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흑] 인어를 위한 소야곡 3
* 이 글은 1월 31일 청흑성인온에 낼 책의 맛보기 용 글입니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공개될 예정입니다. (성적인 부분은 비밀글)
안녕하세요. 김아오입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잘 맞춰서 왔습니다 데헷-
3편은 거의 이 세계의 아오미네가 사는 곳에 대해 설명하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래서 별로 재미없을지도... 그래도 재밌게 봐주신다면...
다음주면 청흑온도 얼마 안남았네요!! 아직 쓸것도 많고 수정할 것도 많은데 힝ㅠ
이 책에 대한 인포는 이번주 수요일까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계세요 ><!
꿈이라고, 며칠 전에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쿠로코는 아무리 잠을 깊게 자고, 하루 종일이 침대에 누워 잠만 자려고 노력해도 절대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간절하게 이번에는 꿈에서 깨어나게 해달라고 빌고 하룻밤을 보내고 또다시 이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노라면 그렇게 허망하고 당황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기 위해 살을 꼬집고 뺨을 때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마지막에는 화분을 깨서 자해까지 해 볼 생각도 했다.
결국 쿠로코는 여기도 꿈이나 환상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이라고 인정했다. 문득 책에서 보았던 평행이론이 생각났다. 그 가설대로라면 이 곳은 쿠로코가 있던 원래 세계의 평행세계이며 아오미네를 닮은 그 사람도 환상이 아니라 또 다른 아오미네인 것이다. 그렇다면 쿠로코는 애니메이션 또는 장르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차원이동을 직접 겪었다는 것인데, 원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그 욕탕이 무슨 X먹는 우물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차원이동을 해야 하냐고 물어봐야 할 텐데 과연 이 사람들이 차원이동에 대해 이해는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평행이론은 그저 가설일 뿐, 차원이동을 겪은 쿠로코도 본인이 어떻게 왔는지 정확하게 모르니 다른 사람에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X먹는 우물 같은 차원 이동할 수 있는 장소를 찾거나, 디X이드의 벨트와 카드를 어디서 주워와 가면X이더라도 되던가, 하다못해 철 주전자를 구해와 돈네X만이랍시고 뭐든 만들어 봐야 할 텐데 그럴러면 여기를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 곳은 얼굴은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뿐이라서 여기를 나가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왕이 나서서 귀빈 취급해주지만 외지인이 함부로 궁을 나돌아다니면 궁 안에 있는 무사들에게 침입자라고 쫓아올 것이다. 운이 좋아 궁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쿠로코는 여기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인어로 오해 받고 있으니 그들에게 잡히게 되면 곱게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설처럼 사람들에게 작살로 찔릴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으로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여기를 떠나기 전 아오미네를 닮은 그 사람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이 곳에서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가자, 정오부터 그 사람이 찾아왔다. 통 입맛이 없어 아침밥을 무르고 침대에 누워만 있던 쿠로코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야 했다. 저번처럼 깔끔하게 덧옷까지 입은 그 사람의 모습에 씻지도 않은 남루한 자신이 부끄러워 괜히 뻗친 머리를 매만졌다. 허나 그 사람은 그런 걸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인어님이 도통 밖에 안 나오신다고 들어 걱정되어 찾아왔소.”
“나가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쿠로코가 의아해서 묻자,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의아하면서 대답했다.
“산책 정도는. 물론 금군 병사와 동행하는 건 당연하오.”
그 대답에 역시라고 생각했다. 계속 사람을 잡아 먹는 인어로 오해를 받으니 이젠 변명할 기운이 없었다. 이 머리카락이 뭐라고. 시선을 피하고 한숨을 쉬는 쿠로코에게 그 사람은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나의 궁은 아름답다고 소문이 낫소. 지금부터 내가 산책 동료가 되어 주리라.”
쿠로코는 그 제안이 솔깃했다. 처음에 와서 본 그 커다랗고 오묘한 청자 기와가 인상적인 근 건물도 보고 싶었고 자신이 묻고 있는 궁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오미네를 닮은 사람과 돌아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련 없이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황제로 만들 인어를 순순히 보내 줄 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존재감이 옅다는 특기를 살려 몰래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번 산책을 통해 천천히 탈출루트를 짜기로 했다.
