보여주지만 가끔 좋다는 감정을 느끼면 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는 쿠로코가 자신을 볼 때마다 기분 좋아지고, 만나면 반가워하고, 항상 사랑스럽게 봐주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열심히 우유맛 사탕을 주겠다며 아오미네는 사탕의 브랜드를 외우고 또 외웠다.
- 그리고 조금 뒤에 있을 이야기.
쿠로코는 떨리는 손으로 왼쪽 손목에 맨 손목밴드를 빼다가 다시 껴보고 했다. 그래도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같이 있는 다른 부원들은 각자 알아서 스트레칭도 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앞으로 30분 뒤에 있을 지역 예선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역시 한번이라도 경기에 나가본 부원들은 이 상황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기가 데뷔전인 쿠로코는 너무 떨려서 미칠 것 같았다. 선발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말로는 식스맨으로서 참가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없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는 코트에 서는 한 걸음, 한 걸음에 간절함을 담아야 했다.
앞으로 5분 뒤 경기가 시작한다. 이번에는 같은 지역구인 세이린과 경기를 치룬다. 전에 모모이와의 브리핑에는 세이린은 선수층이 얇지만 선수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다고 했다. 게다가 카가미 타이가라는 선수는 파워 포워드인데 경이로운 고공 점프가 특기인 선수로 아오미네와 동갑이다. 그런 상대와 맞붙을 생각을 하니 쿠로코는 소름이 돋아 신발끈을 다시 맺다가 몸을 떨었다.
신발끈을 다 맨 쿠로코는 자리에 일어나 이미 코트에 서있는 선발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세이린은 예의의 카가미까지 포함해서 5명이 다 서있었지만 토오는 아직 네 명 밖에 없었다. 코트에 있는 와카마츠는 아직 안 온 나머지 한 명 때문에 이미 화가 잔뜩 나서 혼자서 성을 내고 있었다. 아직 안 나온 부원은 역시 아오미네였다. 그동안 나름 성실하게 경기에 임하고 있어도 지각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감독은 쿠로코를 보고 사인을 주었다. 그래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으려고 하자 쿠로코의 머리를 쓰다듬고 간 사람이 있었다. 그를 지나친 사람의 등에는 숫자 5가 새겨져 있었다.
“늦었습니다. 아오미네 군.”
“그래도 시간에 맞춰서 왔잖아. 기다리고 있으라고. 테츠.”
“뒤에 선배라고 붙이라고 했죠. 아무튼 화이팅입니다.”
토오고의 에이스는 제자리에 가서 상대방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카가미가 있었다. 두 팀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 위치로 갔다. 점프볼은 토오의 와카마츠와 세이린의 카가미가 맞붙기로 했다. 잠시 후 코트 안을 정리하던 심판의 휘슬이 불어졌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경기장안을 가득 울려 퍼져서 예민해진 피부를 자극할 때, 쿠로코는 그때가 제일 흥분되었다.
경기의 결과를 말하자면 토오는 세이린에게 지고 말았다. 물론 에이스인 아오미네를 필두로 토오는 선취점을 탔고 계속 경기를 리드했다. 그러나 세이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었다. 그러다 2쿼터 중간에 역전이 되자 드디어 쿠로코가 투입 되었다. 쿠로코는 여전히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능력은 떨어지지만 누구보다 희미한 존재감으로 신출귀몰한 패스돌리기가 특기였다. 특히 그런 능력은 아오미네와 같이 콤비를 이룰 때 더 빛을 발했다. 쿠로코의 투입 이후로 토오는 점수를 좀 더 내서 아예 쐐기를 박고자 했다. 하지만 세이린에는 유독 시야가 전방위로 넓은 포인트가드가 있어서 쿠로코가 존재감을 감추고 다른 선수들 사이에 숨고 있어도 그 포인트가드가 그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렇게 패스를 돌려야 하는 쿠로코가 그에 마크 당하는 동안 아오미네는 카가미에게 마크를 당하고 있어서 생각보다 점수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호각을 이루던 토오와 세이린은 1점차 승부를 4쿼터 마지막까지 끌고 갔다. 하지만 결국 승리의 여신이 손들어 준 팀은 세이린이었다.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토오 저지를 입고 있는 아오미네와 쿠로코 밖에 없었다. 쿠로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머릿속에는 오늘 치룬 경기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부분이 좋은 플레이이었고, 어떤 잘못된 플레이 때문에 팀이 경기에 지게 되었는지까지.
반면 옆에 있는 아오미네는 경기에 져서 그런지 화도 나고 머리도 멍해졌다. 생각하기 싫은데 계속 실수하고 잘못했던 부분만 떠올라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에 열이 솟구쳤다. 그래서 아오미네는 저도 모르게 발에 걸린 빈 깡통을 힘껏 차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쿠로코가 놀랐는지 아오미네를 쳐다보고 말했다.
“화 많이 납니까?”
“그럼, 테츠는 열 안 받아?”
아오미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보는 말에 쿠로코는 잠시 고민하더니 잘 모르겠다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심경을 말했다.
“미안하게도 저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처음 선 공식전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의 함성이나 우리를 응원하는 부원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고, 우리를 압박하던 세이린 선수들의 전의가 아직도 피부로 느껴집니다. 게다가 아오미네 군에게 공을 패스한 감각이 손에 떠나지 않아요. 뭔가 이기적으로 저만 기뻐하는 것 같아요.”
아오미네가 보기에 쿠로코는 아직도 그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만도 한 게 그동안 2군 선수로서 경기를 지켜보는 입장이었다가 드디어 실력이 빛이 발해서 1군에 올라오고 레귤러 선수까지 되어 직접 코트에 선 입장으로 변했으니 결과가 어떠하든 경기에 나갔다는 것에 기뻐할 법 했다. 그래서 경기장을 나오고부터 계속 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제 손을 보고 중얼거리는 쿠로코를 보던 아오미네는 그를 안아주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이런 날이 아니면 그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의 생각대로 쿠로코는 안으려고 하면 도망치던 평소와 다르게 아오미네 품에서 얌전하게 있었다. 오히려 아오미네를 마주 안아서 한 손으로 그의 등을 쓸어 만져주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누가 뭐래도 역시 최강은 아오미네 군입니다.”
“다음에도 같이 농구하자.”
두 사람의 맞닿은 심장 사이로 위로와 따뜻함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 결국엔 애정이었다는 걸 두 사람이 알게 된 건 그리 멀지 않은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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