제안에 응하자 궁녀들은 그 사람을 1층으로 내려 보내고 서둘러 쿠로코에게 옷을 입혔다. 다시 궁녀들이 입던 잠옷을 손수 벗겨 다른 옷으로 입혀주고 있었지만 속옷을 입을 상태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상하게 적응력이 좋은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바다와 같은 청록색 옷을 입고 내려가자 그 사람은 환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항상 꿍해있는 원래세계의 아오미네보다 표정이 밝아서 중학교때의 아오미네를 보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가 그때 큰 상처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인어라서 그런지 역시 바다색깔이 잘 어울리오.”
쿠로코는 그 칭찬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쿠로코가 그 사람에게서 아오미네를 보고 있듯이 그도 쿠로코를 인어로만 보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그는 앞서 밖으로 나가는 그 사람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에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아마 그쪽보다 제가 어릴 겁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리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쿠로코가 자신의 옆에 서길 기다리면서 이름을 물어보았다. 쿠로코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전에는 꿈이라서 말해주지 않았지만 현실인 걸 알았으니 이름을 알려줘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쿠로코(黑子)라……. 이름마저 예전 인물이군. 아무튼 어서 갑세.”
이번에는 이름에 어떤 전설이 내려오길래. 의문점만 남기고 아오미네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쿠로코도 딱히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들어도 왠지 좋을만한 사연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도 쿠로코에겐 아오미네의 말투가 어색했다. 그에겐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하대가 익숙하겠지만 쿠로코는 늙은이 말투로 다가왔다. 저 얼굴에 그런 말투를 쓰니 위화감이 들었다.
쿠로코와 동행하는 행차는 검푸른 기와 궁벽과 옥색의 청자 기와 궁벽 사이에 있는 길에서부터 시작했다. 지내고 있는 평안재에서 보았던 그 길이었다. 그 사잇길은 꽤 넓어서 양 궁벽에는 키가 작은 나무를 심어놓아도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적인 이유로 구불구불하게 포장 된 길은 하얗거나 짙은 회색 석판을 땅에 모자이크처럼 깔아서 귀여웠다.
궁녀들과 금군 병사들을 이끌고 길 가운데로 행차하는 아오미네는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쿠로코에게 홍휘궁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오부의 속아문 관청들을 비롯해 대언사도 있지. 혹시 요전에 본 지신사를 기억하는 가? 그가 있는 곳이 대언사일세. 나와 가장 가까운 자이지.”
대언사라면 이마요시와 얼굴과 이름이 같은 사람을 말했다. 그가 왕의 측근이고 외견상 젊은 나이에 높은 관직에 있다는 사실이 쿠로코는 사람 기분 나쁠 정도로 심리전을 펼쳤던 그 이마요시가 떠올라 납득했다. 원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아오미네의 말을 가만히 듣던 쿠로코는 궁금한 것이 있어 습관대로 손을 들고 물어보았다.
“저기에 도서관도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책을 보관하는 장소 같은데요.”
“아, 장서관(藏書館)을 말하는가? 그런 곳이라면 당연히 있다만 쿠로코 자네는 글도 읽을 줄 아는군. 바닷속에 책이 있다니. 신기하군.”
“그것 실례되는 말씀이십니다. 학생이나 당연히 한자 정도는 읽을 수 있고요. 국어는 가장 자신있는 과목입니다. 그리고 저는 인어가 아니라 바닷속에 책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책 정도는 있습니다.”
이렇게 인어가 아니라고 열심히 피력하자 효과가 있었는지 아오미네는 쿠로코가 사는 곳이 궁금해하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래서 쿠로코는 그에게 도쿄의 건물은 어떻고, 자신은 부모님, 할머니와 같이 살며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마지막에는 가장 좋아하는 농구에 대해 제일 열심히 설명했는데 아오미네는 잘 이해 못하는 듯 했다.
농구야 당연히 모를 수 있다만 전혀 관심이 없는 그를 보니 조금 서운해졌다. 얼굴과 이름이 아오미네와 닮았으니 이왕이면 농구도 좋아해주면 좋을텐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무가 있던 사잇길은 끝났고 아오미네와 함께 왼쪽으로 돌자 이번에는 강둑 같은 곳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평안재에서는 궁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제 보니 이 궁은 계단식 구조이었다.
그 길은 걸어온 사잇길보다 넓었으나 나무는 없었고 가운데에 망루 같은 정자가 있었다. 그저 단순한 넓은 길처럼 보여도 아래층에는 꽃밭과 수생식물이 자라는 연못이 있어서 정원처럼 보였다. 사잇길이 공원의 산책로 같다면 이 곳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오기 좋은 쉼터 같았다.
사잇길처럼 왼쪽에는 청자기와 궁벽이 그대로 이어졌고 오른쪽 언덕 위에는 검푸른 기와를 얹은 기와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만 화려하게 빛나는 청자 기와를 얹은 건물이 또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언덕 위로 올라가는 석재계단이 있었다. 쿠로코의 시선이 계단과 청자 기와집에 향해 있다는 것을 안 아오미네가 그 곳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위는 내궁이라고 가운데에는 왕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네. 그 양 옆에는 왕자, 공주 혹은 후궁의 처소가 있는데 나에게는 아직 후궁도 없어 지금 텅 비어있다네.”
그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에 놀랐다. 생긴 것으로는 이미 결혼하고 남았을텐데, 아마 늦게 결혼 할 생각인가보다. 쿠로코는 그가 미혼이라는 사실에 속으로 안심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일지라도 부인이 있다고 하면 진심으로 좋아하는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와 겹쳐 보여 괜히 질투 났을 것이다.
계속 산책을 하던 중 석재계단 옆에 있는 망루 같은 정자에 다다르자 아오미네가 멋진 곳을 보여준다며 정자에 함께 올라가자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먼저 올라가는 그를 따라 나무계단으로 정자로 올라갔을 때 현판에 관조정(觀朝亭)라고 적힌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있기 엔 조금 좁은 정자에 올라가니 계단식 구조 덕분에 처음 보고 압도했던 그 큰 건물 말고도 쿠로코가 보지 못했던 이 궁의 건물을 다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궁 밑에는 여러가지 크기의 기와집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소박한 나무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길거나 짧은, 넓거나 좁은 거리에는 개미만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바다에는 조업중인 배들도 보였다.
이 궁 자체가 언덕 위에 있어서 평안재의 가장 큰 창문에서도 파도 치는 해안가와 그 곳에 가까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성 안의 전경을 한꺼번에 보는 건 처음이었고 탁트인 엄청난 경관에 놀라 가슴이 벅차 올랐다. 현판에 쓰여진 그 이름대로 바다에 아침해가 떠오를 때 보면 더더욱 멋질 것 같았다.
절경에 소름이 돋아 아무 말이 없는 쿠로코에게 아오미네는 정자에 올라 온 감상을 물어보았다. 단순히 물어보는 말인데 어투에 이 곳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름다워요 ……. 이 궁도, 마을들도, 바다도.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런 절경은 처음이에요.”
“나도 이 곳에 올라오면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네. 새벽에 일어나 정무를 볼 준비를 하고 외궁으로 내려가면 아침 해가 떠오를 때인데 가끔 여기에 올라와 이렇게 성 안을 내려다보면 이 곳과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이 곳을 지으신 현종께선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라는 마음에서 이 정자를 지었을 걸세.”
아오미네 말에 쿠로코도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자를 만드신 분은 정말 현명하신 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면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쿠로코도 절경에 홀딱 반해 이 곳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아직 보여줄 것이 많다고 서둘러 정자에 내려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쿠로코는 이미 내려간 그를 따라 내려가려는 참에 자신 뒤에 있었던 내궁도 볼 수 있었다. 내궁 가운데에 있는 청자 기와집은 3채로 삼각형 꼭지점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정원이 있었고 바로 수평선이 보였다. 왕의 처소가 있는 내궁에 있으니 외지인인 쿠로코는 가 볼 수 없지만 저기에서는 또 다른 절경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관조정에서 내려온 뒤 다시 청자 기와 궁벽을 따라 정원 끝까지 걸어갔고, 또 한번 왼쪽으로 틀자 이번에는 다른 곳보다 궁벽이 낮아 그 안이 보이는 장소였다. 가깝게 붙어 있는 기와집에는 같은 옷을 입은 궁녀들과 푸른색 관복을 입은 신하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가사일을 하거나 공방처럼 전통 공예품 같은 것을 만들고 있었는데, 한쪽 구석에는 글자가 인쇄된 종이를 널려있어서 흥미가 갔다.
아오미네는 이 곳을 궁녀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그 많은 궁녀들이 생활하는 곳치고는 장소가 협소해 보였는데 아니다 다를까 여기서 보이지 않는 언덕 밑에 궁녀들의 생활동이 있단다.
절경을 감상할 수 있던 관조정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곳 중에서 이 곳이 가장 볼 재미가 있었다. 왕이 행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에 바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문득 고개를 뒤로 돌리니 지나간 곳에서 어린 아이들이 낮은 궁벽 위에 얼굴만 빼꼼 내밀어 행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머리를 묶은 모양새가 궁녀와 같은 것을 보아하니 견습중인 어린 궁녀들 같았다.
쿠로코는 어린 궁녀들이 발간 볼을 한 채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구경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계속 뒤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어린 궁녀들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살짝 웃어주었고 어린 궁녀들은 하늘색 눈동자에 놀랐다. 그러나 무서운 것보다 신기했는지 도망치지 않고 자기들끼리 재잘대며 웃고 있었다.
그랬던 귀여운 궁녀들은 이번에는 아오미네가 쿠로코를 따라 자기들을 보자 새파랗게 질려 황급히 궁벽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 때문에 어린 궁녀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자 쿠로코는 아쉬워하며 옆에 있는 아오미네에게 투덜거렸다.
“왕이시면서 어린 아이들에 겁을 주면 어떡합니까?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었는데.”
그러자 아오미네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헛웃음치면서 대답했다.
“어린 나인들이 숨은 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그렇죠. 험악……. 그게 아니라, 아무튼 다정하게 웃어주면 아이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겁니다.”
차마 왕에게 얼굴이 험악하다고 할 수 없어서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말에 여전히 어이없어 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아오미네가 사직단에 볼일잉 있다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이 동행 중이었던 쿠로코도 당연히 그를 따라갔다. 언덕 아래에 있다는 사직단은 안이 보이는 낮은 궁벽 안에 건물 두대가 마주보고 있는 곳이었다. 그 안에 염색한 거처럼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익숙한 남자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멀리 사직단 밖에서 본 낯이 익은 사람의 이름은 듣지 못했으나 아마 와카마츠가 아닐가 짐작했다.
대문이 없는 그 곳에 들어간 아오미네는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불렸다.
“와카마츠,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이름말고 직함으로 불러달라고요. 전하. 제가 아직도 말단입니까.”
목청도 좋은 와카마츠는 원래 세계의 와카마츠답게 왕인 아오미네 앞에서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보면 무례할 수 있는 그의 행동에도 아오미네는 원래 그랬다는 듯이 흘려듣는 것을 보니 원래 세계의 두 사람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오미네를 따라 사직단 앞까지 왔건만 안에 있는 두 사람은 쿠로코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게다가 그와 함께 있는 와카마츠는 쿠로코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않은 모양이었고. 그래서 자신을 신경쓰지 않는 두 사람사이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쿠로코는 뒤돌아 사직단이 아닌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정원에 갔지만 졸졸 따라 붙었던 금군 병사나 궁녀들도 그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혼자가 된 쿠로코는 맘이 편안해져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연못하나 없는 작은 정원에서 좀 더 바다가 보이는 끝까지 가자 그 근처에 신기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흔한 나무가 아니라서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나무가 특이했던 건 나무기둥 가운데에 사당같은 작은 목조 건물이 붙어있었다. 정확히는 그 나무가 목조 건물의 지붕을 뚫고 있었다.
왜 이렇게 지었는지 궁금한 쿠로코는 허락도 없이 그 사당에 다가갔다. 한 사람만 겨우 들어 갈 수 있을 만한 문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으나 잠겨있지 않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혹시나 몰라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가니 좁은 내부에는 불상하나 없이 덩쿨에 둘러싸인 나무기둥만 있었다. 그러나 쿠로코는 그 나무 기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곧게 자란 기둥에는 마치 여인의 상체와 같은 조각이 있었는데 그 여인의 얼굴을이 중학교 동창이자,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의 소꿉친구엿던 모모이를 쏙 빼어 닮았던 것이다.
“어째서 모모이 씨는 이런 모습인가요.”
다른 토오 사람들과 같은 얼굴과 이름을 한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서 혼자 사람이 아닌 모모이를 보니 안쓰러워 쿠로코는 그녀가 있는 나무 기둥으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어루 만져주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아오미네가 사당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그만, 더 이상 다가가지마.”
위압적인 목소리에 놀란 쿠로코는 서둘러 나무에서 떨어져 아무 일도 안했다는 식으로 양 손바닥을 들어 보여주었다, 이방인이 동행도 없이 멋대로 돌아다녔다고 혼날까봐 긴장하고 있었으나 아오미네는 등장과 달리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괜히 마음이 불편한 쿠로코가 말이 많아졌다.
“아무 것도 만지지 않았습니다. 훔친 것도 없고요.”
“그건 자네 손에 아무 상처가 없다는 것으로 알 수 있네. 그나저마 그 나무는 위험하니 이리오게나.”
그에게 책 잡히지 않게 쿠로코는 바로 그의 옆에서 약간 뒤로 갔다. 그의 등 뒤에서 가까이 붙으면서 저 나무가 뭐냐고 물어보니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내려다 보며 사람을 잡아먹는 복숭아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여럿 사람이 이 나무 앞에서 목숨을 끊었는데 그 피를 먹고 자란 것인지 싹이 난지 한 해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 만큼이나 자랐다네.”
“인어에 나무라니, 여기는 다 사람 잡아먹는 것 밖에 없습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위험한 나무라면 왜 없애지 않은 건가요?”
“나무에 있는 여인이 내 누이를 닮았거든. 그래서 차마 벨 수 가 없었네.”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의 표정은 비록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리움과 아련함이 드러났다. 이 곳의 모모이가 아오미네의 누이라는 건 그렇게 놀라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미 고인이라는 사실에 조금 착찹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원래 세계의 모모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들어온 자신때문에 아오미네가 죽은 누이를 생각하면서 우울해하는 것 같아 쿠로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살아있을 때 정말 미인이셨겠네요. 마음씨도 착했을테니 분명에 좋은 곳에 있겠지요.”
“지금도 아름답다네.”
지금도라니?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에 쿠로코가 벙쪄서 입을 다물지 못하자 아오미네는 놀란 눈을 마주보고 소리내 웃었다. 그리고 큰 손으로 호탕하게 쿠로코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덧붙였다.
“내 누이는 나와 달리 일찍 혼인을 올려서 여기에 없네. 조금 먼 곳으로 가서 자주 못 보는게 아쉬울 뿐이지.”
쿠로코는 아오미네에게 맞은 어깨를 쓰다드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그녀도 여기에 있으면 더 반가웠겠지만 그래도 살아있는게 어딘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불길한 나무가 모모이를 닮았다는 사실은 찜찜했다.
“오히려 불길한 나무가 당신의 누이를 닮았다면 베어버리는 것이 그녀에게도 좋은 거 아닌가요?”
“무조건 없앤다고 능사는 아닐세. 그리고 이제 더이상 죽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위험한 나무라고 말한것과 다르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치렁치렁한 소매를 걷어 맨살인 왼쪽 팔을 나무를 향해 내밀었다. 첫낳 그가 알몸인 쿠로코에게 자신의 덧옷을 벗어주었을 때 보았던 상처가 많았던 그 팔이었다. 기둥에 붙어 있는 덩쿨은 마치 먹이감 냄새를 맡은 뱀마냥 움직여 아오미네의 팔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후 덩쿨이 감싼 곳에 피가 새어나왔다.
“자신의 피로…….”
상상 속에만 있을 식인식물이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을 처음 본 쿠로코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오미네가 놀라웠다. 왕이라면 튼튼한 부하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나무에게 피를 줄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그의 우직한 책임감 때문일 터.
얼굴도 좋아하는 사람과 닮았는데 성격마저 남자가 반할 정도로 멋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이대로 반할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쿠로코는 원래 세계의 아오미네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모이를 닮은 불길한 나무는 다행히도 아오미네의 피를 얼마 먹지 않고 자신의 덩쿨을 갈무리했다. 상처와 피가 남은 팔을 사당에 걸려있던 면수건으로 닦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그냥 헌혈 한 것처럼 보였다.
헌혈(?)을 끝난 아오미네를 따라 사당을 나와 다시 사직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니 그 안에 있던 와카마츠를 닮은 사람이 미간을 찌푸린 채 쿠로코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쳐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인사라도 할까했지만 아오미네가 그런 그에게 스치듯이 인사하고 훌쩍 가버린 바람에 아무 말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도 딱히 인사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무렇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산책은 경광문(耿光門)을 통해 쿠로코를 압도하게 만들었던 경광전(耿光殿)이 있는 광장에 도착하자 끝났다. 이후에 아오미네는 공무를 보기 위해 편전으로 간다고 했기에 쿠로코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 하루 재미있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말 재미있었나?”
고개를 가까이하고 다시 감상을 물어보는 그의 말에 쿠로코는 의아해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말로 재미었었다고 다시 말해주었다. 무표정한 얼굴때문에 산책이 지루했다고 받아드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다음에 봅세.”
그렇게 말한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어찌나 멋지게 웃던지 주위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궁녀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쿠로코도 같이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 얼굴에 열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그와 헤어지고 머물고 있는 평안재로 돌아가는 길에도 쿠로코 눈 앞에는 자신에게 지어주었던 아오미네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